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걸……썼다고……?”
회중시계를 판 두 번째 남자가 중얼거렸다. 이제 겨우 이 기막힌 회중시계에 대해 듣게 되겠네. 해리는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았다. 빗줄기가 굵었다. 남자들의 얼굴이 빗물에 흐려졌다.
“이 시계. 정확히 뭐죠?”
“…….”
“제가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타임터너에 대한 부정을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제 기억을 증거자료로 제출할 예정이구요. 저는 이 시계의 출처와 원래 사용목적만 조사하면 당신들을 부서로 넘길 겁니다. 그러니 그저 솔직하게 밝혀주세요.”
“……그 시계를 쓸 수 있었다니, 그 해리포터가…?”
“……네?”
해리의 침착하고 단호했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두 번째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해리는 침을 삼키며 남자가 입을 떼길 기다렸다. 남자는 빗물로 얼룩진 얼굴을 여러 번 찡그렸다.
“……나는 그 시계로 백 년의 시간이 넘도록 워프하고, 또 워프하는 허송세월을 보냈지.”
“백 년이 넘게……? 무슨 목적이었죠?”
“그 시계는 나도 우연한 기회에 얻었소, 난 한 때 죽고 싶었어…. 성격이 예전과 180도 달라지고 어두워졌지. 어둠의 마법에도 관심이 갔을 적에… 저주에 가까운 물건이지 그것은……. 아니, 적어도 나한테는 그랬소….”
해리에게는 스네이프와의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준 기적과 같은 시계였다. 하지만 남자의 괴로워 보이는 얼굴 또한 사실이었다.
“해리 포터, 자네도 부모를 잃어 봤으니 알겠지. 평생 다시 볼 수 없을,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망 말이오. 나는 내 아내를 내 마법의 실수 때문에 죽였지. 그 일이 있고선 내 삶은 완전히 끝장이 난 거요…. 그런데, 난 이 시계를 얻었어. 우연한 기회였지, 정말로 우연한…. 나는 바로 아내를 잃었던 그 날로 돌아갔소. 그리고 백 년이 넘게 그 짓을 여러 번 반복해서 아내를 살렸고, 계속 함께 살았소….”
“그럼…… 행복한 것 아닌가요……? 어째서 저주라고 표현을…….”
“자네도 다녀와 봤으니 알 것 아닌가. 그 과거엔 과거의 나도 함께 존재해…. 나는 몇 번이나 나 자신을 내 손으로 죽였던 것이라오.”
해리는 말을 잃었다. 시계를 사려고 했던 첫 번째 남자도 넋을 잃은 눈치였다. 아마 남자는 이 사실까진 몰랐던 모양이었다.
“이 시계는 그럼….”
“그래. 저주받은 물건이 맞네. 나에게 이 시계를 처음 줬던 사람은 이걸 후회의 시계라고 부르더군…. 아마 그도 나 같은 인생을 살다가 지나가던 나에게 줘버린 걸 거야. 나도 오늘 그러려고 했다가…… 뭐 이렇게 보기 좋게 잡혀버렸군, 하핫….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르지…….”
“이 시계의 이름이 ‘후회의 시계’… 라고요?”
“그래… 해리포터가 인생에서 그렇게 후회할 일이 뭐가 있겠냐 싶었지. 내가 보기엔 이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인생이라.”
해리는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의 몸을 일으켰다. 둘 모두 반항의 의지를 잃고, 체념해서 순순히 해리를 따랐다. 해리는 머리 뒤를 커다란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무지근한 둔통이 멍하니 해리를 따라붙었다.
해리는 오러 부서 바깥의 휴게실에 앉아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이 시계가 후회라는 키워드에만 반응한다면, 스네이프를 데리고 미래로 갈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후회는 겪지 않은 미래의 일에서 기인하지 않으니까. 회중시계는 어쨌든 해리에겐 고마운 물건이었다. 그러나 같은 물건이 누군가의 인생은 비극으로 물들였다는 사실에 해리의 기분은 그 후로도 썩 괜찮아지지 않았다.
남자들을 심문하고 나온 선배 휴가 해리를 찾았다. 해리에게 그렇게 솔직히 진술 했었으니 심문도 금방 끝난 듯 해보였다. 휴가 해리의 어깨를 무겁게 짚었다. 오전에 가벼이 임무를 맡겼던 후배 오러가 1년이나 사람들을 피해 숨어 살아왔다니. 휴는 해리가 못내 신경쓰였다. 같이 따라갈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고, 좋지 않은 해리의 표정에 걱정이 들었다.
“해리. 타임터너 제출 해야 해.”
“…휴. 중대발표가 있어요.”
“세상에 단 하나 남은 타임터너의 발견 말고 더? 이거 원, 이게 이런 큰 건인 줄 몰랐는데. 그래, 해리. 그게 뭐냐?”
휴는 해리의 진중한 표정에 의아해하면서도 별 대수롭지 않게 농담처럼 말을 내놓았다. 타임터너의 보고로 상부가 이미 발칵 뒤집혔기에 해리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고자 하는 마음도 솔직히 있었다.
해리는 회중시계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들여다보고는, 마침내 증거물품 보관 팩에 집어 넣었다. 마법으로 봉인 되어 승인 후에만 열람이 가능했다. 이제 과거와 자신을 연결해주던 물건은 해리의 손을 떠나갔다.
“휴, 올 사람이 있어요. 제가 마법부에 도착하기 전에 부엉이를 보냈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누구지?”
“…당신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
“해리. 1년간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 몰라도 말을 의문스럽게 하는 구나.”
휴게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해리와 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휴는 누가 임시감옥에서 탈출이라도 한 건지 소리치며 물었다. 해리는 이 소란의 원인을 알았다.
“─세베루스 스네이프?!!”
복도에 마법부 직원들이 지팡이를 치켜든 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휴 역시 스네이프를 발견하자 마자 지팡이를 빼 들었다. 해리는 그런 휴의 손목을 빠르게 잡아 아래로 내렸다. 의문 가득하던 휴의 눈빛에서 어느 순간 이해의 빛이 돌았다.
“설마 해리 네가 곧 올 거라 했던 사람이…!”
스네이프는 저로 인해 벌어진 소란에 미간을 구겼다. 박쥐처럼 검은 로브를 펄럭이며 복도를 걷는 당당한 걸음은 주변의 시선을 가볍게 떨쳤다. 스네이프가 입은 것은 예전에 조지에게 사랑의 물약을 납품하러 갔을 때 해리가 사준 로브였다. 해리는 로브가 스네이프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지금 분위기로 봤을 땐 나중을 기약해야 할 것 같았다. 해리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스네이프의 옆에 붙었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었다.
“다들! 지팡이 내리세요! 그는 진짜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맞습니다! 제가 데려왔어요!”
해리 포터가 세베루스 스네이프를 데려왔다는 발언에 파장이 또 한 번 일었다. 설마하니 진짜 스네이프라고?! 살아 있었어! 죽은 게 아니었어,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진짜 스네이프라고? 속임수 아닐까? 늘어나는 귀를 갖다댄 것처럼 주변의 쑥덕임이 귀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스네이프는 힐끗 해리를 내려다 봤다. 1년차의 어린 오러는 마법세계의 구원자면서도, 이 상황에는 약간 식은땀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자신이 아닌 내가 의심 받는 상황이어서겠지, 스네이프는 해리의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나를 심문하시오.”
“세베루스.”
“그러려고 온 거니까. 날 심문 할 책임자를 불러 와라, 포터.”
휴가 앞으로 나섰다.
“세베루스, 해리, 내가 하도록 하지.”
스네이프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팔짱을 끼고 휴를 쳐다보았다. 휴는 스네이프와 3살 차이의 후배로, 같은 시기 학교를 다녔던 그리핀도르였다. 학교 다닐 때 말 한 번 섞지 않은 그리핀도르가 자신의 이름을 선뜻 부른 것에 스네이프는 약간 신경이 거슬렸지만, 해리가 안심하는 표정이 된 것으로 잠자코 서 있었다. 해리가 믿는 자라면 잘 된 거겠지, 라는 생각이었다.
휴가 심문실로 스네이프와 해리를 이끌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뒤꽁무니를 눈으로 쫓으며 여전히 쑥덕거렸다. 마법부 전체에 소문이 퍼지는 것은 삽시간일 것이다. 셋은 심문실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자 마자 머플리아토 주문을 건 것 마냥 사위가 조용해졌다.
“…자. 해리, 스네이프 씨, 이 깜짝 방문에 대해 말씀해주실까! 해리 네가 과거로 간 줄은 알았지만 그를 찾아올 줄이야! 정말 놀랐다. 대사건이야. 역사가 어떻게 바뀌지 않았는지도 놀랍고.”
“역사를 바꾸는 일은 하지 않았어요, 휴. 저는 타임터너로 돌아간 과거에서 내기니에 죽어가던 세베루스를 오두막에서 구출 했고, 과거의 저를 피해서 함께 1년간 숨어 살았어요.”
“스네이프 씨와 네가? 스네이프 씨, 왜 당신은 해리와 함께 사는 것에 찬성했죠? 사이가 좋진 않았던 걸로 아는데. 당시 바로 마법사들 앞에 나타나는 게 어려운 상황이었음은 이해하지만, 곧 몇 주 후의 재판에서 무죄가 확정 되었는데도 왜 같이 숨어 살았죠?”
“해리 포터의 고집이었지. 내가 당신을 살렸는데 나 혼자 숨어 살게 놔둘 거냐면서.”
스네이프가 팔짱을 낀 채로 비웃으며 말했다. 해리는 그것이 새삼 어린 투정이었음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휴는 으흠, 하고 눈썹을 위로 꿈틀이며 해리를 보았다. 해리의 벌건 얼굴을 보아하니 거짓이 아닌 건 분명했다.
“기억을 제출 해야겠군요. 두 사람 다 기억이 일치하는지 확인 절차가 있을 겁니다. 스네이프 씨는… 그렇게 요란하게 등장하였으니 이미 물론 기자들도 다 알게 되었겠지만, 어쨌든 우리 오러 측에서는 사실 관계 모두 검증 후에 당신이 살아있음을 마법세계에 발표 할 겁니다.”
“그렇게 하시오.”
“저, 휴 씨.”
필요 서류를 기록하던 휴가 고개를 들어 해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해리는 침이 마르는 지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스네이프는 슬쩍 그런 해리를 보더니, 벽 쪽으로 시선을 홱 돌려 버렸다. 음? 뭔가 기류가 이상한데? 기민한 오러의 감이 아니더라도, 둘 사이의 분위기는 어쩐지 기묘한 데가 있었다. 보는 입장에서도 눈치를 보며 긴장하게 되었다. 휴는 괜스레 양피지를 돌돌 말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해리, 지금까진 거짓이었니?”
“아, 아뇨 아뇨! 지금까지도 다 진실이었어요! 그, 그런데… 아직 못 전해드린 말이 있어서.”
해리는 이제 론 위즐리의 머리색과 상당히 흡사한 얼굴 색을 하고 있었다. 휴는 오늘 론이 오프인 것이 몹시 아쉬워졌다. 론이 근무중이었으면 바로 심문실로 불러 해리의 피부톤과 머리색을 대조해 보자 했을 것이다.
휴는 양 손을 겹쳐 잡아 턱 밑에 두었다. 스네이프는 왠지 당장이라도 맨 몸으로 거인족 앞으로 뛰쳐 나가고 싶어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휴는 옆눈으로 스네이프를 흥미롭게 지켜 보면서, 이 쪽의 홍당무 포터도 흥미진진하게 쳐다 보았다. 어쩐지 해리가 무슨 말을 터뜨릴 지 감은 왔으나 설마? 하는 일말의 의심은 있었다.
정말? 해리 포터와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저, 저희 사랑하고 있어요!!!”
“……으윽.”
빙고였네.
해리는 옆 물품창고에서 s-731, h-19 라벨이 붙은 펜시브 두 개를 가져왔다. 문을 다시 열었을 때, 스네이프는 입을 꾹 다물고 휴의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아, 세베루스 어떡해…… 근데 귀여워……. 해리는 다소 팔불출스런 생각을 하면서 펜시브를 내려 놓고 의자에 앉았다.
“좋아, 해리가 펜시브를 가져왔으니! 기억 제출을 시작해볼까요? 해리, 타임터너가 발동된 순간과 과거로 넘어간 시점에서부터 스네이프 씨 구출 장면까지 편집 없이 제출 바란다. 스네이프 씨께는 내기니에 물린 직후부터 해리가 당신을 구하는 장면까지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연애행각은 넣지 않은 담백한 그 후 동거 부분도 부탁할게요.”
찡긋, 윙크를 날리는 휴는 굉장히 젠틀한 얼굴이었지만, 스네이프는 휴의 목에 지팡이를 들이대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느라 힘들어 보였다.
해리가 먼저 지팡이 끝을 관자놀이 옆으로 붙였다. 은색의 실 줄기가 가느다랗게 지팡이에 따라 붙어 나와, 하늘거리며 펜시브 안으로 떨어졌다. 스네이프는 눈을 감고 기억을 정렬한 후, 필요한 것 몇 개를 추려 제출했다.
“스네이프 씨,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관해두다가 위즌가모트에 제출하겠습니다. 걱정마세요. 해리, 보관실에 넣어 두고 암호는 25번째 순서의 그것으로 해둬라.”
해리가 부양마법으로 펜시브를 띄우고 다시 심문실을 나섰다. 부서에 앉아있는 오러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심문실 안의 스네이프를 보고 있었다. 보관실에 펜시브를 안전히 넣어 둔 해리가 문을 열고 나오자 마자, 오러 제인에 의해 해리의 어깨가 붙잡혔다.
“해리! 스네이프라니! 도대체 어디서, 그를 어떻게 찾은 거야?! 심지어 살아 있다니! 내기니에 물렸었는데!”
“아. 제가 과거로 가서 그를 구했거든요. 지금 기억을 제출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나중에 열람 승인 받으시고 보세요.”
“대단하다, 해리! 사라진 스네이프 찾느라 그렇게도 힘들어 했었는데, 진짜로 네가 그를 찾아냈다니! 역시 해리 포터는 달라! 해리 포터, 선택 받은 아이~”
“아! 제인!! 그러지 좀 말라니까요. 그만 놀리세요 그걸로 좀!”
“아차차. 이제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었지요. 제가 실례하였습니다, 해리 포터 나으리. 선택 받은 어른~ 해리 포터어~”
해리와 제인이 마주 보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심문실에 앉아있는 스네이프는 문 밖의 그들의 모습을 빤히 쳐다 보고 있었다. 방음마법이 걸려 있는 지 바깥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해리가 지금 저 여자랑 무슨 대화를 하고 웃고 있는 지, 스네이프로서는 알 수 없었다. 썩 마음에 드는 광경은 아니라 스네이프의 얼굴이 굳었다. 휴는 그런 스네이프를 바라보다 마침내 입술을 떼었다. 침묵은 스네이프의 취미였지, 휴의 취미가 아니었다.
“실례지만 스네이프 씨, 해리와 언제부터 그런 관계가 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실례인 걸 안다면 말을 아끼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걸, 기왕 오러라는 직업을 가졌으면 아는 게 좋을 것 같소만?”
“스네이프 선배님, 당신이 우리 기숙사 앞에서 에반스 선배님을 기다리던 게 기억납니다.”
“ …점점 더 무례해지는 군, 오러 휴.”
“저는 그 때 아직 2학년이어서 슬리데린 5학년이었던 당신 앞을 지나가기가 무서웠거든요. 그래서 기억에 남지 않을 수가 없었네요.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만.”
“하고자 하는 얘기가 뭔가?”
“해리는 에반스 선배님을 참 많이 닮았죠.”
“…….”
해리가 전 데스 이터 스네이프의 무죄가 걸린 재판에서, 자신이 죽기 직전 넘겼던 기억을 증거로 제출했던 건 알았다. 그러니 마법세계는 슬리데린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그리핀도르의 재능 있는 마녀에 대한 음험한 마음까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이 탐탁치 않았지만, 그걸 진심으로 역겨워 할 제임스 포터도 시리우스 블랙도, 리무스 루핀도 전부 이 세상에 없었다. 그러니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직접적으로 자신의 첫사랑을 언급하는 현 애인의 직장동료를 보고 있자니 스네이프는 불쾌함에 속이 끓었다. 앞으로도 이딴 재밌지도 않은 과거가 들춰져야 하는 건가?
“해리는 착하고 귀엽고 센스 있고, 맘에 드는 신입 오러이자 후배입니다. 그래서 저랑 꽤 친하고요. 해리의 선택 받은 아이라는 타이틀은 수동적인 느낌이지만, 사실 해리가 그 누구보다 능동적인 사람인 걸 전 알아요. 그런 해리가 스네이프 선배님의 과거를 다 알고도 선택했다는 건, 절대 한 순간의 불장난이 아닐 테죠. 여자친구도 있던 애가 엄마를 사랑했던 사람을 사랑한다고 인정하기까지 속앓이를 많이 했을 거고. 물론, 스네이프 선배님도 마찬가지로 에반스 선배님의 아이를 사랑한다고 인정하기가 무척이나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어쩌면 해리보다도 더 많이.”
“……말이 많은 남자군.”
스네이프는 휴의 웃는 얼굴을 무시했다. 해리와 왜 친한 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둘 다 저돌적인 그리핀도르, 그자체였다.
“둘이 무슨 얘기중이었어요?”
막 문을 연 해리가 눈을 동그랗게 키우고 물었다. 즉시 스네이프의 표정을 살폈는데, 큰 변화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해리. 앉아 봐. 둘이 알콩달콩 사랑 얘기 좀 들어 보자.”
“휴 씨!! 세베루스를 괴롭혔군요!”
“아이고, 이 쬐끄만 팔불출아. 둘이 사귄다는데 그럼 그런 것도 못 묻냐?”
“세베루스 앞에서 어떻게 얘기해요!”
“어쭈쭈. 얼굴은 왜 붉히냐? 누가 둘만의 야시시한 사생활까지 듣고 싶댔나?”
스네이프가 지팡이를 치켜 들었다. 휴는 어이쿠, 양 손을 들어 항복 표시를 했다. 당장에 저주 주문이 튀어나올 것 같은 무시무시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해리가 안절부절 못하며 스네이프의 지팡이 쥔 손등을 감싸쥐자, 스네이프는 못내 아쉬운 눈치로 휴의 면전에서 지팡이를 내렸다.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속을 이 정도로 긁은 사람도 별로 없을 거라는 게, 휴의 남은 생에 굵직한 무용담이 될 것은 분명했다.
해리와 스네이프는 마법부 건물을 나와, 지상의 런던 땅에 올라 섰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점심 때인 만큼 음식점을 찾는 행인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마법을 써서 로브를 머글이 입는 자켓으로 바꾸고, 둘은 우산을 함께 썼다. 각자 하나씩 펼치고 가면 편할 것을, 해리의 고집이었다. 이런 것도 연인 같잖아요. 들뜬 해리의 목소리에 스네이프는 결국 져 주었다.
해리는 머글이 운영하는 이탈리안 식당을 찾았다. 5월 2일은 스네이프와 파스타, 피자 그리고 콜라를 먹어야만 할 것 같았다. 이제는 익숙하게 콜라부터 입에 넣는 스네이프에, 해리는 슬며시 웃음이 흘러 나왔다. 콜라를 먹은 스네이프의 입 안은 단 맛이 나서 좋았다. 키스하고 싶어졌지만 이 곳은 스피너즈 엔드가 아니었다. 눈만 맞으면 뒹굴 수 있었던 그 곳이 해리는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아까 저 없던 틈 타서 휴 씨가 짓궂게 물어댔을 것 같은데….”
“굉장히 무례한 남자더군. 너랑 친한 직장 선배라니까 뻔하지만, 포터.”
“휴 씨가 뭐라 했어요?”
“릴리 얘길 꺼냈어.”
스네이프가 예상했던 대로, 이 대답에 해리는 티나게 삐걱거렸다. 덜컹! 놀란 해리가 무릎으로 찍어올린 테이블이 흔들렸다. 그 탓에 포크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네이프는 말없이 콜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설마요……!”
“내가 농담으로 릴리를 입에 담겠나?”
“세상에, 정말로 그랬다고요? 그가 그렇게까지 무례하게 굴었을 줄은 몰랐어요! 제가 제대로 휴에게 화낼 게요, 세베루스!”
해리는 진심이었다. 저와의 식사만 아니었으면 달려가서 선배 오러에게 머글식 주먹 맛이라도 보여줄 태세였다. 스네이프는 픽 웃고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 말았다. 딱히 말릴 생각은 없었다.
“릴리를 사랑한 내가 이제 릴리의 아이를 사랑하게 된 것을 인정하기까지 힘들었을 것 같다 하더군. 포터, 너도 마찬가지로 릴리를 사랑하는 날 사랑하는 걸 인정하는 게 힘들었겠다고도 그가 말했다.”
“그런 얘기를 했단 말이예요? 그래서 그걸 듣고 세베루스는 뭐라 했는데요?”
“말이 많은 남자라고 했지.”
“아아, 확실히.”
해리가 피자를 한 입 물며 끄덕였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저는 인정하는 데 오래 안 걸렸는데.”
“뭐?”
“감정을 깨닫자 마자 거의 바로 인정했어요. 다만, 세베루스에게 고백할 수 없는 마음이란 것 때문에 힘들었던 거지.”
“그게 언젠데?”
“고드릭 골짜기 갔을 때요. 세베루스가 엄마 묘 앞에서 울었던 날.”
머쓱하게 웃은 해리가 입에 피자를 왕창 밀어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민망해하는 눈치라 스네이프도 대꾸 없이 파스타를 입에 넣어 조용히 씹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 때부터였다고? 스네이프는 그 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릴리의 묘 앞에서 울다가, 눈물을 겨우 갈무리하고서 일어섰다. 근처의 나무 그늘 아래의 해리를 발견 했고, 다가섰다. 어쩐지 저주 걸린 듯이 넋나간 얼굴은 제 감정이 혼란스러워서 그랬던 건가. 스네이프는 이제야 그 때의 해리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그 날 엄마, 아빠의 묘에 갔었고, 세베루스는… 세베루스는 아빠를 싫어하잖아요. 그런데 엄마가 아빠와의 사이에서 저를 낳았으니까…. 제가 세베루스 입장이었으면 얼마나 화날 지 생각했거든요. 지니를 대입해서….”
“…….”
“그런데…… 화가 안 나더라고요. 지니 옆에 나 말고 다른 남자가 있고, 그 사이에 아이가 있다 생각해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전 그런 저에게 실망했어요. 고작 몇 주 못 봤다고, 결혼까지 생각한 사람이었는데 감정이 식었잖아요.”
스네이프는 해리의 말을 막을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냥 들어주기로 했다. 턱을 괴고서 해리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 보았다. 번개무늬 흉터 아래 까만 눈썹, 진중하고 또렷한 초록색 눈, 날 선 콧날, 부드러운 입술, 얄쌍한 턱선. 새삼 어리고, 새삼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저 자신에게 실망하고 있어서 속이 싸했는데…… 세베루스가 다가와서 제 어깨를 짚는데, 그게 너무 뜨겁다고 느껴지는 거예요. 절 걱정하는 그 눈빛이랑……. 그 때부터 제 머릿속과 가슴에는 당신밖에 없었어요.”
“상당히 낯뜨거운 고백인 걸, 포터.”
스네이프가 시원한 콜라 잔을 뺨에 살짝 대었다. 어쩔 수 없이 뜨거워진 얼굴에 차가운 게 닿아 기분이 좋았다.
“말 잘 하는데. 그런데 위즐리 앞에서도 그렇게 술술 얘기할 수 있을까?”
“저, 저 좀 믿어주세요 세베루스….”
“포터, 내가 널 못 믿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 상대는 지네브라 위즐리 하나가 아니야, 날 선택한다는 건 위즐리 가족 전부를 배신한다는 거다. 너에게 위즐리가 어떤 존재들인지 아니까 넌 망설일 수밖에 없겠지.”
“세베루스…….”
“나도 여전히 완벽한 확신은 못 하겠군. 해리 포터가 위즐리를 포기하면서까지 날 선택한다라. 론 위즐리가 널 죽이려고 들지도 모르겠군. 내가 귀에 구멍을 냈던 조지 위즐리는 어떻고? 물론 몰리 그녀도.”
창 밖으로 빗소리가 시끄러웠다. 하늘에서 때려 붓는 듯 물줄기에 앞이 보이지가 않았다. 스네이프는 눈을 꾹 감고 있는 해리를 바라 보았다. 잠깐의 침묵. 곧 해리가 다시 눈을 뜨자 맑은 녹색 눈이 보였다. 스네이프는 또 홀린 듯이 그 눈을 들여다 보았다.
“세베루스. 조지는 그 일에 대해 오해하지 않아요. 당신이 데스 이터를 공격하려다 빗맞춰서 다친 거였고, 이젠 그냥 구멍난 귀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오히려 뽐내요. 론은 분명 저에게 화내겠죠. 몇 대 맞아줄 각오는 하고 있어요. 하필 상대가 그 스네이프니까 더 기막혀 할 테죠. 하지만 저희가 그동안 몇 번이나 싸웠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 때마다 우린 잘 풀었고, 여전히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예요.”
“포터, 정말 말 잘하는 군, 오늘따라.”
“몰리 아줌마에겐 저도 죄송해요. 어떤 부분에선 지니보다도 더요. 예전만큼 절 예뻐해주지 않으셔도 각오해야죠. 어쨌든 전… 지니만 제일 신경쓰여요. 제가 잘못했잖아요.”
해리가 생각보다도 더 단단한 사람인 걸 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굉장히 선한 사람인 것을. 해리는 제가 지니에게 줄 상처만 생각할 뿐, 자신에게 돌아올 비난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 세베루스 스네이프를 위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스네이프보다야, 이 관계에 훨씬 당당한 해리였다.
“…지네브라에겐 어떻게 말 할 거지? 지금은 학기중이잖아.”
“직접 말해야 하니까 호그와트로 찾아갈 거예요. 내일 예언자 일보로 당신이 살아 돌아온 게 공표 된 이후에요.”
“하루의 유예가 남았군.”
“그런 셈이죠.”
콜라를 꿀꺽거리면서 해리가 대답했다. 스네이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꺼낼 필요 없겠다고 생각했다. 해리가 알아서 하겠지. 해리를 신뢰하면서, 스네이프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다.
“포터, 내일 같이 호그와트로 가지.”
“네???? 지니를 마, 만나시게요?!!”
“아니. 맥고나걸을 만날 거다.”
“아, 아아 맥고나걸 교수님을…….”
해리가 눈을 깜박깜박거렸다. 잠깐만, 맥고나걸 교수님?
“복직을… 하시려고요?”
“그래.”
해리는 지니를 신경쓰느라, 그리고 스네이프와 단둘이 집에서만 보내는 일상에 너무 익숙해져 있느라, 스네이프가 원래는 학교에서 늘 교수로 일 했었던 것도 생각 저편에 묻어 두고 있었다. 자신이 어린이 체육 센터에서 퇴근하고 나면, 집 안에 있던 스네이프가 따듯한 저녁과 함께 맞이해주는 일상이 약 1년 가까이 이어졌던 탓이다. 해리는 갑작스레 눈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잠깐, 교수님들은 항상 학교에 계셨는데? 게다가 스네이프는 오랜 기간 슬리데린 기숙사의 사감이었다.
“교수로 복직하시면 학기 중에는 학교에 머물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물론 그렇지.”
“저는 어쩌고요?”
“벽난로로 보러 오던가.”
해리는 망연자실과 분노가 함께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세베루스, 저랑 결혼하겠다면서요!”
“너랑 결혼하면 내가 직업을 잃어야 되는 건가, 포터?”
스네이프가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 고고한 태도에 해리의 머리 뒤로 핏줄 두 어개가 서는 것 같았다. 포크를 그릇 위에 내려 놓고, 해리가 심호흡을 내쉬었다.
“신혼인데 떨어져서 지내겠다고요?”
“벽난로로 보러 오라니까?”
“이게 그 정도로 해결 되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포터, 또 징징대기 수법인가? 1년 전에 네가 날 살렸으니 혼자 숨어 살게 하지 말라고 징징대던 거에서 발전이 하나도 없군.”
“세베루스 스네이프! 나랑 한 마디 상의 없이 복직을 결정한 것부터 화가 난다고요!”
해리가 씩씩대며 스네이프를 쳐다 보았다. 스네이프는 이게 정말 어린애 생떼라고 생각했지만, 상의 없이 결정 된 사항이란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했다. 하지만 저는 늘 호그와트의 교수로서 일 해 왔는데, 새삼 해리의 반응이 어이 없기도 했다. 다름 아닌 해리가 자신의 제자였으면서.
“그래서 어쩌잔 거야? 내가 직업 없이 집에서 너만 기다리면서 밥이나 차려주길 바라나?”
“그─그건 아니지만…!”
“네가 화내는 이유는 그거 같은데.”
스네이프가 딱딱하게 말했다. 해리는 답답함에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베루스는 나랑 같이 살 부대끼고 지내는 것에 아쉬움이 없는 건가? 해리는 스네이프의 말을 듣자 마자 그 생각부터 들었는데, 속상해서 눈물이 맺힐 것 같았다. 제가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속상하다니, 진짜 어린애 같은 투정이라고 해리도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스네이프가 이걸 몰라주는 것도 미웠다.
“저는 세베루스랑 같은 집에서, 계속 같이 지내고 싶은 거예요.”
“어차피 둘 다 직장에 나가면 저녁에야 만나는 게 부부야.”
“그렇다 해도 학교 벽난로랑 집 벽난로가 같아요?”
“만날 수 있는 건 똑같잖아.”
아, 진짜 오랜만에 세베루스 스네이프 줘 패고 싶네. 해리는 남은 콜라를 파이어 위스키 마냥 원샷하고, 형형한 눈으로 스네이프를 노려 보았다.
“알겠어요, 저 퇴근한 후에 봐요 스네이프 교수님.”
스네이프는 혀를 차며 포크를 내려 놓았다.
─
오랜만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시간이 흘렀네요. 최근까지도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이 늘 계셔서 신기한 마음입니다.
제가 해리랑 스네이프라는 캐릭터를 너무나 사랑하고, 그래서 이 글을 붙잡고 끝까지 쓰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으나, 제 마음에 드는 다음 전개가 잘 떠오르지 않았고 저는 스스로가 재미 없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간 제 일상에도 많은 변화가 있어서 타자기 앞에 앉아 있을 시간도 없었다는 변명도 해 볼게요.^^;(사실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Harry Po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스네] 구원자 17 (0) | 2021.03.13 |
---|---|
[해스네] 구원자 16 (0) | 2021.03.10 |
[해스네] 구원자 14 (12) | 2018.01.16 |
[해스네] 구원자 13 Dear.교수님 생일 축하해요 (5) | 2017.01.09 |
[해스네] 구원자 12 (1) | 2016.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