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숲은 예전과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붉은 노을이 서서히 저물 때까지, 둘은 텐트 주변에 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해리는 나뭇가지로 대를 만들어 낚시를 했고, 스네이프는 집을 복사한 텐트에서 책을 가져와 읽었다. 가끔 다람쥐가 나타나서 주변을 뱅뱅 돌았고, 여우가 나타나 못에 목을 축이고 가기도 했다.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해리와 스네이프는 서로 간에 말이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듣게 되면 좀 더 특별한 하루를 보내야한다는 의무감이 들 법도 했다. 하지만 해리는 낚싯줄을 내린 연못을 조용히 내려다보면서, 우리다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법 굵직한 송어 두 마리가 담긴 양동이를 뿌듯하게 내려다본 해리가, 이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조금씩 별이 박혀있는 게 보일 정도였다. 스네이프가 불 위에 오늘 산 고기와 냉장고에 있던 야채도 올려 굽는 게 보였다. 해리도 얼른 생선을 손질해야겠다 싶어져, 그 옆으로 주저앉았다. 해리가 열심히 비늘을 벗기고 있는 사이, 다 구워진 고기를 스네이프가 해리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주었다. 해리가 냉큼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사실 스네이프가 누구에게 무엇을 먹여주려고 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둘 다 이것에 대해 어떤 이질감도 느끼지 못했다. 해리가 고기를 삼키고 다시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을 때, 스네이프는 군말 없이 또 해리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었다. 해리가 눈가에 주름이 질 정도로 웃었다.


“진짜 맛있네요.”

“네가 잡은 고기도 빨리 올리지, 포터.”

“앗, 잠시 만요.”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한 후, 깨끗이 손질을 끝낸 해리가 판에 송어를 올렸다. 그 위로 소금을 뿌리며 스네이프가 입을 열었다.


“이런 것도 캠핑 다니며 익힌 기술인가?”

“사실, 생선손질은 페투니아 이모가 시키신 적도 있어요.”

“아하. 그 여자는 어릴 때부터 고약했지.”

“교수님은 아니신 것처럼 얘기하시네요.”

“빈정대는 건가? 포터.”

“그럴 리가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 해리가 이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스네이프의 면전에서 고약한 성격 운운하는 날이 올 줄이야. 스네이프는 해리의 말을 듣고서도, 딱히 기분 나빠지진 않았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자신이 살면서 제일 고약하게 대한 상대가 바로 눈앞의 해리였기 때문이었다. 엄청 싫어했었지, 하는, 이제는 과거형이 돼버린 감정이 떠올랐다.


하늘이 어느새 밤에 가까웠다. 준비해온 음식을 다 먹고, 해리가 잡은 송어도 먹고 나자 배가 터질듯이 불렀다. 해리는 느긋하게 불 앞에 스네이프와 마주앉았다. 케이크는 없었지만 충분히 생일만찬 같은 저녁이었다. 물론, 지금쯤 과거의 해리는 버로우에서 위즐리 가족들과 헤르미온느와 진짜 생일만찬을 즐기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해리는 어떤 게 더 좋다고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둘 다 너무나 행복하고,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다만 과거의 해리에게는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크게 달랐지만 말이었다.


“이 숲 말이에요. 저는 헤르미온느랑 왔었다가, 헤어진 론도 다시 만나게 된 숲이거든요. 물론 전 몰랐지만, 교수님이 도와주신 거였죠.”

“덤블도어가 시켰으니까. 임무였다.”

“다시 생각해도 신기해요. 보호마법 때문에 안 보여서 교수님은 제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모르셨을 텐데, 그래도 패트로누스가 절 빨리 찾아낸 것 같거든요.”

“패트로누스에게는 사람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으니까. 나는 나무 뒤에서, 내 패트로누스가 한 곳으로 곧장 향하고는 뒤를 돌아가는 걸 지켜보았지. 뒤이어 네가 나타났고.”

“그걸 처음 봤을 때, 전 왠지 모르지만 그게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고, 오직 저만을 위해서 찾아온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함정이 아닐까, 순간 망설이기도 했는데, 결국 따라나서게 된 이유는, 뭐랄까… 본능적인 거였어요. 전혀 어둠의 마법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당연히 어둠의 마법일 리가 없지. ……릴리의 암사슴인데.”


주변에 어슴푸레하게 어둠이 깔려 확신할 순 없었지만, 스네이프의 눈가가 조금 젖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해리는 모른 척 나뭇가지로 불 속을 뒤적였다. 따닥따닥, 불꽃이 튀어 오르는 소리는 조용한 숲속에서 듣기에 좋았다. 해리는 멀거니, 눈앞에서 암사슴이 사라졌던 지점을 바라보았다. 암사슴이 멈춰 섰을 때, 해리는 그것이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기꺼이 허락해주고, 자신이 알아야할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은백색의 영롱한 빛을 뿜던 암사슴은, 곧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마지막까지도 아름다웠던 암사슴을 보고, 해리는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그 암사슴은 해리에게는 ‘엄마’의 의미는 아니었다. 스네이프의 기억을 보고난 후부터 쭉, 그렇게 생각했다. 가끔씩 해리는 오러 임무 중에 자신의 패트로누스가 필요할 때가 있었다. 아빠의 패트로누스가 수사슴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것 역시 수사슴이 된 것일지 몰라도, 어쨌든 지금은 그것이 해리의 패트로누스였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스네이프의 패트로누스도 엄마가 이유였더라도 스네이프의 반영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자신의 수사슴 패트로누스를 볼 때, 해리는 기억 속의 암사슴 패트로누스를 떠올리곤 했다.


“너무 아름다웠거든요.”

“…….”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못했어요.”


해리가 지팡이를 들었다. 가장 행복한 기억,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해주던 스네이프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가슴 안에 행복감이 충만해졌다. 해리는 이 기억 하나만으로, 죽을 때까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패트로누스를 불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익스펙토 페트로눔─!”


지팡이 끝에서 흘러나온 은백색의 연기는 순식간에 형태를 갖추고 해리와 스네이프의 앞에 섰다. 푸르르, 소리를 낼 것처럼 고개를 흔든 덩치 큰 수사슴이 부드럽게 발을 굴렀다. 어두운 주변을 푸르고 신비로운 빛이 환하게 밝혔다. 패트로누스는 달빛을 모아 만들어진 형상처럼 기묘했고, 몹시도 아름다웠다. 해리가 수사슴에게 다가가 머리에 이마를 기대고 인사를 나누듯 했다. 스네이프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신성한 의식 같기도, 친구 간에 나누는 친근한 인사 같기도 했다. 수사슴의 반짝거리는 눈이 스네이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리가 스네이프를 돌아보았다. 스네이프는 수사슴을 보던 눈을 돌려 해리와 시선을 마주했다. 해리가 웃어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네이프가 지팡이를 들었다. 해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익스펙토 페트로눔!”


까만 스네이프의 지팡이 끝에서 눈부시도록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해리의 수사슴처럼 금방 형태를 갖추고, 수사슴의 옆으로 스르륵 다가섰다.


“…포터, 네가 바란 선물이 이건가?”

“네, 맞아요.”


수사슴의 곁을 떠난 해리가 스네이프의 옆으로 돌아왔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옆에서 자신과 해리의 패트로누스가 나란히 서있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스네이프는 왠지 목구멍 안에서 뜨거운 게 울컥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볼 때, 사람이 생리적으로 느끼는 현상이었을까. 여운과, 감동을 느끼는 것…. 사실, 스네이프는 태어나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달빛으로 빚어진 것 같은, 은백색의 수사슴과 암사슴 한 쌍이 서로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어째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반 년 전 겨울, 해리 포터를 찾아 홀로 숲 속을 거닐던 암사슴의 곁에 이젠 수사슴이 함께 있었다. 스네이프도 알 수 있었다. 이 모습이 꼭, 자신과 해리처럼 느껴지기도 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거라고 스네이프는 생각했다. 이제 암사슴이 내딛는 땅은 얼음으로 꽁꽁 언 땅이 아니었다. 혼자도 아니었다. 부드럽게 녹은 흙 위에 여덟 개의 발굽이 놓여있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굉장하네요….”

“포터, 네가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해냈지?”

“어, 제 패트로누스를 볼 때마다, 세베루스… 당신의 것을 떠올렸거든요.”

“…내 것을?”

“네. 이렇게 아름다운 패트로누스를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해리가 암사슴 패트로누스에게 다가갔다. 예전과 달리, 암사슴은 해리가 가까이 다가오도록 기다려주었고, 쓰다듬는 것도 허락해주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해리의 속삭임에 암사슴이 귀를 쫑긋거리는 것 같았다.


“같은 동물의 암수 한 쌍 패트로누스는 처음 봐요. 생전처음 마법을 봤을 때처럼 놀랍고 환상적이네요…. 아, 생전처음 봤던 마법이 이렇게 환상적이진 않았는데…… 뭐, 어쨌든.”

“뭐였지?”

“해그리드가 두들리의 엉덩이에 돼지꼬리를 달아줬죠. 솔직히, 끝내주긴 했어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해리가 기분 좋게 싱긋 웃어보였다. 스네이프는 웃진 않았지만, 어떤 느낌이었을지는 이해했다. 스네이프도 한 쌍의 패트로누스들 앞으로 다가갔다. 해리의 수사슴 패트로누스가 계속 스네이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네이프가 다가가자, 수사슴이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수사슴을 내려다보던 스네이프는, 조심스럽게 수사슴의 머리에 제 얼굴을 가까이 했다. 수사슴이 눈을 감고는 스네이프와 이마를 마주했다. 스네이프의 가슴 안쪽에서 울렁이며 무언가가 퍼져나갔다. 해리의 행복한 기억으로 만들어진 그것이, 스네이프의 심장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포터.”

“네, 세베루스.”

“이걸 만들 때 무슨 생각을 했지?”

“어… 세베루스가 절 사랑한다고 했던 목소리요?”


해리는 조금 쑥스러워, 딴청을 부리면서 대답했다. 그러다가 아, 하며 스네이프를 본 해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베루스는요? 패트로누스를 부를 때 무슨 생각 하셨어요?”

“…딱히 별 생각은 없었다만.”

“뭐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제 생각했다고 대답해주기 싫으신 거죠?!”

“아니, 정말로 별 생각 없었다. 그냥 나왔어, 네 패트로누스를 보고나니.”


말 그대로였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수사슴 패트로누스를 보고서 암사슴 패트로누스를 바로 불러낼 수 있었다. 어떤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려는 노력이 전혀 필요 없었다.


“분한가? 포터.”


해리는 어리고 솔직했다. 제 대답이 불만족스러운 듯, 불퉁함이 드러난 해리의 얼굴을 보며 스네이프는 조금, 비웃고 싶어졌다.


“네가 나한테 말해주고 싶은 게 이거 아니었나?”

“……네? 제가 뭘요?”


금세 어리둥절해진 얼굴로, 해리가 스네이프를 바라보았다.


“내 패트로누스가 내 모습을 투영한 거라고 말이다. 나는 여태, 이 암사슴을 릴리의 파편으로만 봤는데, 너의 패트로누스를 보니… 패트로누스가 확실히 자신의 반영처럼 보이더군. 그러니까 네 패트로누스를 보고, 내가 다른 기억 없이 패트로누스를 만들 수 있었다면… 결국 난 너를 보고 패트로누스를 만들었다는 소리잖나, 포터?”

“……!!!”


해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불타올랐다. 정말이지 로맨틱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어버리는 것도 재주였다. 전혀 달콤하지 않은, 단조롭고, 학생을 가르치는 듯한 무미건조한 톤이긴 했어도, 어쨌든 해리는 스네이프의 말뜻을 철석같이 알아들었다. 이런 때만 이긴 하지만 해리도 스네이프 교수의 수제자 자리를 차지할 때도 있었다.


“저 심장 엄청 빨리 뛰어요…….”


피식, 입 꼬리를 비뚜름히 올리며 스네이프가 웃었다. 어리고, 솔직하고, 가끔 귀여운 연인에게 키스 정도야. 붉어진 얼굴에 양 눈을 꽉 감은 해리의 입술을 찾아, 스네이프가 천천히 고개의 각도를 기울였다.


수사슴과 암사슴 패트로누스들은 못 위를 동그랗게 빙빙 돌다가, 높게 솟은 나무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스네이프는 평소와는 다른 냄새를 맡으며 눈을 떴다. 옆을 돌아보자 해리가 아직 잠에 들어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해리는 훨씬 더 어려 보였다. 스네이프는 이 다른 냄새가, 해리의 이불과 베개에 베인 해리의 체향인 걸 알았다. 어젯밤, 결국은 엉큼한 짓을 해버렸는데, 제 방으로 돌아가 자려는 스네이프를 해리의 손이 붙잡았다. 생일이잖아요, 라는 앙탈을 또 부리면서 저를 올려다보는, 안경을 쓰지 않은 순한 얼굴에 스네이프는 그냥 그대로 다시 해리의 옆에 누워버렸다. 사실 생일이라는 핑계를 대지 않고서도, 사귀는 사이에 한 침대를 쓰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스네이프는 제 방에서 혼자 자는 게 편하다는 이유로, 그동안은 해리와 함께 잔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고 일어나자마자 해리의 자는 얼굴이 보이는 기분은 아주 색달랐다. 온통 해리의 냄새가 베인 공간에, 해리의 얼굴을 보면서 눈을 뜨는 아침. 머리를 괸 채로 해리를 내려다보며 스네이프는 이래서 사람이 결혼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해리는 이런 계속되는 스네이프의 시선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피곤한가? 피곤한 건 내가 더 할 텐데, 생각하면서도 스네이프는 다시 잘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공기 좋은 숲에서 잤기 때문인지 금방 머리가 맑아졌다. 해리는 더 자게 내버려두기로 하고, 스네이프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너저분하게 바닥에 흩어져있던 옷가지들이 스네이프의 품으로 날아왔다. 셔츠와 바지를 꿰어 입고서 스네이프가 일어섰다.


이 방은 자신이 어렸을 때 지내던 방이었다. 이제는 키가 커서 눈높이가 완전히 달라져, 둘러보는 방의 곳곳마다 낯선 느낌이었다. 옷장, 침대, 서랍이 전부인 방.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지만 주인이 바뀐 방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 달라 보일까. 어릴 때는 아주 어둡고 음침해서, 스네이프는 이 방의 침대에 누워 끔찍한 괴물이 나오는 악몽을 자주 꿨었다. 꿈속에선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 다리가 트롤에게 붙잡힌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간밤에 스네이프는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잤다.


해리가 요즘 청소를 하지 않았는지 낡은 서랍에 먼지가 내려앉은 게 보였다. 스네이프는 지팡이 끝을 대고 서랍 위의 먼지를 빨아들였다. 이걸 보면 서랍 안도 정리되어 있지 않을 게 뻔했다. 스네이프가 휙,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든 건 별로 없었지만 굴러다니는 것들을 스네이프는 손으로 정리해주었다. 대부분은 해리가 평소 쓰는 안경닦이와 손톱깎이 같은 평범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건……. 스네이프는 물건들을 옮기던 손을 멈추고 봉긋한 붉은 케이스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런 건 항상 느닷없는 순간에 마주치곤 했다. 아무런 경계심도 갖추지 못했을 때, 뇌 속으로 파고드는 불안감. 스네이프는 이런 건 진저리가 쳐졌다.


스네이프가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뒤척였는지, 해리가 자신이 덮었던 부분의 이불을 끌어안고 잠들어있었다. 아무런 걱정이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얼굴이었다. 스네이프는 뒷목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케이스를 열어보았다. 예상했듯이 반지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반지에는, 이 반지의 주인이 될 대상의 머리카락을 연상시키는 붉은 루비가 조그맣게 박혀있었다.


“젠장….”


왜 하필 이걸 오늘 발견해야했을까? 좀 더 늦게 알 수도, 아니면 아예 모르고 끝날 수도 있었을 텐데. 가장 행복한 순간에 절벽꼭대기에서 강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쳐진 기분이었다. 스네이프는 건조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런 기분은 아주 익숙하지, 물론…. 스네이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밑바닥이 어울렸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고, 자신도 부정하지 않았다. 제 공간에 빛이 스며든다고 해서, 어둠이 완벽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어두운 공간일수록 빛은 더 환하게 보였고,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릴리를 보았을 때 확실히 알았다.


해리와의 미래에 대해, 자신이 기대하지 않고 있던 건 사실이었다. 지니 위즐리를 다시 만나게 되면, 해리가 제 곁을 떠날 거라고 이미 예상했다. 그녀가 원래 해리 포터의 진짜 사랑하는 연인이었고, 그 둘이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조지 위즐리가 말했으니까. 하지만 머리로 어물어물 연상하는 것과 물질로 드러난 것은 달랐다. 스네이프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제 몸속을 불이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분노?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화마에 집어삼켜지는 것 같은 홧홧한 열기는, 분명히 흉측하게 문드러진 감정이었다.


“세베루스…?”


뜨겁고 괴로웠다. 잠에서 깨어나, 자신을 부르는 해리의 목소리에 어떤 해악도 느껴지지 않아서 스네이프는 더욱 화가 났다. 해리는 대답 없는 스네이프가 의아스러웠다. 스네이프가 뭘 들고 있는 것은 보이는데, 시력이 나빠 잘 보이지 않았다. 해리는 눈을 비비며 보다가 안경을 썼다. 해리의 눈이 점점 커졌다. 스네이프는 그런 해리를 바라보았다. 해리의 그 모습을 보자, 몸은 뜨겁게 열이 오르는데 머릿속은 이상할정도로 점점 차분해졌다.


“그건…! 아, 제기랄! 세베루스, 제가 설명할게요….”


그냥 일어서려다가, 알몸인 것을 깨닫고 허겁지겁 바지를 꿰어 입는 해리의 모습이 그렇게 냉정하고 한심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스네이프는 손에 든 반지케이스에서 반지를 빼내 눈앞으로 들어보였다. 루비에 햇살이 비쳐, 투명한 와인 같이 색이 예뻤다.


“예쁘군.”


스네이프가 담백하게 감상을 뱉었다. 그 목소리에 해리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쭉 흘렀다. 정말로 스네이프가 많이 화가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스네이프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자신은 도무지 몰랐다. 과거에 해리는 이런 순간마다 곤란함을 느끼며 도망치기만 했었다. 피할 수 없는 순간에는, 스네이프와 결국 부딪쳐야만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해리의 머릿속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피가 말라붙었다. 항상 스네이프를 화나게 하는 순간마다, 자신이 명백하게 잘못한 걸 알았기에 더 할 말이 없었다.


잠들기 전까진 정말로 행복의 극치라고 생각했는데. 해리의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렇게 된 건 분명 자신의 책임이었다.


“세베루스, 그러니까… 제 잘못이에요. 제가 처분을 하지 않고 둬서… 하아, 진작 했어야하는데….”

“…처분? 잘못?”

“세베루스…?”

“글쎄…. 포터, 넌 지니 위즐리와 결혼할 거잖나. 그러려면 이 반지가 필요할 텐데?”

“세베루스?!”


해리가 당황해서 스네이프를 바라보았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바로 어제까지 절 사랑한다고 말해주던 스네이프가 맞나?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지금 서로가 사랑하는 사이란 걸 스네이프도 알고 있을 텐데. 그런데 스네이프가 이런 말을 하는 게 해리는 믿기지가 않았다.


“제가 세베루스를 사랑한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 반지를 그대로 둔 건 순전히 실수예요! 제 잘못이라고요! 전 지니와 결혼하지 않아요!”


해리의 언성이 커졌다. 자신의 잘못임을 알면서도, 급속도로 분노를 느끼고 마는 건 원래 해리의 성미였다. 스네이프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해리를 쳐다보았다. 학생시절, 저를 벌레만도 못한 놈 취급을 할 때의 그 눈과 닮아보였다. 해리가 더욱 화가 나서 스네이프에게로 다가가 반지를 뺏으려 손을 뻗었다. 스네이프가 주먹을 쥐어 반지를 감췄다.


“아니, 난 알고 있었다. 지니 위즐리와 다시 만나면 넌 그녀에게로 돌아가겠지. 뻔한 거 아닌가? 넌 지금 나와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거지.”

“세베루스!!”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이 좁은 공간에선 네 숨소리 하나까지 똑똑히 들린다, 포터. 난 지금 냉정하게 말하고 있는 거야.”

“아니요, 하나도 냉정하지 못하세요!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생각하신다면……”

“알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감정이 다 무슨 소용이지? 포터, 넌 네가 지니 위즐리와 다시 만나도 어떤 감정의 흔들림도 없을 거라고 맹세할 수 있나? 그녀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면서도? 그녀가 네 이름을 부를 때, 아무렇지도 않게 날 선택할 수 있나?”

“…….”

“이 반지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둔 게 네 본심이다. 포터.”


해리의 녹색 눈이 떨리고 있었다. 스네이프는 한바탕 말을 쏟아내고, 제 감정에 북받쳐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밖으로 쏟아내도 개운해지기는커녕, 더욱 답답해지기만 했다. 말들이 진짜 현실로 바뀌는 것 같아 괴로웠다. 바로 지금 해리 포터가 나를 떠나가면 어쩌지? 어리석게도 그런 걱정이 불쑥 들어서, 스네이프는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왜 또 이런 사랑을 시작해버린 걸까. 스네이프는 해리가 원망스럽고 모든 게 후회되었다. 언제나 자신이 뒤로 밀리는 사랑 같은 걸, 두 번씩이나 해버리고. 항상, 자신은 항상 이렇다.


“……그동안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거예요?”

“…….”

“제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진심을 보면서도… 결국엔 제가 당신을 떠나갈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해리가 자신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건 슬퍼서라기보다, 화가 나서 나오는 눈물이라고 스네이프는 생각했다.


“당신의 말은 이해돼요. 왜 그런 줄 알아요? 만약 내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다면, 당신이라면 날 버리고 엄마를 택할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한 거예요.”

“뭐라고?”


스네이프의 머릿속에 이성으로 둘러놓은 막이, 와장창 깨져 무너지는 것 같았다. 수천 개의 유리 파편이 몸속을 고통스럽게 찔러왔다. 불쑥 튀어나간 자신의 목소리는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해리의 말을 듣고 나자, 사고회로가 뚝하고 정지하는 것 같았다. 단연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듣는 순간 엄청난 충격이었다. 하지만 해리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왜 화를 내며 그런 말을 제게 쏟아냈는지 그 이유를 모를 수가 없어서, 스네이프는 말문이 막혔다. 항변해야하는데, 스스로도 입이 말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릴리가 살아 돌아오면’ 이라고……? 릴리는 죽었다. 절대로 돌아올 일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네이프로선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정말로 돌아올 일이 없어서였을 뿐, 만약 진짜 돌아온다는 가정 하에, 자신이 반드시 해리 포터를 택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스네이프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얼른 대답해야 오해를 풀 수 있는데, 이게 과연 오해라고 할 수 있는지 스스로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해리가 한 생각이 옳았던 것이었다.


스네이프의 손 안에 쥐인, 루비가 박힌 반지가 살을 파고들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닮은 보석이 스네이프의 속살에 박혀들었다.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해두겠는데, 난, 포터. 네가 말한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난… 네가 지니 위즐리에게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네 말을 듣고 나니 바로 확답을 내놓을 수도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시겠죠. 그 분을 사랑한 건 수 십년이고, 전 고작 몇 개월 함께 살았고 사랑한단 말도 어제에야 겨우 들은걸요.”


해리는 대놓고 빈정거렸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이런 말투가 익숙했지만, 사실 최근 몇 개월은 들어본 적이 없는 말투였다. 그래서 우습게도, 그것에 마음이 아팠다. 해리의 분노는 슬픔과 섞여있었다. 어떻게 해도 제 어머니의 벽이 너무 높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네이프가 요즈음 자신에게서 어머니의 그림자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 해리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어머니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게 당연하다는 소리였다.


해리는 침대에 도로 걸터앉아, 잠시간 화를 식혔다. 더 이상 흥분했다간 스네이프에게 무슨 소리를 하고, 어떤 행동을 저지를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였다. 한동안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해리는 다시 이성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쨌든 지니에게 프러포즈하려고 준비했던 반지를 그대로 뒀던 것이 일의 발단이었다. 자신의 잘못이다, 해리는 다시 한 번 더 그 사실을 머리에 되새겼다. 해리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왜 싸워야하죠? 세베루스. 말했다시피, 전 지니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확신해요. 그리고… 어머니 얘기를 한 건 죄송해요. 발끈하니까 튀어나오더라고요. 정확히는 이게, 제 ‘본심’이겠죠. 전 어머니 다음이니까요, 당신에게는. 그 사실이 전 항상 마음 한편에서는 걸렸던 거예요.”

“…포터.”

“아, 제기랄! 이렇게 확 끓어오르는 거, 저도 자제가 잘 안돼서…… 항상 후회하는데.”


학생 때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불이 붙을 만한 발화점이 없어서였을 뿐이었다. 해리는 스스로도 괴로운 듯, 양손에 얼굴을 묻고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제 손으로 칼을 거꾸로 쥔 꼴이었다. 스스로를 아프게 할 말을 속에서 끄집어 올린 것이다.


스네이프는 꽉 쥐었던 주먹을 폈다. 벌겋게 자국이 남은 제 손바닥 위에, 자그마한 반지가 보였다. 고작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때문에 서로의 가장 여린 속살이 찢겨나갔다. 아니, 정말은 해리를 믿어주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가 현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으면서도, 불확실한 미래에 확신이라는 가정을 세워버린 탓이 제일 컸다. 스네이프는 보이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었다. 한 번도 이렇게 커다란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스네이프는 해리의 사랑이 곧 터져버리고 말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풍선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자신이, 자신을 감싸주고 있는 그 풍선 속에서 가시를 세우고 웅크려있던 고슴도치였던 줄은 모르고 말이었다.


“리덕토.”


반지가 산산조각이 났다. 방 여기저기로 파편이 튀었다. 해리는 폭발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자국이 엉겨 붙은 붉어진 얼굴이, 상처받은 소년처럼 가여워보였다.


“미안하군, 포터. 난 제대로 사랑받아본 적이 없어서… 사랑을 주는 법도 잘 몰랐다. 널 믿어주지 못한 건, 네가 날 너무 사랑해주는 게…… 이 나에겐 아주 이상한 일이어서, 그랬다. 네 마음을 깊게 느낄수록 오히려 금방 끝날 거란 불안함이 더 커졌지…. 쉽게 뜨거워진 불꽃이 가장 빠르게 식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제가, 제가 세베루스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서 더 불안해하셨다고요…?”


해리의 두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더 많이 사랑해주면 그저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네이프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신을 더 믿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해리는 이 사람이 얼마나 가여운 사람이었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주는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스네이프의 그릇으로는 너무 벅찼던 것이었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것이어서. 자신에겐 이 모든 게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너무나 과분하다고 생각해서…….


당연히 끝날 줄 알았다니. 어떻게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있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통하고, 이대로 영원히 행복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건 해리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인걸까? 해리는 온통 혼란이었다. 스네이프가 얼마나 속이 비어있는 사람인지 알게 되어버렸다. 그 안을 채워주고 싶은 욕심과, 그게 과연 채워질까에 대한 의심이 서로 충돌했다.


“어제는 그렇게 행복했는데…….”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 다르다니. 해리는 머릿속이 어지러워 구역감마저 들었다.


“우리, 서로 사랑하죠…?”


해리의 눈 한쪽에서 다시 눈물이 한줄기 흘러 떨어졌다. 스네이프는 묵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서로 아프고, 힘들어요…?”


어째서? 사랑은 서로에 대한 감정만으론 끝이 아닌가? 스네이프를 구원해주기 위해선 자신이 더 어떻게 해주어야 할까. 해리는 스네이프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위해 기꺼이 노력하겠다는 각오를 새길 수 있었다. 그 마음에 대한 확신이 서자, 해리의 눈에서도 눈물이 그쳤다.


스네이프는 해리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해리를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게 한 데에 대해서, 깊은 죄의식이 들었다. 그는 그저 자신을 사랑해주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유로, 그가 겪지 않았어야할 고통까지 떠안겨주어 미안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제 눈앞에서, 자신의 실수 때문에 아파하는 건 스네이프에겐 익숙한 슬픔이었다. 그것이 또 반복되고 말았다. 스네이프는 이런 순간마다 도피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건 단지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스네이프는 각자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스네이프는 해리에게로 다가가서 그의 얼굴을 품에 안았다. 침대에 앉아있는 해리의 얼굴은 제 배 언저리쯤에 닿았다. 해리의 열 오른 체온이 느껴졌다. 스네이프는 잠시간 그 따듯함을 느꼈다.


“세베루스……?”


해리는 방금까지 양 팔로 안고 있던 스네이프의 몸이 사라진 공백에, 눈을 번쩍 떴다.


스네이프가 사라졌다.









둘이 싸우는 거 쓰는데, 쾌감을 느낌.

그래 해스네는 배틀호모! (잊고 있었다)

글 속 해리는 어제 생일이었고, 오늘은 제 생일입니다 흐흐^.^

어쩌다보니 타이밍이 맞았네.. 난 생일 다음날에도 행복해야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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