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7월이 시작된 후로 백수 세 명의 만남은 거의 매일이라 해도 좋았다. 스네이프는 해리와 단둘이 있는 집에서 필연적으로 하게 되는 일들을 벗어날 도피처로 말포이 저택을 찾았다. 드레이코가 보는 앞에서는 해리도 자제를 했기 때문이었다. 해리가 드레이코를 저를 사이에 둔 경계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은, 스네이프에게 몹시 어이가 없는 문제였으나, 연인의 질투심이 얼마나 깊은지 뼈저리게 느낀 바 있어 그러려니 싶기도 했다.

어쨌든 스네이프의 몸은 요즈음 해리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임신을 위해서라지만 고삐가 풀린 어린 신랑을 감당하기에 자신은 (스스로가 느끼기에) 너무 늙고 지쳤다. 스네이프는 마법사들의 느린 노화를 무시하고, 서른아홉이라는 제 나이의 숫자에만 집착했다. 제가 마법사들 나이로는 어린 축이라지만 해리는 기실, 머글 나이로 따졌을 때도 너무 어렸다. 해리는 아직 열여덟밖에 ─곧 열아홉 살 생일을 맞고─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그와 자신의 체력이 같을 리도 없었지만, 불이 붙은 해리는 자신의 몸에 집착을 너무나 심하게 했다. 한 번 시작하면 안을 몇 번이나 싸고 채우는 것에, 스네이프는 온 몸이 녹초가 되어서 침대에 겨우 누워 숨만 헐떡이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스네이프가 신경질적으로 이러다 세 쌍둥이라도 갖겠다고 꽥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다. 해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스네이프를 타이르기라도 하듯 말했다. 말이 씨가 돼요, 세베루스. 그러는 너나 그 놈의 씨 좀 적당히 뿌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스네이프는 다시 제 안에서 움직이는 해리의 것에 신음만을 흘릴 수 있을 뿐이었다.

말포이 저택은 확실히 스네이프가 살기 위한 도피처였다. 해리가 스킨십의 자제를 하고, 드레이코는 스네이프 교수에게 깍듯했으며, 해리와는 빈정거리며 서로를 긁으면서도 사실 대화를 즐기는 티를 냈다. 스네이프는 해리가 동갑의 동성친구와 떠드는 모습을 보는 게 내심 즐거웠다. 최근, 루시우스와 나르시사도 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왔지만 굳이 해리가 껴있는 그들의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다. 보석금으로 풀려난 전 데스 이터 부부는 전직 오러인 마법세계 영웅을 꺼리는 것이 분명했다. 이중첩자였던 스네이프 자신도 물론, 그들에게 편한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제 아들을 찾는 유이한 방문객들에 대접은 제대로 잘 해주라 명했었는지, 집요정이 챙겨주는 식사는 늘 맛있었고 간식과 음료도 항상 새로웠다.


“포터 네가 슬리데린에 들어올 뻔 했었다고?”

민들레 뿌리를 칼로 다지던 드레이코는 하마터면 제 손가락을 뿌리채 자를 뻔 했다. 식겁해서 제 손가락이 잘 붙어있는지 확인한 드레이코가 해리 쪽을 흘겨 보았다. 해리의 발언에 슬리데린의 오랜 사감도 너무 놀란 건 마찬가지라, 드레이코의 실수를 지적할 수가 없었다. 맙소사, 살라자르 슬리데린이시여, 해리 포터가 슬리데린에 들어왔을 수도 있었다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하지만 해리의 태도로 보아 거짓이 아닌 듯 했다. 스네이프는 레질리먼시를 쓸까하다가 굳이, 싶어 그만뒀다. 저 어딜 봐도 무모한 만용의 덩어리 그리핀도르의 사고뭉치에게 마법의 모자가 슬리데린을 고려했었다니, 하긴 그 모자도 너무 오래 되어 퇴물이 다 됐다 싶긴 했다.

“모자는 내가 슬리데린에 가면 더 잘 될 수 있다고 적극 추천 했었지.”
“여기서 얼마나 더 잘 되려고? 마법세계의 영웅 나리가.”
“글쎄, 모르지. 아무튼 나도 슬리데린은 안 들어가서 다행인 것 같아. 내가 기숙사 배정 받기 전에 만난 슬리데린이 너라서 거긴 들어가기 싫었거든, 말포이. 기억 나? 기차에서 네가 나랑 친해지고 싶어서 손 내밀었던 거.”

드레이코의 표정이 썩었다. 그 또한 11살 때 호그와트 급행열차에서의 일을 기억하는 중이었다. 고일과 크래브를 데리고 해리 포터가 있다는 칸을 찾아갔었다. 루시우스는 어둠의 마왕을 몰락시킨 선택 받은 유명한 아이와 제 아들의 친분을 원했었다.

“내가… 언제.”

민들레 뿌리를 다지는 드레이코의 칼질이 좀 더 바빠지고, 얼굴이 붉어졌다. 해리는 빙그레 웃었다.

“네가 론의 가문을 욕하고, 마법사 가문의 수준 차이에 대해 떠들었었잖아. 그래서 내가 화를 냈었고.”

물론 드레이코도 똑똑히 기억했다. 고일의 손가락을 문 쥐새끼 웜테일에 식겁해서 론과 해리와 더 싸우지 못하고 도망쳤던 일이 생생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위즐리 가문의 위상은 높아진 것도, 말포이 가문의 명예는 땅에 처박힌 것도 드레이코는 잘 알았다.

드레이코는 심통난 얼굴로 다진 민들레 뿌리를 솥에 넣었다. 7월 말이 다 되어가며 드레이코가 개발하려는 치료약물의 조합에 조금씩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연구 중인 저주 주문용 치료약이 워낙 만들기 어려운 물약이라 더 긴 난항을 예상했었으나, 최연소 포션 마스터가 옆에 있는 덕인지, 그 자신의 포션 제조 재능 덕인지 확실히 진도는 나아갔다.

“세베루스, 내가 만약 진짜로 슬리데린에 들어갔다면 어땠을까요? 감점도 막 했을까요?”
“당연하지.”

스네이프는 눈썹을 까딱이며 단호히 대답했다. 기숙사가 슬리데린이라 하여 저 멍청한 해리 포터가 천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제임스 포터와 판박이인 얼굴이 바뀌는 것도, 릴리의 아들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제가 해리를 싫어하고 점수를 깎아댈 이유는 여전히 충분히 차고 넘쳤다.

“흥, 다행이군, 포터. 네가 우리 기숙사에 들어왔다면 기숙사 우승컵은 꿈에도 못 꿨겠어.”
“1학년 때 나 때문에 우승컵 뺏겨놓고 할 말이냐?”
“하! 그 일 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우리 아버지는 덤블도어가 노망이 났다고 말씀 하셨지─ 스네이프 교수님,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덤블도어의 그 말도 안 되는 그리핀도르 점수 몰아주기에, 우리 우승컵을 뺏어간 일이요!”
“덤블도어가 염치 없는 노인네인 건 진작 알았지. 하지만 말단 교수가 무슨 힘이 있었겠나, 드레이코.”

해리는 드레이코와 스네이프가 알버스 덤블도어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제 아들의 이름을 알버스로 지어도 정말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리고 슬리데린 둘이 합심해서 떠드는 것에도 배알이 꼴렸다.

“우승컵은 그렇다 쳐. 내가 만약 슬리데린에 들어 갔으면 네가 퀴디치 팀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말포이?”
“우습군, 포터! 우리 아버지가 학교의 이사셨고, 그 때는 스네이프 교수님도 네 편이 아니었다고.”
“실력으로는 못 이길 것 같나 보네. 뒷배 타령이나 하는 것만 봐도 안 됐겠는데?”
“뭐라고?! 겨뤄 봐? 지금 해보자는 거지, 포터!!”
“그래, 당장 해! 붙어보면 알겠지, 말포이!!”

민들레 뿌리가 끓고 있는 솥을 두고서 드레이코가 벌떡 일어섰다. 해리는 이미 연구실의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스네이프는 문득, 1년 전 숨어 살 때부터 해리가 퀴디치 타령을 해대던 게 생각났다. 지금 이러려고 얘기를 꺼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드레이코 또한 퀴디치에 사족을 못 쓰는 건 마찬가지라, 드물게 눈을 빛내며 해리를 뒤따라 나갔다. 스네이프는 코웃음을 치고 그들을 따라 나섰다. 지팡이를 휘둘러 솥의 불을 끄고, 연구실의 문도 닫으면서.


7월 느지막한 한낮의 햇살은 피부를 아프게 찔러왔다. 하지만 해리와 드레이코는 그에 아랑곳없이 말포이 저택의 뒤편, 말포이 가의 퀴디치 연습장으로 신나게 걸음을 옮겼다. 3면이 키가 크고 빽빽한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머글의 시선을 피하기에도 유리하고 여름날의 그늘로 쓰기에도 좋았다. 스네이프는 얇은 로브의 후드를 머리 위로 쓰고, 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금방 집에서 파이어볼트를 가져온 해리가 님부스 2001를 쥔 드레이코의 앞에 당당하게 섰다. 드레이코는 파이어볼트를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금세 아무렇지 않은 척 상체를 펴고 꼿꼿이 섰다. 빗자루 따위로 기세가 꺾이는 건 도련님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스니치를 먼저 잡는 쪽이 이기는 거다, 포터.”
“블러저도 풀어야 하지 않겠어, 말포이? 너무 시시하게 끝나버릴걸?”
“교수님 앞이라고 너무 허세부리는군, 포터. 과연 끝나고도 그럴 수 있을까?”

드레이코가 자신의 퀴디치 용품함을 열었다. 블러저들이 저들도 꺼내달라 덜컥덜컥 난리였지만 드레이코는 그것들을 무시하고 황금색의 스니치의 잠금을 풀었다. 드레이코의 손바닥 위에 작고 동그란 스니치가 날개를 사르륵 펼쳤다.

“이기면 보상이 있어야하지 않나?”

스니치를 보던 해리가 말을 뱉었다. 드레이코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해리를 보았다.

“당연히. 이기고나서 이긴 쪽이 원하는 걸 들어주기, 어때? 포터.”
“좋아, 이기고 난 뒤 말하자고.”

해리 역시 자신만만한 눈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드레이코의 손바닥 위의 스니치가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스니치가 돌아다닐 틈을 주기 위해 3분여를 기다렸다. 보통 10번의 시비는 털었어야 할 시간동안 둘은 긴장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입에 침이 마르는 긴장감과 승부욕이 가슴 속에서 타올랐다. 이긴 보상 따위에는 사실 둘 다 관심이 없었다. 오랜만의 퀴디치, 그것도 상대는 학창시절의 수색꾼 라이벌이었다. 해리도 드레이코도 두근두근 가슴이 터질듯 뛰었다.

스네이프는 그늘에 앉아서, 두 청년이 빗자루를 쥔 채 서로에게 긴장의 시선을 보내는 걸 코웃음을 치며 바라보았다. 도대체 퀴디치가 뭐라고 저러고 환장을 하는지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세베루스! 이기고 돌아올게요!”
“스네이프 교수님, 그리핀도르 수색꾼 놈을 짓밟고 오겠습니다!”

그러시던지. 스네이프는 둘 모두 응원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해리는 자신이 연인이기 때문에, 드레이코는 자신이 전 슬리데린 팀의 수색꾼이기 때문에 스네이프가 자신을 응원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말이었다.

스네이프가 신호를 주기로 했었다. 느긋하게 나무에 등을 기댄 스네이프가 지팡이를 들었다. 머글의 총소리와 비슷한 폭음이 지팡이 끝에서 터졌다. 신호에 맞춰 해리의 운동화의 앞축이 땅을 구르고, 파이어볼트에 탄 해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의 동시에 드레이코의 님부스 2001도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해리는 더웠던 공기가 주변에서 싹 사라지는 걸 느꼈다. 시원한 바람이 저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탁 트이는 가슴에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드레이코 또한, 오랜만의 비행에 심장이 터질듯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맞아, 이랬었다. 이래서 퀴디치를 좋아했었지,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스네이프와는 나눌 수 없었던 즐거움을, 해리는 또래의 드레이코와는 나눌 수 있었다.

빗자루는 작은 손짓에도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날았다. 둘은 하늘을 비행하며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해리와 드레이코는 진정한 의미에서, 친구가 되었다.


“말이 돼?”

해리는 넋이 나간 얼굴로 드레이코의 손에 잡힌 황금색 스니치를 보고 있었다. 하얗고 고운 도련님의 손에서 파라락 발버둥치는 작은 공을, 해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야! 이거 네가 조작해둔 거 아니야? 네 퀴디치 용품이잖아!”
“승부에 승복하지 못하는 건가, 포터? 난 정정당당히 이겼어.”

해리의 열이 받은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드레이코가 먼저 스니치를 발견했고, 추격 끝에 드레이코가 먼저 스니치를 잡았다. 그 간단한 승부의 과정이 해리의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았다. 스네이프는, 자신이 누구도 응원하지 않는다 생각했으나, 슬리데린의 전 수색꾼이 그리핀도르의 전 수색꾼을 완벽하게 이긴 것에 입매가 씰룩이며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해리는 여전히 씩씩대며 한 번 더 하자고 드레이코에게 졸랐다. 그에 스네이프가 눈을 부라리고 해리를 보았다. 덥다, 들어가지, 포터. 연인의 그 기세에는 해리도 깨갱해서 고개를 숙였다.

말포이 저택은 마법으로 냉방이 조절 되어 시원하고 쾌적했다. 들어오자마자 흘린 땀들이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해리의 집 거실만큼이나 익숙한 드레이코의 개인 응접실이었다. 그들이 각자의 지정석을 차지하자마자 집요정이 냉큼 시원한 버터맥주 3잔을 대령했다.

“이제 슬슬 이긴 보상을 생각해볼까.”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드레이코가 말을 했다. 시원하고 달콤한 버터맥주의 맛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던 해리는 순식간에 표정을 썩히며 드레이코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자신이 드레이코에게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스네이프는 해리와 드레이코를 번갈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제 몫의 버터맥주에 손을 뻗었다. 더운 여름에 바깥에 나가있었더니 목이 탔다.

“욱….”

스네이프는 버터맥주에서 맡아지는 비린내에 인상을 찌푸리며 바로 내려놓았다. 해리가 바로 스네이프를 쳐다보고 무슨 일이냐 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말포이 가에서 취급하는 버터맥주가 상할 일도, 저를 제외한 해리와 드레이코는 이걸 맛있게 먹고 있는 일도 이상했다.

“비린내가 나….”

드레이코의 눈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자신의 집요정이 손님께 실수를 저질렀나 싶어, 스네이프의 버터맥주를 바로 가져가 코 밑에 댔다. 그러나 드레이코의 눈은 곧 동그랗게 풀렸다. 그냥 평범한 버터맥주였다. 해리도 얼른 드레이코의 손에서 컵을 받아가 냄새를 맡아 보았다. 해리의 코에도 그저 달콤한 향기만 맡아질 뿐이었다. 스네이프는 둘의 반응으로 저만이 비린내를 맡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표정이 굳은 채, 스네이프는 비린내를 참고 버터맥주를 입 안에 넣어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컵에 뱉어내고 웁, 욱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세베루스…!!”
“교수님…!!”

입 안을 가득 채운 역한 맛이 너무 괴로웠다. 스네이프는 겨우 입에 지팡이를 대고 헹굼마법을 시전했다. 너무 힘들어서 해리의 옷깃을 잡고 끌어당겼다. 해리는 스네이프를 끌어 안고, 등을 쓸어 토닥이며 드레이코와 시선을 교환했다. 드레이코도 해리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세브, 혹시…….”

스네이프는 해리의 품에서 나는 해리의 냄새에 차츰 안정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제서야 드레이코의 앞에서 해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제자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 제길, 미간을 찌푸리며 스네이프가 겨우 몸을 일으켜 해리를 밀어내었다. 해리는 그러나 계속 스네이프를 안고 있으려고 했다. 뭐, 해리가 그러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스네이프는 드레이코의 표정을 보고 의아해졌다. 뭐라 형언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포터, 넌 또 무슨….”

문득 돌아본 해리의 표정은 더 가관이었다. 해리는 거의 울먹이는 것처럼 보였다. 저주라도 맞았나, 포터? 스네이프는 당혹스러움에 그렇게 물을 뻔했다.

“세베루스…. 좀 괜찮아요…?”
“더운 여름에, 그늘이었어도 꽤 나가있었던 탓에 더위를 먹은 것 같군…. 드레이코에게 민폐니 이만 집으로 돌아가서 쉬어야겠다, 포터, 일어나지.”
“하지만 세베루스…. 버터맥주 냄새 맡기 전까진 안 그랬잖아요……?”
“갑자기 그럴 수도 있지, 집에 가서 누워서 좀 쉬면 나아질 일이다. 포터! 일어나 가자니까?”
“스네이프 교수님! 제가 보기에도…… 교수님은 단순히 더위를 먹은 게 아니라…….”

드레이코까지 나서서 스네이프를 붙잡아 세웠다. 스네이프는 어리둥절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느닷없이 해리가 저를 와락 껴안았다. 이 미친놈이, 이젠 천지분간도 못하고 집에서 하듯이 저를 안고 뒹굴고 싶은 모양이었다. 스네이프는 기겁을 하며 해리를 밀어냈다. 정말이지, 7월 한달 내내 해리에 의해 다리 사이가 허전할 일이 없었다.

……잠깐.
스네이프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동공을 크게 키웠다.

“나, 혹시…….”

해리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스네이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저를 꽉 품에 안은 채였다. 드레이코가 그들을 보더니 입을 떼었다.

“교수님, 치유사를 부를게요. 저희 집안과 잘 아는, 성 뭉고 출신의 개인 치유소를 운영중인 치유사입니다. 소수의 회원들을 대상으로만 일을 해서 입도 무겁고, 실력도 확실해요.”
“말포이……!”

드레이코는 해리가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감격해서 저를 보는 것은 괜찮았다. 그러나 이렇게 덥석, 저를 끌어안아오는 것까지는 예상밖이었다. 뭐, 축하… 한다고 해야겠지, 포터…. 그 말에는 해리가 웃음을 흘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러가지로 고마워, 해리의 말에는 드레이코가 슬며시 웃음을 보였다.


드레이코가 부른 치유사는 뾰족한 은테 안경을 낀 나이가 지긋한 여자 마법사였다. 그녀는 깐깐한 인상 그대로, 유명인인 해리와 스네이프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드레이코에게 이미 임신 확인 여부를 묻는다는 언질을 전달받았음에도 그랬다. 해리는 그녀의 태도가 성격 탓인지, 고객의 일에는 침묵하기 위해서인지, 남성 임신 사례가 사실 마법계에선 은밀한 곳에선 빈번히 이뤄졌었는지 궁금해졌다. 마지막 의심은 자신이 오러였기 때문에 더욱 강하게 드는 생각이었다.

드레이코의 개인응접실 옆에 딸린 손님방, 침대 위에 스네이프를 눕게한 뒤, 치유사- 데번 부인은 자신의 하얀 자작목 지팡이를 높게 들었다. 바로 이 방에서 스네이프가 여성기가 생긴 첫날밤을 보냈었는데, 이 방에서 임신에 대한 검사가 이뤄지는 것에 해리는 새삼 부끄럽고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스네이프 또한 매우 복잡하고 기묘한 기분으로 누워 있었다. 해리의 덕으로 제가 별 경험을 다 해본다 싶었다. 남성으로 태어난 자신에게 이런 일을 겪게하는 해리가 대단히 난 놈이긴 했다.

데번 부인의 지팡이가 스네이프의 배 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해리는 초조하게 살짝 물러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네이프의 납작한 배는 임신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어보였다. 데번 부인은 지팡이를 거둬 들이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흐음, 스네이프 씨, 당신의 뱃 속에는 동물의 여성생식기관이 연결되어 있군요. 이 형태는 암사슴…… 붉은 암사슴의 것인가?”
“……그렇습니다. 암사슴은 제 애니마구스입니다.”
“그렇군요, 애니마구스를 이용했다라…. 아주 똑똑한 방법을 썼군요, 스네이프 씨. 애니마구스는 본인 그자체이기도 해서 위험도가 확연히 적죠. 보자, 붉은 암사슴의 임신기간은 평균 230일, 약 8개월이죠. 당신은 현재 임신한지 한 달 정도 되었어요. 출산 예정일은 7개월 뒤인 2월 말경입니다. 축하드려요, 스네이프 씨, 포터 씨.”

임신한지 한 달 정도라고? 스네이프도 해리도 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첫날밤에 바로 임신이 되었다는 소리였다. 해리는 터질듯이 얼굴이 붉어져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돌렸다. 스네이프 또한 눈을 질끈 감고 벽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런데…… 조금 놀랍군요.”
“네? 어, 어떤 점이요…?”

남성이 임신했다는 것에도 눈썹 하나 까딱않던 그녀가 놀라운 것이 있다는 데에 해리는 흠칫 놀랐다. 스네이프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걱정에 둘을 번갈아 보는 해리의 눈빛이 떨렸다. 데번은 한 번 더 지팡이로 스네이프의 배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암사슴들은 단태동물로, 한 배에 한 생명을 갖습니다. 보통의 경우엔…. 그런데 스네이프 씨는 현재 뱃속에 두 생명을 품고 있어요. 쌍둥이입니다. 드물게 쌍태를 품는 사슴도 있으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닐거예요.”
“싸…쌍둥이요?!”

해리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스네이프 또한 눈이 부릅 떠졌다. 세 쌍둥이니 하는 소리를 괜스레 뱉은 게 분명했다. 말이 씨가 된다던 해리의 말도 떠올랐다. 한 번에 그렇게 많이 싸재끼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게 아닌가, 포터!!! 스네이프는 그렇게 호통을 치고 싶었으나 데번 부인이 앞에 있어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땅에 떨어진 게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체면이었어도, 데번은 출산하는 날까지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치유사였다. 해리도 임신은 기뻤지만 아이들이 태어난 후 앞 날이 다소 걱정스러웠다. 생초보 육아인데, 한 번에 두 명이라니…….

“아, 아이들의 성별은요…?”

해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네이프도 궁금했던 것이라 해리를 흘겨보던 눈을 데번으로 돌렸다. 데번 부인은 싱긋 웃고 둘을 마주보았다.

“모체에서 수정 되는 순간 성별은 결정된답니다. 여자, 남자아이예요. 다시 한 번 축하드려요, 두 분.”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해리는 단번에 누워있는 스네이프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스네이프도 저를 감싼 해리의 팔에 말없이 손을 얹었다. 따듯하게 몽글거리는 물거품이 아래에서부터 찬찬히 퍼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스네이프와 해리는 그들을 닮은 아이들을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해리는 이 순간, 주문 없이도 패트로누스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응접실의 드레이코는 뚫어져라 손님방을 바라보며 그들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데번 부인이 나오는 뒤로 해리와 스네이프가 나왔다. 드레이코는 턱 밑에 깍지꼈던 손을 떼고 고개를 처들었다. 해리와 눈이 마주쳤다. 해리는 조금 쑥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오, 멀린, 정말이냐? 드레이코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으쓱했다. 대단하신 영웅 나리가 마법으로 못하는 일이 없으시군. 남자를 임신시키다니, 그것도 스네이프 교수를.

다음 검진 일정을 잡고, 셋은 데번 부인을 배웅하기 위해 벽난로 앞에 섰다. 데번은 스네이프에게 임신 초기의 주의사항을 몇 가지 가르쳐주고 벽난로로 발을 옮겼다. 해리가 꾸벅 허리까지 숙여서 스네이프는 다소 민망스러웠다. 이 어린 신랑이 제자인 드레이코의 앞에서 너무 티를 내는 것 같아서 쑥스러웠다. 어차피 드레이코도 알고 치유사를 불러준 거라지만, 창피한 건 매한가지였다.

“교수님이랑 포터도 갈 건가요?”

데번 부인이 벽난로로 사라지자 드레이코가 물었다. 스네이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도움 받아놓고 바로 갈수야 없지.”
“아, 그럼, 앉으세요 교수님. 너도, 포터.”

집요정을 시켜 버터맥주를 모두 치우고 물로 바꿨다. 해리는 스네이프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드레이코의 앞이라 스네이프가 싫어해 허리를 안지는 못했지만, 가까운 체온에, 그의 체향에, 그의 뱃속에 들어있다는 저희의 아이들에 해리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스네이프도 말은 안했지만 제 배를 괜스레 만져보고 싶을 만큼 자신의 배가 신경쓰였다.

“쌍둥이래.”
“미친.”

드레이코가 수습하지 못하고 튀어나간 자신의 말에 얼굴을 뻘겋게 물들이고, 입을 틀어막았다. 해리도 왠지 모르게 쌍둥이는 더 부끄럽게 느껴져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스네이프는 평정을 찾기 위해 오클러먼시를 썼다.

“포터, 너 정말….”
“대단하지?”

멋쩍어서 해리가 더 으스대며 말했다. 스네이프는 저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었으나 참았다. 드레이코는 결국 큭큭거리며 손바닥 새로 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해리 포터가 대단하게 느껴져서 웃겼다.

“쌍둥이면… 성별은? 둘 다 똑같대?”
“아니, 여자랑 남자아이래. 최고지?”
“능력잔데, 한 번에. 축하드려요, 교수님. 고생은 두 배로 하시겠네요.”

드레이코는 진심이었다. 저 스네이프 교수는 학교에서도 수 백 명의 학생들에 시달리더니, 이젠 아이도 한 번에 두 명을 가지게 되고, 본의 아니게 그는 자신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일들을 떠맡게 되는 듯 했다. 그런 점이 스네이프의 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일이었다.

“예정일은?”
“내년 2월 말.”
“뭐? 너무 이른 거 아니야?”

드레이코가 놀라 눈을 끔벅거렸다. 고작 7개월여가 남았다기엔 교수의 배는 말라서 동그래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에 무슨 비밀이 있는지 모르니, 그저 치유사가 그렇게 판단 내렸다니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드레이코가 어릴 때부터 봐온 데번 부인의 실력은, 의심할 바 없는 최고였다. 그랬으니 교수를 위해 자신이 부른 것이었다.

“잠깐, 2월 말이면 호그와트는 학기 중이잖아. 포터, 스네이프 교수님의 출산과 겹치면 안 될텐데?”
“나도 알아. 그래서 방법을 생각해봐야지.”

해리가 진지해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리는 스네이프의 임신을 소수의 몇을 제외하곤 절대 알리지 않을 계획이었다. 술에 취한 스네이프로 인해 뜻밖에 알게된 드레이코가 변수긴 했지만, 그 변수로 인해 이 집에서 스네이프의 여성기도 발현했고 적절한 치유사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원래부터 부자들의 은밀한 치료를 업으로 삼는 데번 부인은, 자신과 스네이프의 아이를 맡기는 데에 최고의 조건이었다. 철저히 비밀을 지켜줄 수 있는 치유사였다.

“나는 대중에게는 우리 아이들을 입양했다고 밝힐 생각이야. 세베루스가 시끄러운 논란에 휘말리는 건 절대 싫어. 그러니 출산도 비밀스럽게, 아무도 모르게 해야지.”

모든 건 다 스네이프를 위해서였다. 남성 마법사들의 임신이 실제로 있었어도, 그간 마법의 역사에서 남겨진 기록이 없는 바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마법사들에게도 낯선 일이었다. 그러니 괜히 스네이프가 곤란해지는 것은 싫었다. 해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반려였다. 스네이프도 그런 해리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드레이코는 잠자코 듣고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교수님이 출산할 시기쯤에, 대략 내년초부터 교수님을 대신해 수업 할 마법약 교수가 필요하겠군.”
“맞아, 그 전에 불러오는 배는 마법으로 충분히 감출 수 있을 테지만….”
“그런데 육아라는 게 그렇게 금방 끝나지 않을 걸, 포터? 다음 해도 계속 다른 마법약 교수가 필요해.”

해리는 잠시 드레이코를 바라보았다. 드레이코는 자신의 일처럼 진지하게 생각해주고 있었다. 그가 홀로 대저택에서 자신을 도태시킬 때, 그를 발견해준 스승을 드레이코는 진심을 다해 걱정하고 있었다. 해리는 마음 속에서 깊이 그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다. 저와 학창시절 질긴 악연으로, 피를 튀기며 싸웠던 그가 제 반려와 아이들을 생각중이라는 것에 가슴이 짠해졌다. 해리는 거의 매일같이 이 대저택으로 드레이코를 만나러 오면서, 스네이프 때와 똑같이 미웠던 감정은 점점 스러져 제 안에서 없어져가는 것을 느꼈었다. 그리고 그건 드레이코도 마찬가지였다는 걸, 해리도 알았다.

“드레이코.”
“왜, 포터? ……잠깐, 너…?”

드레이코는 해리가 자신을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해리 포터의 목소리로 듣게 되는 드레이코라니. 드레이코의 동그랗게 커진 눈을 보고, 해리는 호그와트 급행열차에서 악수가 거절될 때의 열한 살 드레이코의 얼굴을 떠올렸다.

“퀴디치에서 이긴 보상, 네가 이겼지만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하, 그러려고 이러는거야? 포터, 역시 뻔뻔하….”
“우리 아이들 중에 한 명, 네가 대부가 되어줘. 괜찮죠, 세베루스?”

둘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던 스네이프가 피식, 웃었다. 해리가 먼저 드레이코를 제 아이의 대부로 생각할 정도인데 자신의 의사가 그리 중요할까? 스네이프도 해리가 또 다른 친구가 생기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드레이코에게도, 마찬가지로. 스네이프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이코는 입을 떡 벌렸다가, 천천히 멍하게 입을 오무렸다. 해리 포터와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아이의 대부라니, 내가? 그것도 해리 포터의 제안으로?

“어이가 없군…….”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포터든, 스네이프 교수이든. 그러나 제일 제정신이 아닌 것은 필시 드레이코 말포이였다. 해리와 스네이프의 아이를, 보지도 못한 그 아이에게 벌써부터 애틋한 감정이 생기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드레이코의 가슴 안에서 뜨거운 구들이 뭉클하게 굴러다녔다. 이렇게 행복하고 기쁘기만한 제안을 받아본 적이 언제였었는지도 가물했다. 만나보지도 못한 아이가, 저를 믿고 의지할 수 있게 좋은 대부가 되어주고 싶어졌다. 드레이코는 진심으로, 자신이 그렇게 되어주고 싶었다.

“좋아, 까짓 거, 해주지. 해리, 네 아이의 대부를.”

해리는 드레이코의 대답에 빙그레 미소지었다. 자신을 해리라고 불러주는 드레이코도 마음에 들었다. 해리가 불쑥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드레이코는 그 손을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열한 살, 그 때에 잡지 못한 손을, 이제서야 잡았다.

“고마워, 드레이코.”
“뭐, 그래.”
“뭐, 이제 계속 고민을 더 해볼까? 세베루스의 출산 시기가 애매하니까.”

드레이코는 손을 놓고, 끄덕였다. 아직 다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스네이프는 둘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던 것이 있었다. 드레이코, 스네이프 교수의 부름에 드레이코는 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대신할 마법약 교수로 적절한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 세브,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진작 사감 일로 고민할 때 얘기했었어야죠.”

해리가 당혹스러워 하며 말했다. 스네이프는 그런 해리를 매우 한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영문을 모르는 해리는 머릿속으로 물음표만 수십 개 띄웠다.

“슬리데린 출신이고, 마법약 재능도 특출나지. 내 말도 잘 듣는 편이고.”
“심지어 슬리데린이예요?! 근데 왜 얘기 안 했…! 아……!!”

해리가 깨달은 얼굴로 스네이프와 눈을 마주쳤다. 드레이코는 진작 스네이프의 설명이 가리키는 사람을 눈치챘다. 하, 바람빠지는 웃음을 내면서 드레이코가 스네이프를 쳐다보았다. 퀴디치 승부에서는 제가 이겼는데, 이 뻔뻔한 예비 부모들은 보상도 주지 않고 예비 대부에게 시킬 일이 많은 듯도 했다.

“와, 이 부부사기단……. 이러려고 나한테 접근한 거 아닌가? 그린고트에서?”

드레이코가 과장스럽게 양 손을 들고 으쓱거렸다. 스네이프는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은 해볼게요.”
“어차피 네가 하게 될거다, 드레이코.”
“이런, 해리를 닮아가시네요, 교수님.”
“끔찍한 농담은 됐고.”

스네이프의 말에 드레이코가 웃음이 터졌다. 해리는 뭐가 끔찍하냐고 제 반려의 팔을 두드렸고, 스네이프는 눈썹을 까딱 올렸다가 내렸다. 응접실에서는 그 후로도 몇 시간 더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느지막한 여름, 7월의 끝자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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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해리는 스네이프의 무릎 아래를,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그의 까만 머리카락이 제 목덜미를 간질이고, 그의 뜨거운 숨길에 아찔한 취기를 느끼며 눈가를 찡긋거렸다. 아이처럼 파고드는 그를 보호자처럼 안아 일으켰다. 무릎 아래의 손이 지팡이를 살짝 흔들어 문을 열었다. 처음 들어오는 낯설고 아름다운 방, 하얀 침구가 깔린, 그리운 호그와트가 생각나는 넓직한 사주식 침대. 스네이프를 그 위에 눕혔다. 제 처연한 연인은 떨어지기 싫다며 매달려왔다. 해리는 그를 달랬다. 취한 연인은 보다 더 솔직하고, 사랑스러웠다.

하얀 침구 위를 까맣게 물결치는 머리카락, 술에 먹혀 붉은 얼굴과 꿈을 꾸는듯한 몽롱한 시선이 해리를 사로잡았다. 해리는 그의 위로 올라가서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렸다. 그가 입고 있는 까맣고 얇은 셔츠가 구불구불 살결을 타고 흘러내렸다. 해리가 볼 때마다 감탄하는 눈부시도록 하얀 거죽, 마른 뼈대. 창백한 살결은 차라리 푸르다고 해야할 것이다. 날카롭고 삐죽한 그의 육체마저도, 그 자신이 세베루스 스네이프라는 것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는, 그의 정체성으로 빚어져 있는 것 같았다. 해리는 그것에 늘 놀라워하고, 감탄했다.

해리의 큰 손바닥이 마른 배를 더듬었다. 미끄러져 내려가 잘록한 허리를 쓸고, 위로 다시 올라와 작은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걸었다. 스네이프는 그 모든 자극마다 반응하려고 했다. 한 달만이었다. 스네이프는 너무 오래 참았다. 제 위에 올라타 제 몸을 쓰다듬는 해리를 맹목적으로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말라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축였다. 스네이프는 자신의 아래가 젖는 걸 느꼈다.

“해리…….”
“응, 세베루스.”
“해리, 나…….”

해리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이 안온하고 다정했다. 스네이프의 목소리는 숨결 앞의 작은 꽃잎처럼 떨렸다. 해리는 이 순간 어쩐지 첫 관계의 날을 떠올렸다. 조심스럽고, 이른 오후인데도 촉촉했고, 가슴이 잔잔하고도 빠르게 뛰었던 그 행복한 순간을 상기했다.

스네이프가 자신의 손을 내려, 제 마른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해리는 그 모습을 살짝 웃으며 바라봤다. 먼저 스스로 제 것을 만지려나 싶어, 그의 흥분이 귀여웠다. 스네이프는 제 다리 사일 더듬더니 허벅지를 모아 좁혔다. 동그래진 눈이 해리를 보았다. 언뜻, 술에 깬 것도 같아 해리는 그와 다정히 시선을 맞췄다.

“해리…… 나, 나 밑을, 벗겨줘…….”

기꺼운 요구였다. 해리는 스네이프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이어 드러난 하얀 속옷이 어쩐지 질척하게 밀착 되어 보였다. 벌써 쿠퍼액을 이만큼 흘렸다니, 해리는 스네이프의 배꼽 밑에 입 맞추며 찬찬히 웃고, 속옷을 내렸다. 자연스레 드러난 스네이프의 성기의 끝은, 그러나 예상 외로 덜 젖어 있었다. 해리는 의아함을 느꼈다. 허벅지에 내린 속옷에는 분명히 스네이프의 다리 사이와 길게 이어지는 맑은 액이 보였다.

해리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이어 입이 벌어지고 눈이 커졌다. 살로 덮여 있어야 할, 스네이프의 음낭과 항문의 사이 회음부에 새로운 여성기가 생겨 있었다. 젖은 액은 거기에서 질퍽히 흐르고 있었다.

“세베루스, 나한테 말도 없이…….”

마법을 성공시킨 것을, 왜 진작 저에게 말하지 않았냐는 타박이었다. 스네이프는 겁을 집어먹은 눈이었다. 그 자신조차 마법이 성공한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해리는 그런 스네이프에, 녹색 눈을 맞췄다. 자신의 눈을 보면 편안해하는 스네이프를 알고 있었다. 태어나 가져본 적 없는 새로운 생식기에,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이 안타깝고, 어쩔 도리 없이 사랑스러웠다.

해리는 생각할 것 없이 그의 다리 사이에 코를 박았다. 혀를 내어 젖은 새 음부에 밀어 넣어봤다. 무릎을 세운 스네이프가 아으, 아, 당황한 신음을 토하고 다리를 펄쩍거렸다. 해리의 코와 입술, 턱 주변으로 스네이프가 흘린 애액이 묻었다. 부드럽고 촉촉한 새 음부는, 줄곧 탐했던 뒷구멍과 다르게 애초부터 성교를 위해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믿을 수 없게 부드럽고, 젖어 있었다.

“하, 흐으…. 생겼어…?”
“네, 생겼어요. 만져봐요.”

젖은 입주변을 소매로 대충 훔쳤다. 해리는 스네이프의 오른손을 잡아 미끌거리는 음부에 놓았다. 제 침과 스네이프의 애액으로 아래가 온통 투명하게 번들거렸다. 스네이프의 손끝이 녹은 얼음 위처럼 미끄러졌다.

“이상해…….”

겁먹은, 그러나 호기심 어린 소년처럼 스네이프는 새로운 자신의 육체를 탐구했다. 스네이프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여성기의 아래 위를 문질렀다. 음핵에 엄지를 얹고 굴리자, 절로 다리가 벌어지며 입술이 열렸다. 해리는 제 앞에서, 다리를 쫙 벌리고 여성기로 자위중인 스네이프에 성기 끝이 아릿하게 아팠다.

“해리, 나, 임신하고 싶어….”

눈이 풀린 채, 음핵을 문지르며 스네이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해리는 드레이코의 앞에서도 그랬지만, ‘임신하고 싶다’는 문장의 파급력이 이렇게 큰 줄은 처음 알았다. 스네이프의 입에서, 스네이프의 목소리로, 스네이프의 의지로 말해서 그런걸까. 이미 해리는 흥분이 고통에 가까웠다. 이렇게 많은 물로 젖어 있으니, 넣어도 되지 않을까? 해리가 손가락 두 개를 질구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뒤와 다르게 너무 부드러운 삽입이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스네이프가 다리를 벌린 채 자위하는 걸 내려다보며, 해리는 머리 위로 티셔츠를 벗었다. 해리가 벗는 모습을 바라보는 스네이프의 손가락이 빨라져갔다. 하읏, 흐으…. 흥분한 숨을 흘리면서 노골적인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독하게 솔직한 스네이프였다. 그의 욕망이 눈에 보이게 넘실거려서 해리는 웃었다. 해리의 바지와 속옷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스네이프의 오금을 잡아 허공으로 처들었다. 녹색 눈과 검은 눈은 서로에게서 시선을 뗄 줄을 몰랐다. 스네이프의 다리를 들어 잡은 자세 그대로, 해리가 삽입을 시도했다. 처음 들어가보는 곳이었다. 원래부터 거기에 있어 자신을 맞아들였던 것마냥, 새로운 음부는 해리를 쉽게 받아들였다. 해리는 삽입하는 내내, 스네이프를 바라보았다. 스네이프는 제 음부보다 해리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황홀하게 저를 보는 그 표정이, 귀두가 입구에 걸렸을 때 찡그린 눈가가, 묵직한 삽입에 빠듯이 조여오는 좁은 안쪽이, 떨리는 가느다란 두 다리가 해리를 미치게 했다.

“진짜 좁다…….”

목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내벽이 성기를 끊을듯이 압박해서 숨이 부족했다. 해리는 벌써 땀이 맺혀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꼭 취한 제 연인처럼 얼굴이 붉어져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첫 삽입에도 스네이프는 버틸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좁은 구멍 안 쪽 어딘가에 정말로 자궁이 있는 걸까? 해리는 스네이프의 밋밋한 배를 바라보았다. 저 배가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는 걸 상상했다. 하, 젠장. 해리는 너무 흥분했다. 허리 아래의 움직임이 성급해지기 시작했다.

“앗…. 어…? 으응……흐, 으응, 아-”

평소와 다른 곳이 쑤셔지는 느낌에, 스네이프는 살짝 놀랐다. 하지만 제 안을 꽉 채우는 해리의 것에, 금세 물을 질질 흘려보내며 잔뜩 달아올랐다. 흥분할 때마다 분비되는 애액에 시트가 푹 젖어들었다. 말포이가, 당신이 자기 집 침대에, 소변 봤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예요? 척척한 시트에 해리의 무릎이 닿였다. 박으면서 해리는 연인을 짓궂게 놀렸다. 스네이프는 너무나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세게 도리질 쳤다. 물론, 해리가 남이 보도록 둘의 정사 흔적을 남겨놓을 리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창피했다. 해리의 상체가 앞으로 내려와 스네이프의 귓가에 얼굴을 기대고 허릿짓을 했다. 세브, 진짜 물 많다…. 아래서, 질척이는 소리 들려요? 응? 해리가 속삭이는 말들에 정신이 아찔아찔했다.

해리의 것이 귀두 밑까지 빠져 나갔다가, 뿌리의 조금 더 앞까지 스네이프의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이 구멍은 좁고, 길이 짧았다. 반려의 안쪽이 다칠까, 해리는 뿌리까지 박아넣는 건 본능적으로 피했다.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스네이프의 내장에 손상을 입혔다간, 제 욕심에 남성인 그에게 아이를 요구해놓고 상처까지 입혔다간……. 해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스네이프에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론에서 스네이프에게 계속 자기희생, 헌신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 그의 전쟁영웅 타이틀을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해리는 정말로 자신에 한해서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이렇게 자기 몸을 바치는 헌신을 목도할 때면, 참을 수 없게 그가 사랑스럽고, 또 너무 미안했다.

“세베루스,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당신을….”

감정이 넘실거렸다.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한 것을 스네이프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자신의 이 마음은 사랑보다도 더 컸고, 아득히 깊었다. 스네이프가 해리의 등을 끌어 안았다. 한 몸처럼 맞붙은 이 느낌이 좋았다. 어떻게 2주나 되는 시간동안 해리와 떨어져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도…. 너를 너무, 사랑해, 해리….”
“응, 알아요. 알고 있어요….”
“알아…? 아니, 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 아… 사랑, 하는지…… 너는 모를 거야, 해리….”

스네이프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해리를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었다. 불가능도 전부 가능으로 바꿔서 해낼 것이었다. 그를 위해 저의 마법적인 능력, 자기자신, 모든 걸 이용해도 좋았다. 해리를 위해 존재하는 게 기뻤다. 나는, 너의 것이니까, 해리 포터. 스네이프는 해리의 등을 안고 어깨에 이마를 비비면서, 해리의 체온을 느꼈다.


다음날 아침, 7시가 되기 몇 분 전에 해리는 눈을 떴다. 스네이프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해리는 얼룩진 시트 부분에 지팡이를 대고 흔적을 지웠다. 연인의 다 벗은 몸에 감긴 이불을 다시 제대로 덮어주었다. 해리는 옷을 입으면서 그를 내려다 보았다. 스네이프가 간밤에 여러 번, 임신을 시켜달라고 보채며 울었던 게 생각났다. 취해서 그런지, 그는 그런 말을 쉽게도 내뱉었다. 마주 보며 누워서, 마주 보고 올라타 앉아서, 엉덩이만 치켜 올린 채 뒤로 고개를 돌려서 저를 바라보며, 스네이프는 끊임없이 사정을 요구하고 젖은 구멍을 벌렸다. 물론, 지칠 때까지 그를 몰아 붙이면서도 해리 역시 자제를 몰랐다. 야하고 아름다운 그를 앞에 두고 적당히를 찾는 게 어려웠다. 해리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방 문을 나섰다.

응접실은 집요정이 치워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해리는 크리처를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어차피 자신도 호그와트로 가게 되니, 크리처를 굳이 데려올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 때, 해리가 나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말포이가의 집요정이 갑작스레 뿅, 하고 나타났다. 이 집에 머글의 cctv 같은 게 달린 건 아니겠지……. 해리는 스네이프와의 밤을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드레이코가 싫긴 하지만, 관음증은 없을 것이다.

“포터 씨, 따로 아침을 내드릴까요? 아니면, 드레이코 도련님께서는 늘 7시 30분에 아침식사를 드십니다.”

드레이코와 대화를 하는 편이 좋았다. 해리는 스네이프를 깨워 같이 먹겠다는 대답을 했다. 집요정은 끄덕이더니 드레이코의 방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어 오라는 드레이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리는 새삼 여기가 드레이코의 방에 딸린 개인 응접실인 게 생각났다. 부내가 철철 흘러 넘치는군. 제 어린시절의 벽장이 지금 해리가 앉아있는 암녹색 카우치만 했던 것 같았다.

문이 열렸다. 얇은 회색 실크가운을 입은 드레이코가 집요정의 뒤에서 머리를 쓸어넘기며 해리를 보았다. 어딜 봐도 그는 권태로운 귀족의 도련님이었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유치해 보이는 것도 없고, 이 대저택에 어울리는 품새였다. 짜증나네…. 해리는 팔짱을 끼고 드레이코를 노려봤다. 스네이프에게 언감생심 품었다간, 영웅의 이름을 앞세워 아즈카반에 처넣어 버려야지. 그제야 해리의 입꼬리가 만족스레 올라갔다.

“교수님은 주무시나?”
“그래. 피곤할테니.”

해리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드레이코는 해리의 저 빤질한 낯짝에 홍차를 한 번 부어보고 싶었다. 어젯밤처럼 1인소파에 앉으며 드레이코가 집요정에게 손짓을 했다. 알아 들었는지 집요정은 따듯한 물을 따라 주인과 손님의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는 모양으로, 허리를 공손히 굽힌 뒤 사라졌다.

“궁금한 게 있는데, 포터.”
“뭐지?”

컵을 들어 물을 들이키며 해리가 흘깃거렸다. 드레이코는 심상한 투로 물었다.

“교수님이 정말로 임신이 가능한 것 같던데. 내 생각이 맞지 않나?”
“…….”

대번에 험악해진 해리의 표정을 보고서도 드레이코는 굽히지 않고 시선을 마주했다. 해리는 짜증스레 컵을 내려놓고, 다시 팔짱을 꼈다.

“네가 교수님에게 요구했다는 게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아서.”
“밤새 안 자고 그 생각만 한 건 아니겠지? 말포이. 이 집에 방음마법이 걸려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데.”
“물론, 걸려 있어 포터. 어제 교수님이 취해서 하신 말씀 중에 들은 거야. 분명치 않은 발음이라 헷갈렸거든. 그런데 뭐…… 어제 그 모습을 보니.”

드레이코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야릇한 교수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매가 올라갔다.

“교수님은 남자인데, 어떻게 한거지?”
“마법사가 마법을 부렸겠지, 뭘 어떻게 하겠냐?”
“미친놈. 교수님이 한번에 동의 하셨을리 없는 일을. 자랑인가?”
“우리 일에 관심 꺼, 말포이. 세베루스는 내게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하니까.”

드레이코가 역겹다는 얼굴로 해리를 흘겼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물 컵을 내려놓고, 턱 밑에 손등을 괴었다. 그런 쪽으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자신의 기숙사 사감인데, 저 해리 포터가 어떻게 알고 이렇게 그를 꿰찼는지, 솔직히 욕심이 났다. 어쩌면 해리 포터를 그렇게 사랑하는 눈으로 보는 교수의 존재가 부러웠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옆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으니까.

“이해가 안 가. 왜 세베루스가 네게 자기 과거를 얘기해준거지?”
“아끼는 제자라서 그런거겠지, 포터.”
“입 닥쳐, 말포이.”

오랜만에 뱉어보는 말이었다. 그에, 해리도 드레이코도 짤막히 웃음이 터졌다. 둘 사이에 어떤 유해한 공기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뭐, 내가 생각하기엔…… 스네이프 교수님이 내가 전쟁 이후로 혼자 박혀있는 모습을, 몹시 못마땅해 하시는데. 아무래도 지금 내 모습에서 교수님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시는 것 같아.”
“널 위로해주기 위해서라고?”

그건 더 마음에 안 드는 이유지만, 해리는 그냥 한숨만 한 번 쉬고 말았다. 드레이코 말포이를 싫어하고 한심해하긴 해도, 자신이 그를 진짜 아즈카반에 넣고 싶을 만큼 싫어하냐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말포이가가 보석금으로 풀려났다고 했을 때도 해리는 루시우스는 몰라도 드레이코는 다행이라고 지나가듯이 생각했을 정도였다.

해리는 머틀의 화장실에서 울고 있던 드레이코를 떠올렸다. 덤블도어의 앞에서 사시나무처럼 떨며, 살인 저주를 결코 입에 올리지 못하던 나약한 모습도, 악마의 화염에 불타는 필요의 방에서 제게 구조를 바라며 간절히 올려다 보던 얼굴 역시. 그리고 지금도 나약한 정신으로 이 대저택에 저를 혼자 가두고 있는 드레이코 말포이였다.

“그리고 내게 네 얘기를 하기 위해서도, 교수님께선 당신의 과거 이야기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신 거 같아. 나도 들었어, 포터… 그 ‘예언’……. 교수님이 처음 듣고, 어둠의 주인에게 전달했던 거라고….”

해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스네이프가 예언을 듣고, 볼드모트는 예언이 가리키는 아이가 저라고 생각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그리고 제 부모를 죽이고, 자신은 죽이지 못했다.

“교수님은…… 네 부모가 죽은 게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셨어. 그래서 포터 네게 가족을 꼭 만들어줘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으신 것 같…….”
“입 닥쳐라, 드레이코 말포이.”

흠칫 놀란 드레이코와 해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시무시하게 화난 얼굴의 스네이프가 서있었다. 낭패를 느끼며 드레이코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꾹 물었다. 해리는 마음이 아팠다. 제게 죄책감을 가진 스네이프를 쳐다보기가 아플 정도로. 단순 죄책감만으로, 의무감으로 제 아이를 임신하겠다는 건 아닐테지만 스네이프가 정말로 그런 마음도 갖고 있을 거라는 걸, 이제 해리는 알았다.

스네이프는 둘의 뒤에서 주먹을 움켜쥐고 떨었다. 해리의 숙여진 뒤통수에서 저에 대한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런 감정을 해리가 느끼라고 자신이 노력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포터, 정말로 네 아이를……. 아니, ‘우리’의 아이를 원했다. 남자인 자신이 임신을 각오하는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동반되는 것이었다. 스네이프는 간밤의 기억이 흐릿하지만 분명한 건, 제가 노골적으로 임신을 원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걸 자신이 의무라고만 여겨서 해리에게 재촉한 게 아님을, 해리는 알아주어야…….

스네이프는 드레이코를 한 번 힐끗거렸다. 천천히 해리에게로 다가가 옆에 앉았다. 해리가 크고 따듯한 손으로 제 찬 손을 잡아 쥐었다. 드레이코에게 들리지 않게 해리가 고개를 숙였다. 스네이프의 귀를 찾아서 조그맣게 속삭였다.

“신경쓰지 말아요. 말포이 쟤가 뭘 알겠어요? 우리가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아이를 원하는지 몰라서 하는 말이지.”

스네이프는 해리가 저에 대한 연민을 티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위로하려 이렇게 말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제 과오는 모른척해주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만 덮으려 하는 연인이었다. 해리의 가족을 잃게한 것이 자신이라는 죄의식. 이 죄책감이 스네이프에게서 완전히 사라질 일은 없었다. 그래도, 스네이프도 해리의 옆에서는 오직 이게 서로의 사랑때문에 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하는 척 하기로 했다. 해리가 그러길 원할 것 같았다.


“그 상처가 아직도 있다고?”

이름 모를 외국의 스프를 숟가락으로 뜨던 해리가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생각도 못했는데, 드레이코의 몸에는 제가 쏜 섹튬셈프라에 베인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다고 말했다. 지난 저녁, 저주 주문의 상처 치료약을 개발중이라는 드레이코의 말만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싶었던 일이었다. 제가 실수로 날린 저주 주문이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흉이 남았을 줄은, 해리는 뒤늦은 죄책감에 목이 막혔다.

혼혈왕자, 스네이프의 교과서에 ‘적에게 사용’이라는 설명이 적힌 주문이었다. 그 주문을 날리고, 피웅덩이에 쓰러져 있는 드레이코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해리는 이기적이게도 스네이프가 그를 잘 보살폈겠거니 했다. 본인의 잘못에서 회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저질러놓고 도망쳐버렸던 자신의 과오가, 지금 이 순간 해리의 뒤통수로 강한 둔통을 일으켰다. 해리는 아침식사 전, 스네이프의 과오로 죽어버린 제 부모의 얘기를 들었다. 그랬는데, 제가 이런 잘못을 짓고 줄곧 몰라왔던 것을 이제야 알았다.

해리가 숟가락을 스프에 내려놓았다. 야채 건더기가 떠다니는 스프에 수저의 머리가 깊이 빠져 들었다.

“……미안, 말포이. 전혀 몰랐어.”

거만한 눈으로 해리를 보던 드레이코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과 따위로 네 저주의 흔적이 사라지진 않지, 포터. 드레이코다운 가벼운 빈정거림이었다. 하지만 해리는 드레이코가 몸에 남은 상처만큼, 마음으론 그 일에 깊게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드레이코를 진정 외롭게 하고, 고통 속으로 몰아가는 상처는 자기 자신이 저지른 과오였다.

“어차피 내 몸에 흉터가 있든 말든, 몸을 봐줄 애인도 없고 말야. 너처럼, 포터.”
“그 애인이 지금 우리 앞에 앉아있는 교수님인데, 말포이.”
“아, 이런. 실례했어요, 교수님.”

눈썹을 으쓱인 드레이코가 크큭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제 앞에 해리와 스네이프를 앉히고 식사를 하고 있는 것도 우스웠고, 이 셋이 앉아 있는데 편안한 분위기인 것도 말이 되지 않게 느껴졌다.

“포터, 오러는 관뒀다며?”
“방구석 도련님이 소식통은 빠삭하시군.”
“그 소식통이 우리 앞에 앉아 있는 교수님이라서.”
“포터, 드레이코. 재미있나, 지금?”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스네이프가 입을 열었다. 학창시절 기싸움을 벌이던 두 제자들이 이제는 합심해서 저를 골리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저 둘이 합이 맞는 친구였다고. 그러나 성정들을 보았을 때, 충분히 그들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뭐, 하여튼. 맞아, 말포이. 오러 일을 관두고 호그와트 교수를 준비중이야. 다시 공부 하려니까 머린 좀 아프더라.”
“잘 다니던 직장을 왜? 설마 포터, 교수님 옆에 있으려고 그런 건 아니겠지.”

벌써 정답을 알아버린 드레이코가 넌덜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리는 뿌듯한 얼굴이었다. 스네이프는 고개를 젓고, 제 몫의 식사에만 관심을 두기로 했다.

“열아홉 살 교수라니, 어지간히 무시 받겠는데?”

드레이코가 입꼬리를 올려 비웃었다. 해리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스네이프 쪽을 돌아보았다.

“세베루스, 첫 부임에 무시 당했나요? 당신, 스물두 살이었잖아요.”

드레이코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고보니, 눈 앞의 스네이프 교수의 첫 부임 시기도 굉장히 일렀다. 학창시절에 집단 괴롭힘을 당했었다는 말 또한 생각났다. 그 당시를 기억하는 학생들이 제자가 됐을 터인데…….

스네이프는 자신의 과거가 주제가 되는 상황이 불편스러웠다. 정말이지, 이 인생은 스스로 평가해봐도 마음에 드는 역사가 없군. 그것도 식사를 먹다가 나누기에는 적절치 않은, 술자리 안주감으로도 입맛을 떨어지게 하는 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일 것이다. 해리는 스네이프의 표정을 보고 얼굴을 한 번 더 굳혔다. 저 표정이 이미 질문의 답을 하고 있었다. 볼드모트가 종적을 감춘지 불과 몇 달만에 호그와트의 교수로 등장한 어린 데스 이터, 세베루스 스네이프……. 알버스 덤블도어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무조건적 변호가 있었다지만, 해리 역시 스네이프의 기억을 보기 전까진 그의 진실을 오해했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얼마나 심했을지 감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의심과 분노의 굴절이 어린 교수에게로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릴리의 죽음 앞에, 그 모든 비난은 스네이프에게 어떤 생채기도 내지 못했을 것이란 것도…….

“듣고 싶은 얘기가 뭐지? 포터, 드레이코. 스물두 살의 전 데스 이터, 학교를 다닐 땐 동급생들에게 괴롭힘 당하던 찌질하고 기름진 교수가 저보다 겨우 너다섯살 어린 학생들에게 어떤 멸시와 조롱을 들었는지?”

해리는 치아를 꽉 물고 화와 슬픔을 참았다. 스네이프가 잘못을 저지른 범죄자인 건 맞았다. 하지만 그가 피해자였던 것으로 조롱 당하는 분위기까지는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심지어 그 괴롭힘의 주동자가 자신의 아버지이고 사랑하는 대부 시리우스 블랙이라는 것도.

“그 어린 학생놈들이 날 괴롭히고, 놀리고 싶어해봤자 네 아빠와 친구들에 비해선 발톱의 때만큼도 못한 수준이었고, 난 그 당시 그것은 신경도 안 쓰일 정도로 무너져 있었으니…… 쓸데없이 뒤늦은 동정 품지마, 포터.”

스네이프는 차갑게 일갈했다. 해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드레이코는 그 둘의 지독하게 얽힌 고리에 인상을 썼다. 악연도 저런 악연이 없지 싶었다. 어쩌다 해리 포터와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게 된건지─

“하아, 죄송해요 교수님. 미안, 포터. 이런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널 놀리는 것도 교수님 앞에선 자중해야겠네.”

드레이코가 불쑥 꺼낸 말로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했다. 드레이코가 이런 노력을 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눈앞의 연인은 일견 서먹해보였다. 어젯밤, 밤새 뭔 짓을 했을지 남의 눈에 다 보이게 들어가 놓고서. 우스운 아침이었다.

“미안해요, 세베루스. 앞으로 과거 얘기 같은 건 묻지 않을게요. 다 지나간 일이니까.”

스네이프는 해리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스네이프는 해리가 저를 살린 이후의 삶에 집중하길 바랐다. 자신의 과거, 과오를 기억하고 신경써야 하는 건 오직 저 혼자만의 일이어야 했다. 자신의 구원자가 저의 무게가 아닌 것을 짊어져서는 안 되었다. 예언도, 본인의 가족을 잃은 것도, 그의 아버지와 대부가 저지른 잘못도,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저지른 모든 죄들도 모두 해리의 탓이 아니었다. 해리가 말했듯이, 모두 지나간 일이기도 했다. 이제 바꿀 수가 없는 과거였다. 그리고, 스네이프는 새삼 깨달았다. 미래에서 와서 자신의 목숨을 살린 해리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건지 새삼 알게 되었다. 해리는…… 바꿀 수 있었다. 그 위대한 영웅은 그럴 수 있었다. 세베루스 스네이프에게 두번째 삶을 주고, 첫번째의 삶과 완전히 바꿔줄 수 있었다.


“다음에 ‘또’ 오지, 말포이.”
“나는 교수님을 초대한 건데, 포터?”
“그래서 온다는 거야, 말포이. 이 정신 나가게 넓은 집에 혼자서만 박혀 있으니까 뇌가 잘 안 돌아가나본데. 그래서야 마법약 개발이 되겠냐 싶어 내 애인이 널 도와준다는 거니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지.”
“하, 백수라 시간이 넘쳐나니 여기저기 간섭할 시간도 넘쳐나는군, 포터. 너 같은 무식한 놈이 들어와서 내 마법약 연구실의 기운을 흐려놓으면 어떻게 책임질거지?”
“나보다 더 오래 된 백수라서 넘쳐나는 시간에 대한 이해도는 높구나, 말포이.”

스네이프는 저 둘이 계속 이런 대화를 나눌 거면, 굳이 정원을 함께 걸어 대문까지 올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오전에, 대저택의 아름답고 푸릇한 정원에서 두 청년은 하늘로 언성을 드높였다. 금방이라도 열한 살 꼬마들로 돌아가 서로에게 지팡이를 겨눌 태세라, 스네이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핀도르고 슬리데린이고 각자 점수를 깎아버리고 싶었다. (어느 쪽 기숙사의 점수를 더 많이 깎아버릴지에 대한 갈등은 조금 있었다.)

“포터, 그냥 여긴 앞으로도 나 혼자 오겠다.”
“무슨 소리예요, 세베루스! 저 자식의 어딜 믿고 당신을 혼자 보내요?”

드레이코는 그저 자신의 제자─ 이런 소리가 해리에게 씨알도 먹힐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한숨만 한 번 쉬고 말았다. 이어 스네이프가 지팡이를 부드럽게 휘둘러 육중한 검은 대문을 열었다. 해리도 뒤따라 문 밖으로 나왔다. 방금까지 소릴 높여가며 싸운 것이 무색하게, 스네이프의 두 제자는 뻔뻔스런 시선을 교환했다.

“다음 번엔 내 셔츠값 50갈레온과 함께 와라, 포터.”
“말포이, 다음엔 값 싸고 질 좋은 옷가게의 명함과 함께 찾아오지. 아무래도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을 상대로 한 사기범죄에 연루된 것 같은데, 전직 오러로서 널 도와줄게.”
“그것 참 고마운데, 조언을 할 거면 10갈레온을 더 내. 네 형편 많이 봐준 거야, 포터. 그럼, 안녕히 가세요 스네이프 교수님. 포터가 속 썩이면 절 찾아오시고.”
“세베루스, 말포이가 졸린지 헛소릴 지껄이네요. 잘 수 있도록 얼른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둘이서 경쟁적으로 대화를 쏟아냈다. 스네이프는 표정 없이 그들을 보다가 드레이코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가지, 포터. 그 작은 목소리에도 해리는 바로 팔짱을 끼며 치아를 드러내고 웃었다. 드레이코는 못마땅하게 해리를 보았지만, 이내 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드레이코는 어깨를 으쓱하며 저택의 안으로 순간이동했다. 모처럼 소란스러운 밤과 아침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빙그레 미소 지었다.

집 거실로 순간이동한 해리와 스네이프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급격히 서로의 얼굴이 굳어감을 느꼈다. 드레이코의 앞에서는 투닥대고, 빈정대며 평소와 같은 티를 냈었지만, 둘 다 속으로는 아침의 대화들을 신경쓰고 있었음을 서로 알아채었다.

해리는 베란다로 가서 난간에 팔을 올렸다. 담배는 피운 적 없는데, 꼭 이런 기분에는 그런 게 어울릴 것 같았다. 해리는 멍하니 담배연기 대신에 한숨을 내쉬었다. 스네이프는 그런 해리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해리에게 무게를 지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해리 포터가 자신의 애인이랍시고, 제 죄의 무게까지 얹으려는 오만은 스네이프도 사양이었다. 따지자면 자신이 데스 이터였던 것이, 어떤 것에서든 최악의 이유였다. 힘을 얻고자 했던 과욕이 불러온 재앙이었다. 예언도, 릴리의 죽음도, 호그와트로 다시 돌아오고나서의 모든 비난과 멸시와 조롱도.

“세베루스. 이리 와봐요.”

그렇지만 이렇게, 단 둘만이 남은 상황에서, 해리가 자신을 불러 세우는 이 순간에는 스네이프는 두려움에 떨었다. 해리에게서 무슨 소리를 듣게 될까, 두려움에 눈꺼풀이 꽉 닫혔다가 겨우 떠졌다. 그렇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세베루스 스네이프는, 해리 포터가 부르면 이끌려갈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해리가 손가락으로 꽃 화분이 가득한 카페를 가리켰다. 일전에 스네이프가 제 취향이라며 초면에 집적거리던 머글 사장이 있던 카페였다. 그 후로 그 쪽 길로는 발길도 끊은 스네이프였다.

“저 가게 사장 이름, 시리우스더라고요. 알았어요?”
“…응.”
“그래서 저길 박차고 나온 거였어요? 가게 안에서의 추행은 없었는데?”
“포터,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기억도 지운 머글에게 보복하려고 다시 갔던 건가?”

스네이프는 베란다의 난간에 팔을 걸친 해리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안경 뒤의 가라앉은 녹색 눈, 평소와 다른 조용한 분위기에 마음이 스산해졌다. 스네이프는 괜스레 주먹을 꾹 쥐었다 놓았다.

“그 날 제가 카페 앞에 도착했을 땐, 론이 사장을 가게 안으로 데려가서 제대로 얼굴도 못봤으니까…. 당신에게 관심있다고 손목까지 잡은 놈을, 내가 그냥은 못 두죠.”
“……어떻게 했는데?”

열여덟 살의 질투에 눈이 먼 오러가, 이미 기억을 지운 머글에게 정말로 상해를 입혔을까. 스네이프는 해리가 정말로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마법부가 그 사실을 모르게만 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는 여전히 이렇게 인성이 돼먹지 못했다. 제게 소중한 것들만 눈에 보였다.

“…아무 짓도 안했어요.”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얼굴의 해리가 중얼거렸다.

“그 사람 이름을 듣는 순간…… 아무 것도 못하겠더라고요.”
“하, 네 대부랑 이름이 같아서 전의를 상실했나 보지?”

스네이프가 조소를 흘렸다. 해리 포터가 그 이름마저 아끼고 사랑하는 대부이니 그럴만 했다. 하지만 해리는 스네이프의 비웃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 녹색 눈은 습하고 어두웠다.

“아니요. 또 다시 같은 이름의 사람이 당신을 괴롭혔다는 생각에.”
“…….”

스네이프는 왜 그 순간, 자신이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눈물이 전조도 없이 턱 밑으로 흘러 내렸다. 순식간에 온 얼굴을 덮는 눈물을 손으로 가리려 애쓰며 스네이프는 울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제 몸에선 제 의지가 아닌 눈물이 미친듯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과거에 매여있는 자신이 한심하고 억울해서였는지, 해리가 저를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에 어리석게도 감동 받아서였는지 스네이프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이처럼 꺽꺽대며 울었다. 아무도 그 일로 자신을 안아준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지워지는 일들만 목도해왔다. 그리고 자신도 그 중 하나였다. 펜시브에 기억을 덜면서 제 인생에서 삭제시키고 싶은 일이었다.

해리는 제 앞에서 눈물을 쏟아내는 스네이프를, 차마 안지도 못하고, 안쓰럽게 바라보기만 했다. 해리 자신도 제가 느끼는 이 감정들과 생각을 가지런히 정렬할 수 없었다. 제 소중한 사람이, 또 다른 소중한 사람에게 지우지 못할 큰 상처를 줬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기도 하고 미워하고 싶기도 했다.

“저도…… 마법세계에서는 마치 제가 숭고한 영웅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리지만…… 드레이코 말포이에겐 낫지 않는 저주를 날려 놓고, 피를 쏟는 꼴을 보고도 두려워서 회피하고, 여태 그 일로 걔가 얼마나 다쳤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살아왔어요. 내가 여전히 사랑하는 아빠나 시리우스를, 당신을 괴롭혔다고 대놓고 미워할 수도 없어요. 그리고 저는 예언을 듣고 볼드모트에게 말한 당신도 미워하지 않아요. 그 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든 지나간 과거니까. 이미 끝났으니까. 세베루스, 사람이 어떻게 한 가지 면만 존재해요? 나도 좋은 놈은 아니예요. 나 때문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렇지만 나는 내가 살린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사는 이기적인 놈이라고요…….”

해리의 말은 거짓이었다. 해리는 제 탓이 아닌 죽음까지도 저의 탓으로 몰아넣고, 이렇게 자신에게 책임을 뒀다. 그 죽음들에 눈 돌리지 못하면서 이기적을 운운하는 해리가 우스웠다. 스네이프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해리의 앞으로 발을 움직였다. 해리는 그제서야 스네이프의 몸에 손댈 수 있었다. 스네이프의 허리를 안고, 어깨에 턱을 얹고 해리는 연인을 토닥였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품에서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미안해…. 내가 네 가족을 잃게 해서, 그리고 그 때문에 꼭 내가 네 아일 낳아주고 싶었어…. 그렇지만 처음에 내가 그런 마음이 든 건, 내가 해리 너를 사랑하니ㄲ…….”

스네이프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해리가 스네이프에게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순간 그 행위가 입을 막는 것처럼 느껴졌다가도, 이 다정한 온도에 스네이프도 모를 수가 없었다. 해리는 다 알고 있구나.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구나. 스네이프는 해리의 등의 옷깃을 꼭 쥐고 안겼다. 부드러운 입맞춤에 그냥 자신을 맡겼다. 언제나 자신을 구원해주는 저의 영웅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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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해리는 다급하지만 잔뜩 굳은 얼굴로 말포이 저택으로 들어섰다. 집요정이 현관 홀에 해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로브를 달라고 내미는 집요정의 작은 손을 무시하면서 해리는 스네이프를 찾았다. 대리석 바닥에 구둣발의 소리가 시끄럽게 부딪쳤다. 집 구조도 모르면서 성큼성큼 앞서나가는 해리에 집요정이 꽥꽥거리며 막았다. 드레이코 도련님의 개인 응접실로 손님을 모셨다고 소리쳤다. 해리는 안내하라고 약간 커진 언성으로 말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기에 최대한 냉정을 찾은 것이었다.

부엌의 식탁에 앉아서 얼굴만 감싸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렇게 행선지에 대한 말도 없이 저를 두고 가버리는 스네이프의 행동에 해리는 기가 막혔다. 제가 뭐, 그에게 마음에 안 들게 한 것이 있다면 이 정도로 억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해리 포터는 무려 한 달을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충직한 개처럼 굴었다. 그가 섹스를 금했을 때, 그렇게 해주었다. 몸을 건들지도 말라고 했을 때도 결국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시킨 대로 다했더니, 돌아오는 행동은 저를 무시하는 스네이프였다. 창으로 날아든 드레이코 말포이가 보낸 부엉이였다.

기가 막혔다. 이 시간에 절 두고 찾은 곳이 드레이코 말포이의 집이라니. 말포이를 만나러 나간 것이었다니! 그린고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는 제자와 스네이프가 느닷없이 저녁의 만남을 가졌을 리 없었다. 해리는 헤르메스가 요즘 부쩍 바깥과 집을 오간다고 생각했다. 사냥하느라 바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스네이프가 드레이코와 저 몰래 연락을 주고 받았다 생각하면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에 핏발이 서는 느낌이었다.

벌써 열한 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부엉이가 말포이 저택에서 자신의 집으로 날아오는 시간까지를 감안하더라도 스네이프는 이 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 해리는 정말 피가 말라 죽는 줄 알았다. 스네이프를 찾아나서지 않은 이유는 제 반려를 믿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믿지 못해서였는지 알 수 없었다. 스네이프를 찾았을 때 뭘 보게될 지 해리는 두려웠다.

“말포이……!!”

응접실 입구 쪽에 나와 있던 드레이코의 멱살을 잡아챘다. 드레이코는 미간을 찡그리며 해리의 면상을 쳐다 보았다. 도도한 도련님의 태도는 해리의 화를 더욱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세베루스는 어디─”

고개를 돌린 곳에 스네이프가 있었다. 암녹색 벨벳 카우치에 쓰러져 누운 채였다. 해리는 당장에 드레이코를 밀쳐내고 스네이프의 앞으로 달려갔다. 화났던 마음은 순식간에 가라앉아 걱정밖에 들지 않았다. 스네이프의 뺨을 감싸자 살짝 열감이 느껴졌다. 붉은 뺨이 보였고, 꽤 진한 술냄새가 해리의 코를 스쳤다.

드레이코는 문간에 팔짱을 끼고 서서 유난을 떨어대는 연인을 지켜 보았다. 해리가 잡고 늘어진 옷깃이 뜯어져 너덜거렸다. 무식한 새끼, 이게 얼마짜리 셔츠인 줄 알아? 마법으로 수선할 수 있었지만 드레이코는 필히 해리에게 옷값을 청구할 생각이었다. 해리가 못 준다면 스네이프 교수님에게라도 받아낼 생각이었다. 제가 오늘 팔자에도 없는 상담가가 돼서 술 주정까지 받아줬는데, 그 정도는 충분히 받을 만 했다.


식사를 마치고, 스네이프는 드레이코가 마법약 연구실로 쓰는 방을 함께 찾았다. 집요정이 있어 늘 정리가 잘 되어 연구실은 깔끔했다. 식사 중에 잠깐 보았지만 스네이프는 다시 제대로 살피기 위해 드레이코에게 탈의를 요구했다. 드레이코는 떨떠름하기도 했으나, 꽤 순순히 단추를 풀었다. 자학을 하고 있다는 교수의 지적은 정확했다. 요즘 들어 드레이코는 오랜만에 ‘살아있다’는 감각을 강렬히 느끼고 있었다. 하루하루, 의미 없이 반복 되던 나날들이었다. 드레이코는 종일 약재를 공부하고 조합하고, 끓여낸 것들을 덜 식힌 채로 제 환부에 바르는 자극을 즐겼다. 그 고통은 끔찍한 과거의 기억에서 한순간 저를 유리시키는 것 같았다.

드레이코는 이 상처가 생기던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울보 머틀이 저를 얼마든지 가엽게 보고, 동정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정신은 뇌수가 바다처럼 출렁이는 것 같았고, 눈에선 수도꼭지가 틀어진 것 같았다. 목끝까지 찬 압박감과 정신적인 붕괴, 갑작스레 등장한 해리 포터, 벌어진 싸움, 온 몸이 칼날로 도배 당하는 감각…… 피가 분수처럼 터지고, 당혹감에 차서 저에게서 도망치는 해리 포터의 얼굴과…….

“이 저주 주문은 학창시절의 내가 만든 거다, 드레이코.”
“그 주문을 어떻게 포터가 알고 있었죠?”
“포터가 6학년 때 갑작스레 마법약의 천재가 되지 않았나? 나는 네가 포터에게 이 주문을 당한 걸 보고 알아챘지. 포터는 내 교과서로 마법약 수업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그 교과서에 내가 만든 마법주문을 여럿 적어 놨었지.”

드레이코의 환부를 살피며 스네이프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잠자코 진찰 받듯 앉아있던 드레이코가 인상을 찡그렸다. 역겨운 포터 자식. 남의 교과서, 주문을 훔쳐 제 실력인 양 굴었던 게 뻔뻔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놈이 뭐가 좋아서 만나고 계십니까? 포터가 그- 교수님이 사랑했다는 그 분과 닮은 구석은 조금도 없을 것 같은데요.”
“나는 포터가 릴리를 닮아서 만나는 게 아니다, 드레이코.”
“그럼요? 대체 뭘 잘못 보고?”

스네이프는 드레이코의 말들에 피식 웃었다. 노골적으로 해리 포터를 싫어하는 티를 내는 드레이코에게서 예전의 자신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일 터다. 드레이코에게 셔츠를 다시 건네주고, 스네이프는 책상 앞에 앉아 드레이코가 적어놓은 마법약 수식들을 눈으로 훑었다.

“옻나무 껍질은 너무 과용 되었군, 수업 중에 집중하지 않았나? 이러니 수포가 나는 부작용이 생긴 거다, 드레이코. 정해진 수치가 있는데…….”
“포터 얘길 저에게 하러 온 거 아니세요? 계속 말씀을 돌리시는 것 같습니다만.”
“틀린 걸 눈으로 보고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잖은가. 슬러그혼 교수 밑에서는 정말 정신을 빼고 배운 듯 하군….”

드레이코는 6학년 때의 기억은 송두리째 삭제시키고 싶었다. 스스로의 뇌에 지팡이를 겨눠 오블리비아테를 쏘고 싶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스네이프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제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다 보였다.

“포터 얘기를 하기 전에. 내 과거 이야기부터 들어줬으면 한다, 드레이코.”
“저에게요?”

드레이코는 뜻밖이라는 눈을 하고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정말 제게 그 얘길 들려주신다고? 그건 듣기 싫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뭣 때문에 저 같은 놈 앞에서 스네이프 교수가 제 과거를 털어 놓는다는 건지.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몹시 궁금했다.

해리 포터가 위즌가모트에 스네이프 교수의 죽기 전 기억을 제출했다, 교수가 포터의 어머니를 어렸을 때부터 사랑해서, 볼드모트가 그녀를 살해했을 때부터 데스 이터에서 변절 해 반평생 포터를 지키는 데 삶을 바쳤다는 말들이 마법세계에 퍼졌고, 그게 드레이코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기억의 핵심은 있었지만 단순화 된 문장들은, 그저 동화적인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나는 머글 아비와 순수혈통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교수님이 혼혈인 건 알고 있었어요. 당신의 어머니가 프린스 가문이셨다고 아버지께 들었었죠.”
“내 가난한 머글 아비가 매일 술에 취해 어머니와 내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건? 집을 나가 며칠을 들어오지 않을 때면, 제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를, 만약 집에 살아 돌아온다면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어 있기를 내가 기도했다는 것은? 그것도 루시우스에게서 들었나?”

드레이코는 감히 머글이(이 대목에서는 전쟁이 끝난 지금, 양심이 조금 찔려왔으나) 마법사, 그것도 순수혈통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꾹 쥔 주먹이 살짝 떨렸다.

“우리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가난한 머글 동네에서도 가장 구석이었지. 그리고 강 하나만 건너면 있는 마을은 중산층이 사는 좋은 동네였다. 포터의 엄마인 릴리는 거기에 살던 머글의 막내딸이자, 마녀였지. 나는 강둑 너머로 넘어가 릴리와 그녀의 머글 언니가 노는 모습을 자주 지켜 보았다. 릴리는 자신이 부리는 재주가 마법인지 알지 못했어. 나는 그녀에게 우리가 마법사라고 가르쳐 주었다.”

태어날 때부터 마법사인 걸 알고 있는게 당연했던 드레이코로서는, 머글태생이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깨닫는 과정을 신선하게 받아 들였다. 예전 같으면 입학 전에 마법학교의 존재 자체도 몰랐던 그들이 혐오스러웠을 터인데, 약간이나마 제가 변한 게 느껴졌다.

“릴리는 내게 처음이자, 유일하게 생겼던 진정한 친구였다. 기차를 함께 타고 호그와트로 갔지만…… 그녀는 그리핀도르로, 나는 슬리데린으로 배정 받았다. 나는 그 때, 꽤 많이 슬퍼했던 것 같군…. 그녀의 성정이 나와 정반대라서 좋아했음에도.”

스네이프가 이마 옆으로 손을 괴었다. 드레이코는 덤덤한 까만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제임스 포터와 시리우스 블랙도 물론, 루시우스에게서 들어 알겠지. 그리핀도르의 구제불능 순수혈통들이었으니.”
“블랙은 제 어머니의 사촌이니까 꽤 잘 알고 있어요. 제임스 포터… 그는, 자세히 듣진 못했지만 순수혈통을 혐오하고 학교에 말썽을 일으키는 주범이었다고─”
“이 마법사회는 제임스 포터를 그냥 귀여운 정도의 말썽을 일으켰던 학교의 못말리는 악동으로 미화하기 바쁘지. 제 친구들을 몰고 다닐 때마다 으스대며 날 공격하고 괴롭혔던 사실은 쏙 빼고. 집단으로 공격 받았던 나는 그들의 행복한 추억 미화 속에서 불필요한 오물일테니까, 깨끗이 닦아냈겠지.”
“잠시만요, 제임스 포터가? 교수님을? 그는 해리 포터의 아버지 아닌가요…?”
“드레이코, ‘말포이’인 네가 보기에도 마법세계 영웅의 친아버지가 찌질한 집단 폭력의 수장이었던 게 믿기지 않나 보군.”

스네이프는 빈 웃음을 흘렸다. 당장이라도 제임스 포터가 제가 만든 주문을 뺏어, 역으로 자신을 공격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스네이프가 가만히 앉아 있었어도, 복도를 그저 지나는 길일 뿐이었어도 상관없었다. 저를 향해 웃으면서 휘두르는 주문들은 저를 골리기 위해 갈수록 악질적으로 변해갔다. 저주 주문을 만들 때의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마음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폭력은 떨어질 수 없는 연처럼 자신을 따라 붙었다. 자신이 먼저 폭력을 휘두르는 강한 존재가 되지 않는다면 이 연쇄를 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스네이프는 힘을 원했고, 릴리는 그런 스네이프를 끊어 내었다.

“……하루는 제임스 포터의 괴롭힘에 머릿속이 폭발해, 릴리에게 실언을 했다. 릴리를 잡종이라고 불렀다.”
“설마…….”

드레이코는 믿을 수 없어 눈을 부릅 떴다. 제가 입버릇처럼 머글태생들을 잡종이라고 불러댄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스네이프가 자신의 오랜 친구, 그것도 짝사랑하는 여자애에게 들려줄 수 있는 가장 모욕적인 말을 내뱉었을 만큼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었다는 것이……. 드레이코는 정신적으로 몰린 상황, 그것이 막다른 한계를 어떻게 이끌어내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울보 머틀의 화장실 속 울보 드레이코는, 그걸 너무도 잘 알았다.

“사과하려고 계속 그리핀도르 기숙사 앞에서 릴리를 기다렸다……. 하지만 보다시피…… 그녀가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난 적 없지.”

드레이코는 아랫입술을 짓씹고 셔츠의 밑단을 손톱으로 뜯었다. 실수 한 번에,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파도 벽이 된다. 드레이코는 왼팔의 흐릿해진 표식을 떠올렸다. 무의식적으로라도 왼팔을 붙잡지 않기 위해 드레이코는 부단히 노력했다.

“교수님…… 힘드시다면 이야기를 그만,”
“내가 직접 누군가에게 과거를 들려주는 건 자네가 처음인데, 드레이코? 포터도 기억을 봐서 아는 것일 뿐 내 입으로 친절히 설명한 적 없다. 그 영광을 기꺼이 걷어 차겠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스네이프는 조소에 가깝게 살짝 웃으며 말했다. 드레이코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제 방이 있는 곳에 제 전용 개인 응접실이 있습니다. 정말 괜찮으시다면, 거기에서 더 들려주세요.”


집요정이 과일, 비스킷, 카나페, 치즈가 가득 든 그릇을 들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스네이프의 잔에 와인을 반 정도 붓고, 드레이코는 제 잔에도 조금 따랐다. 몸에 약물을 쓰고 있기 때문에 금주가 나았지만, 드레이코는 무거운 주제를 들으며 술 생각이 간절했다.

“어디까지 얘기 했지?”
“그 분을 다시 만난 적 없다는 부분까지 하셨습니다, 교수님.”

교과서 페이지를 설명하듯 드레이코가 대답했다. 스네이프는 와인을 꿀꺽 넘기며 무표정을 유지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불쾌하고 토 나오는 영역이군. 뭐, 여태까지도 충분히 그랬나? 아무튼……. 그 제임스 놈이 릴리와 결혼했다. 나는 데스 이터로 지내는 동안에 그들은 불사조의 기사단이 됐고 어둠의 마왕과 대적하는 사이가 되었지. 그런 상황에 릴리가 그토록 무모한 집단에 들어간 건 나를 항상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릴리는 머글태생이었으니까, 언제라도 표적이 될 것 같아서 충분히 두려웠지. 그래도 그녀는 그 상황에 무사히 아이를 낳았고…… 그게 해리 포터다.”

스네이프는 제 반려의 탄생을 말 하면서 최대한 건조한 톤을 유지하려 애썼다. 입 안이 말라 와인의 남은 양을 한 번에 다 들이켰다. 드레이코는 잔이 비어질 적마다 와인을 다시 채워 주었다.

“포터는 예언…… 그것 때문에 마왕이 직접 나서 죽이려고 했지.”

스네이프의 목소리가 마침내 떨리기 시작했다. 드레이코는 예언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소스라쳤다. 그 때문에 자신이 덤블도어 살해라는 말도 안 되는 명을 볼드모트에게 부여 받고, 왼팔에는 혐오스런 표식을 달았다. 물론, 영광이라고 생각하며 들떠있었던 어리석고 어린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리며 드레이코 말포이는 깊게 참회했다.

“루시우스도 몰랐을 거다. 그 예언을 처음 듣고 어둠의 마왕에게 전달한 건 나였다, 드레이코.”
“……?!”

예언……. 해리 포터의 이마에 번개무늬 흉터가 생기게 된 이유, 볼드모트가 자신의 숙적을 스스로 만들게 된 이유, 릴리 포터가 살해 된 이유. 드레이코는 번개를 맞은 듯 몸을 흠칫 떨었다. 스네이프가 이 사실을 받아 들여야 했을 때 감당했어야 할 격통과 후회, 스스로에 대한 비난을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자신이 명예와 영광의 수단을 찾아 주인께 달려가 바친 예언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인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

스네이프는 잔을 쥔 채로 끝내 고개를 숙였다. 드레이코는 스승의 눈물을 못 본 체했다. 저까지 목구멍이 먹먹해왔다. 동화적인 헌신적 사랑 이야기 뒤에는, 한 사람의 끔찍한 나날들이 펼쳐져 있었다. 드레이코는 와인을 들이키며 쓴 맛을 삼켰다.

“덤블도어를 찾았다. 그는 나에게 포터가 아직 살아있다고 말했다. 릴리가 죽었는데 그 핏덩이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 싶었지……. 정말로 나는 그 증오스런 존재에 어떤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릴리가 목숨 바쳐 지킨 존재를 죽게 놔둘 수 없어서, 살아 있었다.”

여기까지가 마법세계가 감동적이라고 생각하는 헌신적 사랑 이야기의 중반부였다. 드레이코는 구역감을 느끼면서 소파에 등을 기대 파묻혔다.

“내가 내기니에 물려 죽기 직전에 포터에게 기억을 넘긴 것은 다 알테지.”
“네, 교수님.”
“포터는 다음 순간, 미래에서 와서 나를 살렸다. 그리고 1년, 같이 숨어 살았다.”
“기사로 접했습니다. 그럼 같이 사는 동안 서로, 뭐랄까……. 오해? 아니지, 응어리? 그런 것들을 풀고…… 음, 포터에 대한 감정도 달라지신 건가요?”

스네이프의 과거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릴리의 아들이었던 해리 포터와 기억을 나눈 채 살아갔다면 확실히 전과는 달라졌을 것 같았다. 포터 놈은, 전쟁 이후에 스네이프 교수를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는 걸 확연히 드러냈다. 전 데스 이터이자 이중 첩자 스네이프 교수의 법정 재판에서, 해리의 열띤 변호는 스네이프의 헌신적 사랑 이야기까지 마법세계에 퍼뜨리며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결국 스네이프를 전쟁영웅으로 인정시켰다.

“포터가 나를 살렸을 때, 어떤 얼굴을 한 줄 아나?”
“굳이 제가 그 놈 얼굴까지 떠올려야 합니까? 교수님.”

드레이코가 장난스럽게 툴툴거렸다. 스네이프는 와인을 꽤 마셔서 붉어진 얼굴로 작게 키득거렸다.

“그런 포터의 표정은 처음 봤어. 나를 보는데 다정하게 웃고…….”

드레이코는 턱을 괸 채 물끄러미 제 스승을 바라보았다. 릴리가 주제일 때와는 딴판이었다. 술기운일테지만 살짝 웃는 얼굴이 솔직히 보기 좋아 보였다. 교수가 해리 포터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게, 진정으로 가슴에 느껴졌다.

“그런데…. 요즘은 포터랑 사이가 안 좋나요? 오늘은 왜 그런 슬픈 얼굴로 절 찾으신 건지 모르겠어요, 교수님. 이런 안 하던 얘기까지 저에게 다 털어 놓으시고.”

살짝 웃던 스네이프가 그 말에 미묘히 입매를 내렸다. 그리고 연거푸 와인을 두 잔 부어 연달아 원샷을 했다. 저걸 저렇게 마시면 안될 텐데. 드레이코는 집에 숙취 물약이 있던가를 떠올렸다. 말포이는 귀족 가문으로, 거할 정도로 마시는 습관이 없어서 자신이 지금 직접 만들지 않으면, 약물창고에도 없을 듯 했다. 드레이코는 고개가 아래로 조금 꺾여 흐느적거리는 교수의 긴 흑발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포터가, 나에게, 바라는 게 있어…….”

교수의 느릿느릿해진 목소리가 그래도 분명하게 문장을 말했다. 드레이코는 과연 그게 뭘까 머릿속으로 추측해 보았다. 뛰어난 마법 실력을 가진 제 교수가 해내기에도 힘든 일인가? 그런데 그 정도로 힘들다면, 포터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스네이프는 열 오르는 이마를 짚으며 나른하게 소파에 기울어졌다. 벨벳의 소파는 스네이프가 움직여 닿이는 대로 결을 드러냈다. 드레이코는 지팡이를 들어 교수의 잔과 와인병을 치워 버렸다. 이미 술에 먹힌 듯한 스네이프에, 진작 치웠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드레이코는 손을 겹쳐 잡고 제 턱밑에 두었다.

“그게 뭔데요, 교수님?”
“……신.”
“신?”

신을 바란다는 게…… 무슨 말이지? 드레이코는 대체 뭔 의미인지 몰라 머릿속이 알쏭달쏭했다.

“내가…… 포터의 가족을 잃게 했, 으니까 난 해내야…… 해.”

스네이프는 점점 더 취하는 것 같아 보였다. 집요정을 시켜 숙취 물약을 사오라고 할까? 아, 시간이 늦어 열려 있는 판매상이 없을 것이었다. 드레이코가 생각에 잠긴 사이, 취기에 붉어진 스네이프는 까만 눈을 멍하니 깜박, 깜박거렸다. 드레이코는 스네이프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도 스네이프 교수인데, 술 주정이 아주 고약하진 않을지도. 지금도 저렇게 눈만 깜박이고 얌전히 계시는…….

“포터……?”

아니요, 교수님. 걔랑 저는 머리 색깔부터 다르지 않습니까. 드레이코는 떨떠름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스네이프는 초점이 잘 안 맞는 사람처럼 연거푸 눈을 찌푸리고, 손으로 비벼댔다. 그 정도 했으면 저를 해리 포터로 착각하는 실수는 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드레이코는 아무래도 큰 걸 바란 듯 했다.

스네이프가 나른히 풀린 상체를 억지로 바로 하려 애썼다. 드레이코는 그냥 교수에게 수면 물약을 먹일까 생각했다. 음, 몇 분 후면 잠에 드실지도 모르니 잠깐 상대하고 있다보면, 까지 생각할 찰나.

“포터, 날…… 이제, 진짜로, 만지기 싫나……?”

아……. 드레이코는 마른세수를 세 번 거칠게 했다. 스네이프 교수님과 해리 포터의 밤생활 같은 거 궁금해본 적도 없다고요, 빌어먹을, 살라자르 슬리데린이시여…….

스네이프의 몸이 앞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교수가 제가 앉은 쪽으로 움직이려는 것 같아서, 드레이코는 등받이가 있는 1인 소파에 앉아 있다는 것도 까먹고 몸을 뒤로 뺐다. 막다른 곳에 등이 닿자 드레이코는 한숨이 나왔다. 스네이프는 양 손으로 소파의 선단을 짚었다. 뜨거운 숨을 흘리니 제가 풍긴 술냄새에 더 취하는 것 같았다. 앞이 온통 흐릿해서 분간이 가지 않았다. 누군가 제 앞에 있긴 한데, 제 앞에 있을 사람은 해리 포터뿐이었으니까, 당연히 해리 포터려니,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포터……. 나는… 너한테 안기고 싶…….”
“교수님, 잠시만요. 저는 포터가 아니라-”
“이, 제 날 이름으로도 안, 부르는…. 교수라고 부르는 건, 가? 난 이제, 포터 너한테, 아무 것도 아닌가…?”

스네이프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드레이코는 멍하니 스네이프가 붉어진 눈가를 짓무르며 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 교수님은 저렇게 우시는구나. 생각 외로…… 굉장히…….

“그게 아니라, 저는 포터가 아니고 드레이ㅋ……!”

스네이프가 일어났다. 드레이코는 숨도 멈춘 채 교수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스네이프는 드레이코가 앉은 소파의 팔걸이에 양 손을 얹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는 까만 눈동자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흘러내리는 까만 머리카락이 제 백금발의 정수리로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 거리면 제가 포터가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게 아닌지. 드레이코는 그러나 지팡이를 쥐고 교수를 밀어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네이프가 해리에게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긴장감도 약물 실험만큼이나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드레이코는 스네이프의 술냄새에 저도 취했나 생각했다.

“하고 싶어, 해리….”

헉……. 드레이코는 숨을 멈췄다. 스네이프가 무릎을 들어 제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안돼, 드레이코 말포이! 멈춰! 제발, 제발. 서면 안돼, 서지 마, 서지 말라고……. 지체할 틈이 없었다. 드레이코는 지팡이를 급하게 쥐고, 교수에게 시전할 적당한 주문을 찾아 머릿 속 모터를 팽팽 돌렸다.

“임신시켜줘, 해리, 응……?”

드레이코는 입을 떡 벌리고 교수의 얼굴을 넋을 보고 보았다. 주문을 생각하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지는 느낌이었다. 교수는…… 그러니까…… 너무 야했다. 이대로 스네이프가 저를 포터로 착각하게 두고, 안고 싶어질 만큼 드레이코는 강한 욕구가 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이성이 드레이코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치며 뜯어 말렸다. 술에 취한 남의 애인을 데리고, 게다가 지금 네 은사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드레이코 말포이!

“모빌리코르푸스!”

스네이프의 몸이 원래 앉아있던 카우치로 옮겨졌다.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두고, 아씨오 수면 물약까지 외쳤다. 수색꾼이었던 드레이코답게, 날아온 수면 물약을 잡아채서 바로 스네이프의 입에 먹였다. 스네이프는 금세 소리도 내지 않고 잠들었다. 드레이코는 방금 전 경주라도 끝마친 것처럼 크게 가슴을 들썩이며 이마를 훔쳤다.


해리는 암녹색 벨벳 카우치에 앉아서, 스네이프의 머리를 제 허벅지에 뉘인 채 드레이코의 말을 들었다. 세베루스가 자기 과거 같은 걸 얘기하다니. 말포이 저 자식한테 왜? 그리고 심기가 불편한 걸 감추지 않는 해리만큼이나, 드레이코도 짜증스럽게 팔짱을 끼고 대치했다. 제 집에서 저보다 더 당당하게, 교수까지 꿰차 앉아있는 해리의 모습에 절로 이마에 힘줄이 서는 것 같았다.

“그래…… 약물 개발중이라고? 내 세브를 얼마나 괴롭혔을지 눈에 보이는군, 말포이. 분수에 넘치는 행동이 아닐까, 재고도 해볼 줄 알아야 할텐데.”
“나에게 먼저 마법약에 소질이 있다고, 적성을 알아봐주신 건 스네이프 교수님이야, 포터. 교수님의 교과서를 훔쳐야만 수재 소리를 듣는 너랑은 난 차원이 다르거든…….”

으스대며 눈썹을 꿈틀이는 드레이코에 해리가 으득, 이를 갈았다. 저 자식이 혼혈왕자 교과서까지 알고 있다니. 뭘 얼마나 떠들어댄건지 스네이프를 깨워 화를 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뭐, 성공하길 빈다. 저주 주문에 듣는 약이 생기면 좋으니까.”

드레이코는 하, 기막힌 웃음을 흘리며 해리를 노려보았다. 진짜 저 새끼를 왜 좋아하는지 교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해리가 스네이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드레이코는 왼쪽 가슴 부근이 욱신거렸지만, 너무 열 받아서 그런거라고 넘겼다.

“포터, 너야말로 네 분수에 맞는 애인을 사귀지 그러냐?”
“……뭐라고?”

들짐승 같은 눈빛이었다. 안광이 비치는 녹색눈의 음험함에 순간 드레이코의 목 뒤가 오싹해졌다. 그러나 볼드모트의 앞에서도 있었는데 또래의 남자 앞에서 기가 죽고 싶지는 않았다. 드레이코는 부러 더 상체를 세우며, 입꼬리도 비뚤게 끌어 올렸다.

“교수님이 취해서 하시는 얘길 들었는데 말야…….”
“……?”
“요즘 네가 안 만져준다고, 네가 이제 애정이 식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 그럴거면 교수님을 놔주지 그래, 포터?”
“무슨…… 미친 소리야, 너?”

해리가 미간을 찡그리며 윽박질렀다. 안 만져준다고 애정이 식었다고 여겨? 누가 접촉을 금지했는데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기가 막혀서 웃음도 안 나왔다.

움찔, 그 순간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작은 움직임에 해리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스네이프의 미간이 살짝 좁혀 들었다. 드레이코도 해리의 반응으로 스네이프가 깨려고 하는 걸 알았다. 드레이코는 잠들기 전에 교수가 제게 보였던 행동을 떠올렸다. 살짝 얼굴을 붉힌 채, 드레이코는 교수의 찌푸린 미간에 시선을 두었다.

“해리……?”

스네이프가 멍하게 해리를 올려다 봤다. 해리는 작은 한숨을 내뱉고, 최대한의 다정으로 그를 내려다 보며 웃었다.

“걱정시키고 그래요, 왜.”
“해리, 네가, 싫어할까봐…. 드레이코, 니까….”
“그것보다는 말없이 날 두고 사라지는 게 더 싫거든요?”

어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실까. 스네이프의 눈 밑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자 푸스스 웃는 얼굴이 귀여웠다. 취해서 솔직한 세베루스는 이런 느낌이구나. 귀엽네, 평소보다 더.

“그것보다, 내가 요즘 안 만져준다고 말포이한테 다 일러바쳤다면서요. 그러면서 당신이 먼저 만지지 말라 했다는 소린 안 하고.”
“내가 그랬어도오…. 해리 네가 너무, 나를 안 만져줘서… 난, 너 만지고, 싶었는데…….”

아, 미치겠네 진짜. 해리는 참지 못하고 스네이프를 안아 일으켜 키스했다. 앞에서 드레이코 말포이의 눈이 썩어가든 말든, 제 알 바는 아니었다.

스네이프가 으응, 작게 웃으며 해리의 어깨를 팔로 안았다. 해리는 키스하면서 오른손을 뻗어 스네이프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쓸어 올렸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접촉이었다. 흥분이 마구 끓어 올랐다. 스네이프가 노골적으로 하반신을 붙여오는 게 느껴졌다. 해리는 입을 맞추면서도, 자꾸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아, 귀여워. 너무 좋아 세브…….

“우리 집을 삼류호텔 취급하지 말아줄래, 포터?”

신나게 혀를 섞는 중에 미간이 확 찡그려졌다. 여전히 입을 맞추면서, 해리는 스네이프의 얼굴 너머로 고개를 기울여 드레이코를 마주했다. 다리를 꼰 채,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고 머리를 괸 드레이코가 무표정으로 저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해리도 말포이 놈이 관전 중에 제 연인을 끝까지 안을 생각은 없었다. 해리는 드레이코와 대화를 하기 위해, 스네이프의 얼굴을 잠시 떨어뜨렸다. 그런데 스네이프가 다급히 다시 입을 맞춰 와, 당황하고 말았다.

“싫어…. 나 싫어진거야, 해리? 왜 키스 안 해줘?”
“아니- 세베루스, 잠시만…. 말포이랑 대화 좀, 잠깐, 아니, 안 싫어요….”
“빨리이…. 나 하고 싶어. 해리, 여보… 나 임신시켜줘…….”
“…….”

스네이프의 등을 안은 해리의 손이, 뚝, 소리가 날듯 굳어 멈췄다. 드레이코는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 데스 이터에게 가해지는 신종 고문이 따로 없었다. 드레이코는 돌처럼 굳은 해리와 눈을 마주쳤다. 표정 없는 드레이코가 엄지로 뒤쪽의 문을 가리켰다. 손님방이니, 자고 가. 해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드레이코 말포이가 마음에 든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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