16.
타임터너로 인해 1년만에 돌아온 집이라지만, 사실상 하루도 비워지지 않았던 해리의 집은 당연히 그대로였다. 그런 집에 스네이프와 그의 짐들이 들어왔을 뿐이었다. 해리는 부서로 복귀했고, 스네이프는 혼자서 이사를 시작했다. 스네이프는 거실에 짐을 두고서 해리가 혼자 살던 집을 찬찬히 둘러 보았다.
머글 집 사이에 오래 전 문 닫은 상점처럼 보이지만, 해리의 집은 마법사들이 모여 사는 높은 아파트였다. 층마다 1가구 씩 들어서 있었고 해리의 집은 7층이었다. 스피너즈 엔드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넓고 환하고 쾌적한 환경이었다. 이런 곳에서 살다가 하루 아침에 스피너즈 엔드에서 적응하며 살아야 했을 해리가 스네이프는 아주 약간이지만 애석해졌다.
거실, 부엌, 화장실 2개, 방 4개, 바베큐 시설이 놓이고 정원을 꾸밀 수 있는 큰 베란다. 혼자 사는 집치곤 욕심이 너무 큰 거 아닌가, 했지만 곧 스네이프는 해리가 지니와 결혼하려 했던 걸 상기했다.
스네이프는 소파에 앉았다. 비가 소강 상태에 접어 들었지만 날이 흐렸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살 미래를 생각하며 이 집을 구했을 해리를 생각하니 기분이 영 가라앉았다. 게다가 아직 그 둘은 헤어지자는 말조차 안 한 관계이니까. 해리와 지니가 현재진행형인 세상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오늘 아침까지 스피너즈 엔드에 있었던 것이 까마득했다.
스네이프는 제 복직에 대해 화를 내던 해리를 떠올렸다. 어리고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함께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던 해리에게 갑작스런 복직 소식은 화낼 만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 넓고 큰 집에 혼자 앉아 있으니 드는 생각이었다. 적어도 애가 셋은 있어야 시끄럽게 공간을 채울 것 같은 집이었다. 스네이프가 학교에 머무는 동안 이 집에서 혼자 출퇴근하는 해리를 떠올려 봤더니, 좀 안쓰러운 듯도 했다.
기숙사 사감 일은 그만 두고 집에서 출퇴근하겠다고 맥고나걸에게 얘기 할까? 수업준비를 하고 학생들의 레포트들을 채점하고 개인 연구를 하는 것엔 학교에서 지내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기에, 스네이프는 자신이 이런 비효율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전부 해리 포터 때문이었다. 결혼이라, 함께 산다라. 혼자 살았던 때와 패턴을 똑같이 할 순 없을 것이다. 알고는 있지만, 그럼 어떻게 바꿔야할 지는 스네이프도 알지 못했다.
“세베루스, 세베루스. 일어나 봐요.”
스네이프는 자신의 가슴을 안고 흔드는 손길을 어렴풋이 느꼈다. 부드럽고 따듯한 체온. 익숙한 느낌에 스네이프는 저도 모르게 그 품으로 파고 들었다. 스네이프의 얼굴 근처에서 웃음을 삼키는 숨소리가 들렸다.
“포터….”
삐져서 마법부로 돌아갈 땐 언제고, 저를 안고 소파에 길게 누워있는 해리가 보였다. 스네이프는 천천히 눈을 깜박여서 초점을 맞췄다. 해리의 녹색 눈이 웃으면서 스네이프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스네이프는 팔을 들어 해리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해리의 쇄골 부근에 얼굴을 파고 들자, 따끈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해리의 손가락이 스네이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왜 여기서 잠들어 있어요. 추운데.”
그러고 보니 벽난로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많이 내린 터라 거실의 공기가 싸늘했을 터였다.
“앉아서 밖을 보다가… 그대로 잠들었나 보군.”
“그랬어요? 난 퇴근하니까 이 집에 당신이 있는 게 너무 신기하고 좋았어요.”
“아, 짐도 못 풀었는데….”
“천천히 해요.”
해리가 스네이프의 귓바퀴에 바짝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흠칫, 스네이프의 허리가 떨렸다. 머리칼을 쓸어내리던 해리의 손이 어느덧 등 선을 따라 내려 와 엉덩이를 지분거렸다. 그동안 약간 살이 붙은 동그란 엉덩이에 해리의 손바닥이 밀착되었다. 스네이프는 잠깐 동안 그 손길을 내버려두다 몸을 일으켰다. 아쉬워하는 해리의 이마에 딱콩을 한 번 날렸다.
“배 안 고프냐?”
“으응, 그래서 세베루스 먹으려고─ 악!”
스네이프는 아예 해리의 이마에 손을 얹어 머리통째로 밀어 버렸다. 골을 붙잡은 해리가 부루퉁해서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하여튼 간에 팔팔한 놈.
냉장고를 열었더니 인스턴트 식품과 스포츠 음료가 몇 개 쌓여 있었다. 이런 걸 먹고 오러 일을 해도 체력이 버틴단 말인가? 스네이프가 쯧쯧 혀를 찼다. 차라리 집요정을 데려 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 블랙 가의 유산은 전부 해리에게 상속 되었으므로, 크리처도 해리의 소유였다. 어쨌든 당장 먹을 것이 부족했다. 스네이프는 레토르트 미트볼과 간편식 스프를 꺼내 보온마법을 걸었다. 샐러드 한 통이 구석에 처박혀 있던 것도 꺼냈다. 마법을 걸어 다시 싱싱해진 샐러드가 파랗게 반짝였다.
“나가서 빵이라도 사올까요?”
뒤에서 스네이프가 하는 양을 머쓱히 지켜 보던 해리가 말했다.
“크리처는 왜 안 데려왔지?”
“네? 아, 혼자 사는데 집요정을 부린다는 게 어색해서요. 그냥 호그와트에서 일하게 놔뒀어요.”
“집요정은 주인인 널 위해 일 하는 걸 제일 기쁘게 여길 거다. 특히나 포터, 네가 이런 시답잖은 음식 쪼가리나 먹고 사는 걸 알면─”
탐탁치 않게 그릇에 미트볼과 스프를 부으면서 스네이프가 말했다. 퉁명스러운 타박에는 해리에 대한 걱정이 스며 있었다. 뒤통수를 긁적대던 해리가 수저를 가져 와 식탁에다 놓았다. 어쩐지 자신의 집인데도 오랜만이어선지 너무 넓고 낯설었다. 식탁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길었었나? 혼자 살 때도 못 느꼈던 집의 크기가 새삼 와닿았다. 스피너즈 엔드의 앙증맞은 크기에 적응이 된 탓이었다.
둘이서 먹기엔 확실히 적은 양이었다. 다 먹은 그릇을 박박 긁던 해리가 스네이프의 눈치를 봤다. 제대로 못해먹고 살았다고 어른에게 혼나는 기분이었다.
“내일 크리처도 데려와야 겠군.”
“세베루스, 여태 우리 둘이서도 충분히 잘 살았잖아요?”
“곧 내가 매일 끼니를 챙겨줄 수 없을 거다. 그렇지만 네가 혼자 있으면서 이딴 음식이나 먹고 사는 건 봐줄 수가 없어.”
“……진짜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 군요.”
해리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푹 숙인 고개가 꼭 산책 못 나간단 소릴 들은 강아지 같았다. 의자 뒤로 축 늘어진 꼬리가 보이는 듯도 했다. 이 놈을 혼자 두고 학교로 돌아가도 될까. 해리가 이런 걸 노리고 저를 불쌍해 보이게 작전을 펼친다면, 어느 순간 자신도 넘어가버릴까봐 스네이프는 한숨이 나왔다.
“해리.”
오랜만에 이름으로 불렀더니 해리의 머리 위로 귀가 쫑긋 서는 듯 했다. 솔직히 귀여웠지만, 스네이프는 그 모습이 얄밉기도 했다.
“이리 와.”
스네이프가 의자를 뒤로 물리고 앉아 양 팔을 벌렸다. 쪼르르 다가 온 해리가 스네이프를 덥석 끌어 안았다.
“세베루스, 미안해요. 내 욕심만 부려서. 당신도 나만 보면서 살 순 없는 건데. 오러 일은 체육 센터 때보다 집도 더 오래 비울 텐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해리의 목소리엔 망설임과 서운함이 스며 있었다. 스네이프는 자신의 어린 신랑의 품에 안겨서 등을 살짝 토닥여 주었다. 고작 이 정도로 마음이 풀어지는데, 저를 이렇게나 사랑해주는데, 자신이 잘못한 걸까. 분명 제가 잘못한 건 없는데, 해리는 자신으로 하여금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래도 당장 복직하는 건 아니니까, 하는 미적지근한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아직은 5월 2일이었고, 학기의 시작인 9월 1일은 멀게 느껴졌다.
해리는 양피지에 쓴 편지를 들고 새장으로 다가섰다. 해그리드가 작년 생일에 선물한 올빼미 헤르메스가 다리를 비죽이 내밀었다. 눈처럼 새하얀 올빼미였던 헤드위그와 달리, 헤르메스는 2살 된 까만색의 올빼미였다. 해그리드가 첫 올빼미를 선물해주었고, 해리가 해그리드의 오토바이를 탔을 때 그의 옆에서 헤드위그를 잃었다. 그래서인지 해그리드는 꼭 다시 올빼미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며, 금지된 숲에서 발견한 헤르메스를 해리에게 주었다. 그 때 횃대에 앉아 있던 퍽스가 편지를 묶는 헤르메스의 옆으로 다가와 친근하게 머리를 붙였다. 그새 둘은 친한 친구가 된 모양이었다.
“너네들 되게 보기 좋다? 응? 둘이 사귀기로 한 건 아니지? 야, 퍽스 너는 몇 살인데 두 살짜리 애를.”
“꾸끅.”
퍽스가 장난스레 해리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헤르메스가 울음을 흘리며 날개를 퍼드덕 거렸다.
“하핫. 알았어 알았어. 친하게 지내. 헤르메스, 이걸 지니에게 전달해 줘. 퍽스 너도 헤르메스랑 같이 다녀오고 싶으면 또 호그와트에 갔다 올래? ”
새벽에 스네이프의 묘비 위에서 울었던 퍽스가 이번에도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헤르메스와 퍽스가 날개를 펼치고 창 밖으로 날아갔다. 해리의 웃던 얼굴에서 점차로 미소가 사라졌다. 지니,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텐데. 내일 아침, 예언자 일보에 실릴 타임터너와 그걸 사용해 세베루스 스네이프를 되찾아 온 해리 포터의 소식과 함께, 지니는 이 편지를 받게 될 것이다.
월요일 아침부터 호그와트 대연회장이 시끄러웠다. 신문을 구독하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1면을 가득 차지한 기사를 보고 저마다 떠들어댔고, 구독하지 않는 학생들도 기사를 읽어 보자고 난리였다. 교수 석에서도 놀라움과 흥분으로 한껏 술렁대는 것이 보였다.
<돌아온 영웅? 세베루스 스네이프 ~해리 포터가 찾아낸 두 가지~>. 굵은 볼드체 제목 밑으로 크게 인쇄 된 사진에는 오러 부서 앞 복도에서 스네이프와 그의 옆에 서서 지팡이를 치켜 든 해리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흥분한 지니의 친구들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 와 어깨를 흔들었다. 지니는 정말 기쁜 마음으로 신문을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어제 새벽의 추도회 때만 해도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해 마음이 무거워 보였던 해리였다. 그런데 당장 다음 날인 오늘 이런 반가운 기사라니!
그러나 기사를 읽어 내려갈수록 지니의 낯은 어두워졌다. 타임터너? 과거로 돌아가서 1년 간 스네이프 교수님과 함께 살았어야 했다고? 모두들 이 놀라운 소식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해리와 그 스네이프가? 그 앙숙들이? 주변의 여학생 무리에게서 어떻게 해리가 안 죽고 살아 있는 거냐는 우스갯소리가 들렸다. 혈압이 올라 죽거나 스네이프랑 싸우다 저주 주문을 맞거나 독약 탄 음식을 먹고 죽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깔깔깔 웃었다.
지니는 그것보다, 자신도 모르던 사이에 1년간 숨어 지냈어야 했을 해리에 대한 안쓰러움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때, 해리의 올빼미인 헤르메스가 날아와 익숙하게 지니의 앞에 다리를 내밀었다. 까만 올빼미가 해리의 것인 걸 아는 학생 몇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니를 흘낏거렸다. 지니는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자친구의 편지에 기분이 들떠서가 아니었다. 뭔가,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지니, 나야 해리.
너에게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어.
직접 얼굴을 보면서 해야 할 말이야.
좋은 얘긴 아니라고… 미리 알려둘게.
너무 기대하지 말아줬음 좋겠어, 미안해.
저녁식사 전에 호숫가의 고목나무 밑에서 기다릴게.」
해리의 편지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스네이프 교수님을 찾았다는 이야기도, 1년간 숨어 지내느라 고생했었단 말도 없었다. 물론 그게 직접 얼굴을 보고 해야 할 말일 수도 있었지만, 해리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늘 해리가 편지 말미에 적었던 사랑해, 좋은 하루 보내 같은 말 또한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지니는 어쩐지 불안해졌다. 어디에서 기인한 불안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니의 눈이 흘낏 기사 속 스네이프의 얼굴에 머물렀다.
“해리!”
“…아, 론.”
어제 오프였던 론이 신문을 들고 해리에게 다가 왔다. 해리는 론의 붉게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급격히 속이 울렁거렸다. 물론, 지금 론을 마주하는 것도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해리는 호박주스를 컵에 따르고 론에게 넘겼다. 그리고 다시 제 몫의 주스를 따랐다.
“기사 진짜야? 우리 가족 완전 다 뒤집어졌어! 네가 스네이프랑 같이 살았다니! 내가 출근 안 한 하룻밤새 과거로 돌아 갔었다니, 친구! 고생 많았네.”
론이 엄지를 척 들고 윙크 했다. 론의 질문은 해리가 출근 길에만 300번은 더 들었을 질문이었다. 해리는 자신이 너무나 유명하단 사실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마법부에서 근무하다 보면 더 그랬다.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자신이 해리 포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아무리 열심히 피해도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는 해그리드의 동생이 등장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숨이 턱 막히게도, 제 친구이자 지니의 오빠인 론이었다. 해리는 단짝친구와 같은 직장인 것이 이제 와서 후회될 줄은 정말 몰랐다. 차가운 호박 주스를 목으로 넘겨도 입 안이 깔깔했다.
“스네이프랑 살았다니, 상상이 안돼. 완전 지옥 아니었냐? 어떻게 계속 살았대. 난 진짜 해리 네가 존경스럽더라니까?”
론이 가벼운 목소리로 떠들었다. 해리는 얼굴에 미소조차 띄우지 못했다. 완벽한 표정 관리 실패였다.
“…론, 네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았어. 오히려…… 아니, 좋았어. 서로 응어리 졌던 걸 풀고 지내서.”
“…그래?”
론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해리를 쳐다 봤다. 해리의 시선이 묘하게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 바빠서. 나중에 제대로 얘기 하자.”
해리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론은 호박주스를 쥔 채로 해리 쪽을 보며 서 있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 해리가 저를 속이고 있단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숨기는 게 있다거나. 론 역시 오러로 일 하면서 직감이 늘었다. 그리고 그런 건 늘 오차 없이 들어맞는 일이었다.
책상마다 오늘자 예언자 일보가 놓여 있었다. 1면을 장식한 스네이프와 해리의 투샷이 론의 파란 눈에 가득 찼다.
지니는 마지막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해리가 보낸 편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벌써 종이 끝이 너덜대며 구겨진 편지지가 꼭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미안해. 미안하단 문장이 해리의 목소리로 들리며 자꾸만 가슴을 콕콕 찔렀다. 곧 다달이 하는 월경이 다가와서 괜스레 감정이 너울을 타는 것일 거다. 지니는 그렇게 생각하고자 했다. 그러나 해리를 만날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 시간과 멀어지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해리는 1년이나 내가 모르는 시간 동안에 있었어.'
……스네이프 교수님과.
그런데 그 사실이 왜 그렇게 신경쓰이는 지 지니는 알 수 없었다. 해리가 스네이프를 얼마나 싫어했는 지, 아니, 호그와트 학생들 중 슬리데린을 제외하면 누가 그를 좋아했을 지 몰랐다.
물론, 지니는 스네이프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의 해리의 모습도 알았다. 직접 교장실에 스네이프의 초상화를 추진하고 무죄 재판에 전쟁 후 가장 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해리였다. 신문에 기사가 1면으로 보도 되었고, 해리는 어쩌면 그 기사가 나오면 스네이프가 다시 나타나줄 것이라 믿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첫번째 추도식이 있을 때까지 스네이프는 마법세계에 어떤 흔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당시에 스네이프는 다름아닌, 과거로 돌아간 해리와 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대체 해리는 무슨 생각이었는 지……. 지니는 머리가 아팠다.
“지니? 수업 끝났어. 저녁 먹으러 안 가?”
“아, 나 잠깐 볼 일이 있어서. 먼저들 먹고 있어!”
멍하게 있다 보니 수업이 끝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 황급히 교과서와 지팡이를 챙긴 지니가 성의 정문으로 향했다. 다들 저녁을 먹기 위해 들어가 호숫가는 인적 없이 조용했다. 고목나무 근처에는 음영이 하나 앉아 있었다. 해리. 지니는 입 안으로 그녀의 남자친구의 이름을 웅얼거렸다. 어쩐지 목소리가 쉽게 터져나오지 않았다.
성 쪽을 돌아보던 음영은, 붉은 머리카락의 여학생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섰다. 평소 같으면 달려 와서 안아줬을 텐데, 지니는 여전히 멍한 정신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해리.”
이제야 입이 열렸다. 해리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자신의 앞에 선 지니를 바라 보았다. 지니가 멋쩍게 두 팔을 벌렸다. 해리가 아, 하더니 포옹을 해주었다. 지니는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아 해리에게 안긴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지니. 마른 것 같다.”
포옹을 풀었더니 해리가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 어제도 봤잖아.”
“아, 아… 미안. 예언자일보 읽었지? 1년 만에 현실로 돌아왔더니….”
해리가 머쓱하게 헛기침을 했다. 지니는 어제 본 해리의 모습이 아직 선명했는데, 해리의 모습에서 분명히 느껴지는 저를 낯설어하는 태도가 어쩔 수없이 서운했다.
해리는 오늘 붉은색의 오러 정복 차림이었다. 퇴근 후에 바로 왔구나. 문득, 지니는 처음 해리가 그 옷을 입었을 때의 기억이 났다. 사진으로 그 날의 추억을 남겼었다. 지니는 그가 너무 멋있고 자랑스러워서 환하게 웃으며 그 품에 안겼다. 언제까지나 지니에게 해리는 멋있고, 자랑스러운 존재인 건 변함 없을 것이었다.
“해리, 걱정했어. 1년이나 우리 모르게 숨어 살며 지냈어야 했다니. ……스네이프 교수님과.”
“…지니, 잠깐 앉자.”
해리가 지니의 손을 잡고 나무로 이끌었다. 둘은 그 아래에 앉아, 조용히 호수에 어둠이 깔리는 걸 지켜 보았다. 별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해리, 할 얘기란 게 뭐야?”
침묵이 길어지자, 지니가 먼저 웃으면서 입을 뗐다. 해리만 믿고 있다간 이대로 날 밤을 새야할 지도 몰랐다. 해리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리고 지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맑고 단단한 초록색 눈은, 지니가 어떤 말을 해도 흔들림이 없을 것 같았다.
“헤어지자, 지니.”
“역시. 그거였구나.”
지니는 하루종일 자신의 가슴을 꽉 죄어오던 불안에서 오히려 해방된 기분이었다. 한계까지 찌부러졌던 심장이 탁, 하고 놓아 풀린 듯했다. 해리는 예상했다는 반응인 지니에 얼떨떨해보였다. 머릿속으로 제 편지 내용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중인 게 뻔히 보였다. 지니는 크큭 웃으며 해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맑은 밤 하늘, 고요한 호수, 해리와 함께 다녔던 학교. 그것들을 지니는 눈에 새겼다.
“어떻게……?”
“전부 해리 너답지 않았잖아. 편지에 사랑한다는 말도 없고, 날 보자마자 안아주지도 않고.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선 나를 보는데 어떻게 몰라.”
“아, 지니, 정말 미안─”
“미안하단 말은 됐어! 그래서, 이유가 뭐야? 과거로 갔을 때 어떤 심경변화가 있었어?”
지니가 무릎을 모아 안고 해리를 돌아보았다. 해리의 안경 밑 뺨이 조금 붉어져 보였다.
“들으면 다들 놀랄 거야…. 나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서. 세베루스, 아니 스네이프 교수님을 사랑하게 됐어. 그래서 지니 너랑 계속 사귈 수가 없어. ……많이 놀랐지?”
지니는 고개를 저었다. 해리가 지금까지 누구와 계속 있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무리 상대가 의외의 사람이었어도 말이다. 해리는 말없이 지니의 눈치를 살피다가, 호수에 시선을 두었다. 대왕오징어는 깊은 곳에 들어가 있는지 표면은 고요하기만 했다.
“스네이프 교수님도 해리 너를 좋아하셔?”
지니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해리는 저도 모르게 풉, 하고 터지듯 웃음을 흘렸다. 지니가 해리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봄의 밤에 청명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응. 서로 좋아해. 지니, 미안, 네 앞에서 이렇게 웃으면서 할 얘기는 아닌데…….”
“왜 안돼? 이렇게 재미있는 주제를 나만 모르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나저나 해리 대단한데? 어떻게 그 스네이프 교수님을 꼬셨지? 역시 내가 만났던 남자는 다르네. 앞으로도 내가 고를 남자는 멋지겠지, 그렇지, 해리?”
“응…… 맞아, 지니. 넌 분명히 좋은 사람을 또 만날 거야. 아, 맞아 저녁! 미안해, 배고플 텐데 너무 붙잡고 있었다. 아직은 남아있을 거야. 같이 들어가자, 지니.”
해리가 손을 뻗어 지니의 손을 잡았다. 전애인 손을 이렇게 덥석덥석 잡아도 돼? 스네이프 교수님은 질투 없으셔? 지니가 재잘재잘 물으며 해리와 걸음을 맞춰 성으로 돌아갔다. 아마 해리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부터는 눈물을 쏟겠지만, 해리의 앞에서 지니는 어쩐지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아침에 신문 1면까지 도배했던 해리가 오러 정복을 입고 대연회장에 들어서자, 늦은 시간까지 남아 저녁을 먹고 있던 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지니는 이렇게 멋진 남자가 방금 제게 이별을 고했다는 게 못내 애석하게 느껴졌다. 나름대로 쿨하게 받아줬다고 생각했는데.
그리핀도르 식탁에 해리가 착석하자 다들 난리가 났다. 학년과 기숙사를 가리지 않고 학생들이 해리의 주변으로 모여 들었다. 지니가 해리는 지금 저녁을 먹어야 한다고 좀 이따 와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7학년 졸업반의 지니 위즐리의 호통에 다들 쭈그러져서 물러 났다. 해리는 웃으면서 그릇에 남아있는 음식들을 덜었다. 본식이 있을 때 들어와서 다행이었다.
“해리!”
“네빌!”
스프라우트 교수의 밑에서 조교를 하고 있는 네빌이었다. 다음 새 학기에는 정식 교수가 될 네빌이 교수석에서 내려와 해리의 옆에 앉았다. 반갑게 등을 친 해리가 나머지 손으론 바쁘게 음식을 입에 밀어 넣었다.
“무슨 일로 온 거야? 오러 용무?”
“아니. 지니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해리, 그렇게만 얘기하면 네빌이 오해해. 우리 사이가 아직도 이상 없는 줄 알잖아.”
“잠깐, 너희 둘 무슨 얘기야?”
네빌이 어리둥절하게 지니와 해리를 번갈아 보았다. 지니가 팔꿈치로 해리의 어깨를 툭 쳤다. 해리는 방금 감자를 삼키려고 한 것을 후회하며 가슴팍을 퍽퍽 때렸다. 네빌이 센스 있게 물 잔을 건넸다.
“우, 우리 헤어졌어.”
“뭐?! 언, 언제?”
“방금. 해리에게 차이고 온 길이야. 네빌, 그래서 말인데 나 옆구리 시리니까 해리 말고 내 옆으로 와서 앉아줄래?”
지니의 너스레에 이게 진짠지 아닌지 어리둥절해하며 네빌이 해리를 쳐다 보았다. 해리는 머쓱해서 호박주스까지 찾아 마셨다. 이별이란 게 이런 거라면 앞으로 두 번 다신 하지 말아야지. 물론 스네이프랑은 이별 할 일이 없을 테니 다행이었다.
“왜? 해리, 왜?”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할 얘긴 아닌 것 같아…. 네빌.”
해리가 진땀빼는 걸 보았는지 착한 심성의 네빌은 궁금했지만 더 물어보진 않았다. 대신에 오늘 신문을 봤다고, 스네이프 교수님을 되찾아서 너무 다행이라고 말해주었다. 해리 만큼, 아니 해리보다도 더 많이 스네이프에게 괴롭힘 당했던 네빌이었지만, 그의 말에서 진심이 보여서 해리도 고마웠다. 진정한 용기의 그리핀도르는 역시 저보다는 네빌 롱바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스네이프에게는 무조건 네빌에게 사과하라고 시킬 생각이었다.
“네빌, 지니, 사실 지금 스네이프 교수님도 호그와트에 있어.”
“뭐? 진짜?!!”
1년간 감감무소식이던 남자의 ─게다가 다름아닌 어제 추도식을 가졌던─ 호그와트 깜짝 방문 소식에 지니와 네빌 모두 놀랐다. 특히 지니는 어떤 얼굴을 해야할 지 몰라 난감했다. 반갑긴 한데, 이젠 그가 자신을 방금 찬 전 남자친구의 현 애인이라는 게. 어쨌든 당장은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지니는 대충 샌드위치를 챙겨서 둘에게 손을 흔들었다. 해리는 지니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미안해하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진짜 죄인이 된 기분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해리는 정말 이걸 끝으로 두 번 다시는 이별을 겪지 않을 결심을 세웠다.
“스네이프 교수님은 왜 오신 거야? 지금 어디에 계셔?”
“교장실에서 맥고나걸 교수님을 기다린다고 했어. 음, 맥고나걸 교수님이 교수석에 안 보이시는 걸 보니 지금 만나고 있겠다. 그─ 호그와트 복직 문제로.”
“헉! 정말?! 호그와트로 다시 돌아오시는 구나!”
네빌이 놀라워하면서도 기뻐했다. 해리는 막 입 안 가득 생크림 케이크를 밀어 넣었는데, 기묘하게도 씁쓸한 맛이 혀 끝에 돌았다. 물론 집요정들이 정성껏 구운 케이크가 상했을 린 없었다.
“해리? 왜 죽상이야?”
“어, 그게…… 솔직히 난 스네이프 교수님이 복직하시겠다는 게 맘에 안 들어.”
“왜?? 그 분은 늘 호그와트에 계셨잖아. 교장까지 지내셨는 걸.”
“네빌, 있잖아…. 그게 말야, 사실….”
해리가 네빌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붙이고 속삭였다. 주변에 앉아있는 학생들이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었다. 네빌은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지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양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더니 다시 앉았다. 그 요란한 반응은 멋쩍었지만, 다행히 소리치지 않아준 네빌이 해리는 고마웠다.
“─세베루스!”
“맥고나걸 교수님.”
스네이프는 목례를 했고, 맥고나걸은 이미 눈에 가득 눈물이 고인 채 다가가 스네이프를 안아 주었다. 비록 저보다 훨씬 큰 키의 스네이프에게 안긴 것처럼 보이긴 했어도, 스네이프는 나이 든 자신의 은사가 저를 품어주었다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저에게 공격 주문을 날리던 그녀였는데. 그녀는 이미 그 날을 후회하고 스네이프를 다시 안을 수 있는 오늘이 온 것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스네이프는 해리 외의 사람에게 이렇게 긴 포옹을 당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해리때문에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 마음이 울렁여서 그런 지 선뜻 그녀를 먼저 밀어낼 순 없었다. 그녀에게 안겨있는 뒤로 초상화 속 덤블도어가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의 자신의 초상화까지. 딱딱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는, 교장실에 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는 기분이란. 자신은 이런 곳에 걸릴 만한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민망함에 스네이프는 시선을 틀었다. 맥고나걸이 긴 포옹을 풀고, 스네이프를 따스하게 올려다 보았다.
“잘왔다. 잘 돌아왔어, 세베루스. 너에게 하고 싶던 말도 많고 용서를 구할 일도 많단다.”
“미네르바, 용서라니요. 저에게 당신이 용서를 구하실 일은 전혀 없습니다. 용서는 제가 구해야할 일입니다. 당신 입으로 그런 내용은 일절 듣지 않겠습니다.”
“고집은. 여전하구나, 세베루스. 물론 정말 자네인 게 느껴져서 기쁘기도 하지만.”
맥고나걸이 의자를 불러냈고 스네이프는 그녀와 마주 앉았다. 덤블도어가 너무 잘 보이는 위치였다. 스네이프는 일부러 시선을 벽 쪽으로 틀었다. 껄껄 웃는 덤블도어의 목소리는 못 들은 척했다.
“그래, 복직 상담이라고 했지. 우선, 지금 마법약과 슬리데린 사감 일은 슬러그혼 교수님께서 여전히 맡아주시고 계신다. 하지만 원래도 교편에서 물러나 휴식을 취하고 계셨던 만큼, 자네가 돌아온다면 당장 직함을 넘기고 떠나주실 거다.”
맥고나걸의 깊게 패인 주름만큼, 좀 더 너그러워진 미소가 스네이프에게 머물렀다. 스네이프는 말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기숙사 사감 일은 하지 않는 쪽으로 하고 싶습니다.”
“아니, 왜? 슬리데린 기숙사에 자네 만큼 애정이 있는 사람도 없는데. 혹시 업무가 과중했나?”
“집에서 출퇴근을 하고 싶어서… 사감 일이 있으면 학교에 계속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집에서? 물론 그러는 교수도 있긴 하지만─ 갑작스럽게 패턴을 바꾸려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구나, 세베루스.”
스네이프는 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고 답을 어물거렸다. 맥고나걸은 신선한 느낌을 받으며 그가 내놓을 이유를 기다렸다. 그 순간, 교장실 밖의 계단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네이프와 맥고나걸 모두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리.”
해리가 스네이프에게 윙크하며 들어 왔다. 지니에게 제대로 말하고 왔다는 해리 나름의 신호였다. 스네이프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올라가 웃었다. 그 둘의 모습을 맥고나걸이 보고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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