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해리 쩐쟁님!”
널고 있는 티셔츠 뒤로, 아이의 명랑한 목소리가 났다. 티셔츠로는 빛이 투명하게 비쳤다. 그 티셔츠 옆으로 해리가 고개를 내밀었다가, 환하게 웃었다. 동료교사인 레이첼의 아들 찰스였다. 찰스는 짧은 다리로 아장아장 잘도 뛰었다. 어이쿠! 급한 마음에 아이가 해리의 앞에서 넘어질 뻔했다. 아이를 안아 올리며, 해리가 등을 토닥여주었다. 네 살이었던 찰스는 어느새 다섯 살이 되었다. 작년 여름에 엄마 따라 놀러오라 말했던 작은 아이가 이젠 체육교실에 다녔다. 해리는 조금 더 가늘어지고, 조금 더 길어진 아이의 팔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봄이었다.
“이거요, 쩐쟁님 주려구….”
“이거? 어, 이거 선생님 흉터랑 꼭 닮았네.”
그러고 보니 고사리 같은 손 안에 번개모양의 작은 나뭇가지가 들려있었다. 집 정원에서 주웠다며, 선물이라고 내미는 것에 해리는 웃음이 났다. 이거 주려고 그렇게 빨리 뛰어왔어? 넘어지잖아, 찰스. 해리가 품에서 찰스를 내려놓으며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찰스는 씩씩하고 용감해서 괜찮아요! 아이의 명랑한 목소리에 해리는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씩씩하고 용감한 건 해리가 아주 좋아하는 것이었다. 넌 그리핀도르에 들어가겠는걸, 찰스. 영문 모를 소리에 찰스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해리는 그저 싱긋 웃으며 나뭇가지를 만지작거렸다. 이 마을엔 릴리 이후 마법사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찰스가 만약 마법사라면 재밌을 것이다. 호그와트에 들어가서 해리 포터라는 이름을 듣게 되고, 번개모양 흉터에 대해서도 알게 된 뒤, 그 위대한 마법사들의 영웅이 제게 ─머글들의 운동인─ 농구를 가르쳐줬다는 걸 알면. (게다가 해리는 뛰어난 퀴디치 수색꾼이었는데 말이다.)
“해리, 찰스! 여기 있었네.”
“아, 레이첼. 이거 봐요, 찰스가 제게 선물을 줬어요.”
“하하, 어제 저걸 발견하고는 방방 뛰면서 해리 선생님 줄 거라고, 줄 거라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요, 해리.”
레이첼이 다가오자 찰스가 쪼르르 달려가 엄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뭇까지, 해리 쩐쟁님한테 줘떠! 그래, 잘했어. 선생님이 마음에 드신대? 레이첼의 눈빛이 다정하게 찰스를 돌아보았다. 해리의 눈빛도 꼭 레이첼처럼 다정하고 따듯했다. 해리는 그들을 볼 때마다 저 역시 저런 가정을 꾸리고 싶어졌다. 자신은 부모의 애정을 맘껏 받지 못하고 자랐기에 그랬을까, 해리는 화목한 가정에 유독 눈이 갔다. 1년 가까이 어린이들이 다니는 체육교실에서 일했기 때문에, 사실 해리는 매일같이 부모와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해리는 가끔씩 그들을 보면서, 제 아들이나 딸에게 퀴디치와 농구를 가르쳐주는 상상을 하곤 했다.
세베루스는 애를 못 낳지만, 뭐. 어떤가. 상상이면 없는 자식도, 손자까지도 생겼다. 저와 스네이프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는 어떤 생김새일까, 누구 성격을 더 닮았을까 생각하는 것은 즐거웠다. 저를 꼭 닮아서는 스네이프처럼 똑똑하고 차분한 아이를 상상하다가, 스네이프를 닮은 얼굴로 활발하고 퀴디치도 잘하는 아이를 상상하면 그저 즐거웠다. 마법의 힘으로 남자도 임신이 가능하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수업시간에 그런 약이나 주문을 배운 기억은 없었다. 아, 할 수 있었어도 세베루스는 노산이니까 힘들겠다, 생각하면 아쉬움이 좀 덜어지기도 했다. 사실 해리는 정말 임신이 가능만 하면 제가 대신 할 수도 있는데, 라는 생각까지 했지만, 어쨌든 언제나 상상으로만 그쳤다.
“해리? 무슨 생각해요?”
“아… 저도 자식 낳고 싶단 생각이요. 레이첼이랑 찰스를 보니까.”
해리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레이첼은 해리의 대답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이 아직 계획이 없다고 그래요?”
그녀는 해리의 ‘부인’이 남자인 줄은 몰랐다. 속일 생각은 없었는데, 사실 따지자면 ‘결혼’부터 하기 전이었다. 스네이프는 본인도 모르는 새 해리의 직장에서 해리와 결혼한 사이로 되어 있었지만, 딱히 해리는 그걸 정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글쎄요, 아직 안 물어봐서요. 근데 어차피 낳지는 못해요.”
“네?! …아, 혹시…?”
“아! 아뇨, 아뇨. 불임이라거나 그런 거, 아니니까요. 그냥, 제 부인이 남자라서 그래요.”
“아하…. 그렇구나, 그거 정말 다행……. 남자였어요?!”
“어… 그냥 결혼했다고만 했었죠.”
“어머! 그랬구나…. 내가 멋대로 여자라고 단정 지었네, 미안해요! 그래서 부인 안 보여준 거였어요? 그동안….”
“아니…. 그건 절대 아니고요, 제 부인의…… 성격이 좀.”
하하…하하핫…. 해리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레이첼은 자신이 편견을 갖고, 반려를 여자라고 단정 지은 것에 대해 계속 사과했다. 해리는 정말로 괜찮았지만, 레이첼이 그렇게 말해주어서 내심 고마웠다. 처음으로 남들 앞에 스네이프와 자신의 관계를 내보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찜찜한 마음이 드는 것은, 해리 본인이었다. 사실은 스네이프와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네이프는 저녁 내내 기분이 오묘했다. 해리가 저를 집요하게 보는 시선은 이미 익숙했다. 하지만 오늘 저녁의 것은 느낌이 약간 달랐다. 해리가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것 같기도 하고, 평소랑 같은 것 같기도 하고, 할 말이 있어 보이긴 하는데, 해리가 말을 해도 중요한 말은 쏙 빼놓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만 좀 쳐다보지.”
결국 스네이프가 입 밖으로 말을 내었다. 해리는 아, 하더니 눈을 옆으로 굴리고 헛기침을 했다. 왜 저래? 이번에야말로 스네이프는 확신했다. 평소 같으면 그만 보라는 제 말에 능구렁이같이 굴었을 해리였다. 뭔가가 있군. 턱을 괴고 해리를 보면서 스네이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아직 5월 2일은 일주일 남았는데.”
해리는 다시 한 번 스네이프의 시선을 피했다. 스네이프는 레질리먼시를 써서 머릿속을 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곧 그만두었다. 연인 사이에 그런 마법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신뢰라는 낯간지러운 단어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해리의 교수였고 가르치는 입장이었을 때나 할 법한 주문이었다. 달라진 관계인 해리에게 멋대로 하고 싶지도 않았고, 어차피 해리가 자신에게 끝내 감출 비밀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이건 놀라울 정도의 신뢰였지만, 스네이프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바야흐로 1999년 5월 2일이 코앞인 날이었다. 작년 여름, 해리의 생일을 기점으로 겨울까지는 마음 편히 지냈지만, 요즈음 해리는 다시 미래 자신이 살던 세계에 합류하는 것에 대해서 전전긍긍이었다. 스네이프와 해리 단 둘만의 세계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었다. 돌아가서 지니에게 어떻게 말해야할지 걱정하는 게 90%이상 같았지만, 스네이프는 모른 척 해주었다. 자신 역시 해리의 주변 인물들 앞에 해리의 연인으로서 서는 게 부끄럽고 민망해서 해리를 생각해줄 틈이 없었다. 해리의 주변 인물들, 이라 하면 멀게 느껴지지만 실상 그들은 위즐리 가족이나 자신의 옛 제자들, 옛 동료교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갑자기 살아 돌아와 마법세계 영웅인 해리 포터의 연인이라니…… 리타 스키터가 쓴 삼류 기사도 이보다는 설득력이 있겠다, 싶었다.
스네이프는 끙, 앓는 소릴 내며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해리가 눈치를 보며 다시 스네이프 쪽을 흘낏거렸다.
“…있잖아요, 세, 세베루스.”
“…드디어 말할 용기가 생긴 건가? 실로 그리핀도르 출신다운 용감함이로군, 포터?”
“슬리데린다운 엄청난 빈정거림이셨어요, 세베루스. 아, 그게…… 어, 그러니까.”
“대체 뭔 소릴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지?”
“그러니까, 마법으로 남자도 임신 가능해요?”
“……계속 그렇게 뜸을 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포터.”
순식간에 스네이프가 지팡이를 들고서 눈을 번뜩였다. 스네이프가 지팡이를 뽑아드는 동작은 오싹할 만큼 민첩했다. 비록 오랜 시간 데스이터 생활을 그만뒀지만, 그 모습이 떠오를 정도였다. 해리는 그 기백에 놀라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물론,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더 물러날 곳은 없었다. 해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일단 항복의 표시로 양손을 들었다. 스네이프는 해리를 지그시 노려보다, 지팡이를 휙 하고 거뒀다.
“갑자기 임신이라니, 황당하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그게, 우음, 전 세베루스와 평생 살 거고, 우리 사이에 아이도 있으면 정말 좋겠다싶어서…….”
“……누구 맘대로. 내가 언제 평생 살아준댔지?”
“네? 저랑 헤어질 생각도 없으시면서 무슨 소리세요.”
이런 해리의 발언에는, 스네이프도 더 삐죽거리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해리는 정말로 부끄러울 정도로 스네이프의 내면을 정면으로 찔러 들어왔다. 해리의 태도에는 아무런 망설임조차 없었다. 의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스네이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에 해리는 의심 없이 확신했다. 그 직선의 시선이 스네이프로 하여금, 거짓 투정도 부릴 수 없게 했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그런 점이 놀라웠다. 그리고 내심, 겉으로 티를 내지 않는 자신의 성격상, 해리가 말 안 해도 제 마음을 알아주고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그 말은 프러포즈인가?”
하지만 해리를 당황시키고 싶기는 했다. 해리는 아무 생각이 없어보였다가, 방금 제 말을 프러포즈로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함께 평생 살고, 아이도 낳고 싶다, 라….”
“그…그게 그렇게…되나……요.”
“그게 그렇게 되는 것 같은데, 포터.”
스네이프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해리를 비웃었다. 그리고는 스네이프가 포크를 들어 구운 야채를 뒤적였다. 해리의 속내도 알고, 놀리기도 했으니 한껏 마음이 편해져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리는 귀까지 붉어져서 식탁 위의 음식들만 뚫을 듯이 보고 있었다.
“남자와 남자 사이에선 아이가 생기지 않지. 아무리 마법을 부려도. 자궁을 만든다고 해도 어쨌든 그건 여자의 신체기관이니까, 남자가 임신한다곤 볼 수 없어.”
“아, 역시 그런가요….”
해리는 이제 다소 시무룩해보였다. 여태 한 섹스가 얼만데 당연히 임신이 안 된다는 걸 깨닫고도 남지 않았을까. 역시 해리 포터는 멍청했다, 사람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스네이프는 생각했다. 하지만 일하는 곳에서 아이들과 항상 함께 하는 해리이니,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다른 집 자식들도 그렇게 예뻐해 주는데, 포터가 제 자식은 얼마나 예뻐할까. 스네이프의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봐도, 해리는 좋은 아빠가 돼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스네이프 자신에 그 그림을 대입해보면, 좋은 아빠가 돼줄 자신이 없어졌다. 보고 자랐던 제 아버지였던 자는 인간쓰레기였고, 저 스스로도 자랑스러운 인생을 산 게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릴리가 결혼한 후로는 한 번도 결혼이나 자식 같은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실 스네이프로선 처음 해보는 생각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자식은 가지지도 못하는데, 침울해지는 게 우스웠다. 스네이프는 조금 씁쓸해졌다.
“저, 세베루스.”
“왜, 포터.”
“사실… 저, 직장에선 제가 결혼한 유부남인 줄 알아요.”
“뭐라고?”
“어떻게 알았는지 제가 동거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더라고요. 성별은 모르고요. 그래서 결혼했다고 말했었는데.”
“포터, 그런 걸 네 맘대로…!”
“그건 죄송해요. 하지만 세베루스를 제 부인이라고 칭하는데 기분이 좋아서….”
“하, 참나…! 갈수록 가관이군. 부인? 내가 부인이라고?”
스네이프의 이마에서 혈관이 툭 불거질 것 같이 도드라졌다. 해리는 아까부터 스네이프의 심기를 거슬리는 게 잘하는 행동인가 싶긴 했지만, 1년 후가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오해를 받았던 것도, 스네이프에게 말하지 않고 있었던 것도 모두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었다.
“그냥, 전 세베루스와 제가 결혼한 사이로 오해받는 게 기뻤어요. 그 분은 성별을 모르고 세베루스를 여자인 줄 알았을 뿐이고요. 어…그리고 오늘 세베루스가 남자라고 말했더니, 그랬던 거냐고 몰랐다고 사과하셨어요.”
“…….”
“아까 제가 한 말 프러포즈 아니냐고 하셨는데… 저한테 너무 당연한 미래라고 생각해서, 그렇게까지 의식을 못했어요. 제 미래에 이제 세베루스가 있는 게 당연해서…요. 갑자기 진지하게 말하려니까 쑥스럽고, 무엇도 준비 못해서 죄송하기도 하고…. 아이 못 낳으면 어때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저, 세베루스랑 결혼하고 싶어요.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것, 아니, 그 말을 했었어야 했던 것 같아요….”
해리는 말을 끝내고 한참, 스네이프를 쳐다보지 못하고 그릇만 내려다보았다. 스네이프 역시 해리처럼 침묵을 지키며 아무 말이 없었다. 정말 뜬금없는 프러포즈고, 형편없는 프러포즈였다. 실망하셨을까, 황당하신 걸까? 두려우면서도 해리는 스네이프가 이 프러포즈를 거절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네이프의 사랑에 대한 신뢰는 한 치 흔들림이 없었다.
해리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어깨 아래까지 길어진 스네이프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가렸다. 해리는 오른손을 뻗어서 스네이프의 까만 머리카락을 한 쪽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꾹 다물린 입술과 눈물이 맺혀있는 스네이프의 눈가가 벌겠다. 이런 형편없는 고백이었는데도, 해리는 제 마음을 알아주는 스네이프가 고마웠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자존감이 낮았고, 제 사랑을 온전히 받는 것에 겁냈었는지도 이제는 알았다. 작년 여름, 자신의 생일 다음날, 모든 게 박살날 것만 같았지만 오히려 사랑은 견고해졌다. 둘은 서로를 똑바로 마주했고, 서로를 알았다. 그래서 진심으로 꺼낸 자신의 말에 눈물이 고이는 스네이프의 속마음이 어떨지도 알 수 있었다.
“…포터.”
“네, 세베루스.”
“…나 역시, 생각도 못했지만, 너와 같은 말을 했어야 했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랑 결혼하고 싶다고요?”
“…그래.”
결국엔 스네이프의 눈에서 고여 있던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해리는 그의 얼굴을 감싼 손의 엄지로 눈물을 훔쳐 주었다. 가슴 안쪽에서부터 따듯한 열기가 퍼졌다. 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건, 알고 있었어도 여전히 기뻤다.
“결혼, 이라고 하니까 거창하지만… 사실 지금 사는 거랑 똑같을 거예요. 그래서 둘 다 생각도 못하고 있던 건가 봐요. 당연해서.”
‘당연하다.’ 그 말이 스네이프는 참 뜨겁게 느껴졌다. 해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네이프는 제게 다가와 내려다보는 해리를 마주 올려보았다. 자연스럽게, 해리의 품에 몸이 맡겨졌다. 스네이프는 자신을 끌어안아주는 해리의 양팔에 얼굴을 묻었다. 해리의 온도는 늘 같았고, 항상 안온했다.
“새삼스러운데, 머리가 많이 길었네요.”
“그렇지. 한 번도 자르지 않았으니까.”
침대에 나란히 누워, 시트 위로 흐트러진 스네이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해리가 말했다.
“5월 2일이 되기 전에 자르는 게 나을까…. 세베루스가 너무 예뻐져서 다들 몰라보면 어떡하죠.”
“눈에 콩깍지가 몇 겹으로 꼈는지 모르겠군. 그리고 나도 별로 반갑지 않은 말이고, 포터.”
“예쁜데 어떡해요. 참나, 저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고요. 더 과거로 돌아가서 학생이었던 저랑 교수님이었던 세베루스한테 미래에 우린 한 침대에 알몸으로 누울 거야, 이러면 아바다케다브라 맞는다고요.”
“미친놈으로 보고 널 성 뭉고 병원에 입원시키겠지.”
“하하. 우리 진짜 남들 보기에 미쳐 보이겠어요. 진짜 좀 두렵다….”
1년 후가 되는 1999년 5월 2일이 되기까지 정확히는 5일밖에 남지 않았다. 누구도 알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둘은 함께 살았고, 서로를 알았고, 사랑을 했다. 그만큼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을 생각하면, 마음 한 편엔 두려움이 생겼다. 특히나 지니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 해리는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다. 지니에게는 1년이 아니라 단 하루 만에 해리의 감정이 식어 이별을 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니와 그런 식으로 헤어지면, 위즐리 가족들과도 관계가 나빠질지 몰랐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각오해야할 이유는 충분했다. 세베루스 스네이프와 죽을 때까지 함께 살고 싶었다. 그거면 되었다.
“아이 있잖아요.”
“뭐야, 아직도 그 얘기 안 끝났나?”
“칫, 저 정말로 아이 키우고 싶다고요. 임신 안 될 거 뻔히 알면서도 꺼낸 말인데. 그래서, 입양은 어때요? 진짜 우리 사이에서 나온 아이는 아니지만. 세베루스 생각을 듣고 싶어서.”
“입양? 글쎄…. 솔직히 말해 난 좋은 부모가 돼줄 수 없을 것 같은데.”
스네이프는 숨기지 않고 속에 있던 생각을 말했다. 해리가 옆에서 뚫어져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저 녹색 눈은 불보다도 더 뜨거운 열기를 뿜는 것 같았다. 스네이프는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돌렸다. 해리와 스네이프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세베루스는 솔직히 말해 좋은 연인도 아니거든요.”
“너 지금 시비 거는 거냐?”
“아뇨. 하지만 그래도 전 세베루스가 좋아죽겠어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사무치게, 미치도록, 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부모도 될 수 있어요. 세베루스는.”
“무슨 그런 이상한 논리가 다 있나….”
“완벽한 아빠나 완벽한 엄마는 어디에도 없다고요. 물론 제 엄마는 그랬을 수도 있지만요?”
“그래. 릴리는 그랬겠지.”
해리가 눈을 감았다. 나지막한 목소리의 중얼거림이 스네이프의 귀로 들어왔다.
“그냥… 전 알겠는데… 세베루스는 절대 나쁜 부모는 아닐 거라고….”
스네이프가 눈을 감은 해리의 얼굴을 조용하게 바라보았다. 해리가 입 꼬리를 올려 웃더니,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는 스네이프도 웃음이 조금 터졌다.
“어렸을 때, 말포이한테 하던 거 보면 애도 잘 다루던걸요. 말포이가 스네이프 교수님을 얼마나 따랐는데.”
해리가 다시 눈을 떠서 스네이프를 돌아보았다. 웃음기가 어린 흰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워보였다. 해리는 얼른 한 팔을 어깨에 둘러 그를 당겨 안았다. 스네이프의 몸에선 이제 마른 책의 냄새만이 나지 않았다. 그에게선 해리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같은 샤워용품을 쓰고, 한 침대를 써야만 비슷해지는 그런 냄새였다. 작년 여름에 스네이프는 자신이 결국 떠나갈 거라고 생각했다는데, 그로부터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될 때까지 해리의 이 마음은 전혀 식지가 않았다. 오히려 더 사랑하게 된 게 아닐까, 때때로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해리에게 처음으로 생긴 진정한 가족이었던 시리우스, 그에게 느꼈던 애정과 비슷한 감정을 스네이프에게 느낄 때가 있었다. 이제 해리에게 스네이프는 ‘가족’이었던 것이다.
스네이프가 저에게 감사를 느낀다는 것을 해리는 알았다. 이런 겪어본 적 없는 애정을 이제는 고마워하고 있다고, 스네이프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스네이프는 죽을 운명이었지만 해리는 그에게 생명을 주었고, 평안을 주었고, 사랑을 주었다. 어쩌면 해리는 스네이프에게 구원을 준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해리는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구원은 서로에게 모두 영향을 미쳤다.
“지금, 과거의 저는 다가오는 교수님의 추도식에 마음이 무거울 거예요.”
“…그렇겠군.”
“말해주고 싶다. 5일 후면 세베루스를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그리고 지금 나는 이렇게 행복하다고요….”
스네이프를 안은 채로 말하던 해리가, 그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스네이프도 해리에게 안겨서 과거의 자신에게 현재의 일을 말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누구 말마따나 아바다케다브라를 맞을 발언이겠군. 정말로 자신이 해리 포터를 사랑하게 될 줄은, 자신과 해리 포터가 제일 믿지 못할 일이었다. 그것이 우습고, 즐거워서 스네이프는 지금 안고 있는 해리의 허리를 좀 더 붙여 안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해리? 일을 그만둔다니.”
“원래 계약도 다 됐고, 이사를 가서요. 레이첼, 이런, 눈물은 흘리지 마세요….”
“오, 찰스가 해리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나도 그렇고요, 물론. 아쉬워서 어떡하지….”
“저, 그래서… 제가 사는 집으로 레이첼의 가족들을 초대하고 싶어요. 와주실래요?”
“물론, 물론이죠! 오늘 저녁에 가면 될까요? 세상에, 해리의 집에 초대받다니! 떠나는 건 너무 슬프지만 이건 정말 기쁘네요, 해리.”
해리는 울면서 웃는 레이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언제라도 다시 놀러올게요, 말하는 해리는 진심이었다. 레이첼, 찰스와 동생인 웨이드의 생일마다 찾아올게요. 마법사들의 이동은 머글보다 빠르니까요.
해리는 그리고 출근 마지막 날의 근무를 즐겁고, 아쉬운 마음으로 보냈다. 아이들은 해리가 떠난다는 것을 알고 한바탕 울음을 쏟았다. 해리도 사랑스런 아이들과의 이별에 눈물이 났다. 하지만 해리는 이게 진짜 이별이 아닐 거라고, 마지막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미래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어서 오세요, 레이첼, 아담 씨. 찰스, 웨이드도 어서와.”
해리는 문 앞에 마중 나와 있었다. 레이첼의 가족은 어두컴컴한 스피너즈 엔드의 분위기에도 웃고 있었다. 해리도 그들을 향해 웃었다. 그들의 저녁식사에 처음 초대받은 후, 종종 해리는 함께 그들과 식사를 했었다. 그러나 스네이프도 살고 있는 집으로는, 그들 가족을 해리가 초대할 수가 없어 항상 마음이 쓰였다. 이 집은 스네이프가 태어났을 때부터 살았던 집이었다. 릴리 에반스조차 들이지 못했던, 그의 감추고 싶었던 민낯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집으로 손님을 초대할 수 있었다는 것, 그 자체로 해리는 스네이프가 정말로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해리는 이 초대를 허락해준 스네이프에게도 고마웠고, 기뻤다.
“이쪽은 세베루스 스네이프예요.”
“…반갑소.”
그렇다고 스네이프가 그들을 열렬히 환영해줄 리는 없었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세베루스 스네이프이니까’ 말이었다. 스네이프는 딱딱한 말투로 인사하고 손을 내밀었다. 레이첼은 무뚝뚝한 스네이프에게 다소 놀란 듯 했지만, 내밀어진 하얀 손에 악수하며 웃었다. 해리 말대로 성격이 좀, 그렇구나? 그녀는 눈짓으로 해리와 대화했다. 해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찰스를 안아들어 식탁으로 갔다. 아빠에게 안긴 웨이드가 마지막으로 집으로 들어왔다.
“집이 아늑하네요.”
레이첼이 말했다. 해리는 그 말이 빈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집의 분위기는 1년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낡은 소파와 테이블도 새 것으로 바꿨고, 커튼도 밝게 바꿨다. 그러나 제일 달라진 것은, 비어있던 집을 채운 사람의 온기였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충분히 이럴 수 있었던 집이 그 오랜 시간 방치되었었던 게 안타까웠다. 또, 이제 해리가 스네이프와 함께 이 곳을 떠나 제 집으로 돌아가면 집이 빌 테지만, 그 때는 전만큼 쓸쓸하고 어둡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첼의 가족들과 해리와 스네이프는 부엌으로 들어섰다. 미리 마법으로 길쭉하게 만들어놓은 식탁엔 하얀 식탁보와 촛대가 놓여있었다. 긴 식탁에, 해리와 스네이프가 준비한 음식들을 놓고, 레이첼이 사온 와인과 빵, 치즈를 놓았다. 레이첼부부가 아이들을 의자에 앉히는 사이, 해리가 스네이프의 귀 뒤로 다가가 속삭였다.
“괜찮아요?”
“뭐, 그래. 저 여자는 몰리 위즐리와 비슷한 인상이군.”
“아, 저도 그 생각 했는데. 정말 좋으신 분들이에요.”
“…그렇게 보인다. 식사 하지.”
먼저 레이첼 가족들이 자리에 다 앉았을 때, 부부의 앞에 해리와 스네이프가 앉았다. 레이첼은 아까부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리의 반려라기에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 했는데, 스네이프가 전혀 예상 외의 인물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럴 만도 하죠, 저 조차도 예상 못했는데. 해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레이첼이 사온 빵을 집어 들었다.
“스네이프 씨? 라고 부르면 될까요…. 둘은 어떻게 만난 사이예요?”
“아…… 학교에서 만났소.”
스네이프는 갑작스레 자신이 대화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옆에서 해리가 웃으며 제가 학생이고, 세베루스가 교수님이었어요, 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해리는 식탁 밑으로 스네이프의 손을 잡아주었다. 스네이프는 손의 감촉에 힐끗, 해리를 돌아보았다. 아까보다 좀 더 마음이 편안해졌다.
“교수셨구나! 어쩐지, 집에 책도 많고… 해리가 그 책들을 다 읽을 것 같진 않았거든요.”
레이첼이 윙크를 하며 해리를 보았다. 해리는 저도 가끔은 읽어요, 운동에 관련된 것은.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어떤 걸 가르쳤나요?”
“아, 그건…. 약물을 만드는….”
“네? 약물?”
“아, 그게! 화…화학 교수님이셨어요. 그래서 약물 실험을….”
“…그렇소. 난 화학을 가르쳤지.”
스네이프는 화학이 뭔지 몰랐지만, 뻔뻔하게 대답했다. 레이첼과 아담이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는 저보다도 너스레를 잘 떠는 스네이프에게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잘 참아냈다. 스네이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여유롭게 와인 병을 집어 들어 코르크를 땄다.
식탁 위의 촛불에 불이 은은하게 타올랐다. 레이첼부부와 함께 해리와 스네이프가 잔을 들었다. 새삼스럽게도 해리는 이제야 정말 이별이 실감이 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웨이드의 얼굴과, 앞에 놓인 구운 감자를 오물거리는 찰스, 맛있다고 연신 말해주는 레이첼과 아담 씨를 바라보면서, 해리는 1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이구나, 그렇지만 이게 정말로 마지막은 아니었다. 해리는 이 저녁식사를 오래도록 추억할 것을 알았다.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고 싶었다. 이 스피너즈 엔드에서의 기억이 그랬듯이.
─
스네이프 교수님 생일에 맞춰 올리느라고 급하게 썼다..ㅠㅠ;;
너무 축하해요 교수님! 오래오래 해리랑 행복하세요ㅠㅠㅠㅠㅠ
완결이 다가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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