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해리는 다급하지만 잔뜩 굳은 얼굴로 말포이 저택으로 들어섰다. 집요정이 현관 홀에 해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로브를 달라고 내미는 집요정의 작은 손을 무시하면서 해리는 스네이프를 찾았다. 대리석 바닥에 구둣발의 소리가 시끄럽게 부딪쳤다. 집 구조도 모르면서 성큼성큼 앞서나가는 해리에 집요정이 꽥꽥거리며 막았다. 드레이코 도련님의 개인 응접실로 손님을 모셨다고 소리쳤다. 해리는 안내하라고 약간 커진 언성으로 말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기에 최대한 냉정을 찾은 것이었다.
부엌의 식탁에 앉아서 얼굴만 감싸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렇게 행선지에 대한 말도 없이 저를 두고 가버리는 스네이프의 행동에 해리는 기가 막혔다. 제가 뭐, 그에게 마음에 안 들게 한 것이 있다면 이 정도로 억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해리 포터는 무려 한 달을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충직한 개처럼 굴었다. 그가 섹스를 금했을 때, 그렇게 해주었다. 몸을 건들지도 말라고 했을 때도 결국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시킨 대로 다했더니, 돌아오는 행동은 저를 무시하는 스네이프였다. 창으로 날아든 드레이코 말포이가 보낸 부엉이였다.
기가 막혔다. 이 시간에 절 두고 찾은 곳이 드레이코 말포이의 집이라니. 말포이를 만나러 나간 것이었다니! 그린고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는 제자와 스네이프가 느닷없이 저녁의 만남을 가졌을 리 없었다. 해리는 헤르메스가 요즘 부쩍 바깥과 집을 오간다고 생각했다. 사냥하느라 바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스네이프가 드레이코와 저 몰래 연락을 주고 받았다 생각하면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에 핏발이 서는 느낌이었다.
벌써 열한 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부엉이가 말포이 저택에서 자신의 집으로 날아오는 시간까지를 감안하더라도 스네이프는 이 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 해리는 정말 피가 말라 죽는 줄 알았다. 스네이프를 찾아나서지 않은 이유는 제 반려를 믿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믿지 못해서였는지 알 수 없었다. 스네이프를 찾았을 때 뭘 보게될 지 해리는 두려웠다.
“말포이……!!”
응접실 입구 쪽에 나와 있던 드레이코의 멱살을 잡아챘다. 드레이코는 미간을 찡그리며 해리의 면상을 쳐다 보았다. 도도한 도련님의 태도는 해리의 화를 더욱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세베루스는 어디─”
고개를 돌린 곳에 스네이프가 있었다. 암녹색 벨벳 카우치에 쓰러져 누운 채였다. 해리는 당장에 드레이코를 밀쳐내고 스네이프의 앞으로 달려갔다. 화났던 마음은 순식간에 가라앉아 걱정밖에 들지 않았다. 스네이프의 뺨을 감싸자 살짝 열감이 느껴졌다. 붉은 뺨이 보였고, 꽤 진한 술냄새가 해리의 코를 스쳤다.
드레이코는 문간에 팔짱을 끼고 서서 유난을 떨어대는 연인을 지켜 보았다. 해리가 잡고 늘어진 옷깃이 뜯어져 너덜거렸다. 무식한 새끼, 이게 얼마짜리 셔츠인 줄 알아? 마법으로 수선할 수 있었지만 드레이코는 필히 해리에게 옷값을 청구할 생각이었다. 해리가 못 준다면 스네이프 교수님에게라도 받아낼 생각이었다. 제가 오늘 팔자에도 없는 상담가가 돼서 술 주정까지 받아줬는데, 그 정도는 충분히 받을 만 했다.
식사를 마치고, 스네이프는 드레이코가 마법약 연구실로 쓰는 방을 함께 찾았다. 집요정이 있어 늘 정리가 잘 되어 연구실은 깔끔했다. 식사 중에 잠깐 보았지만 스네이프는 다시 제대로 살피기 위해 드레이코에게 탈의를 요구했다. 드레이코는 떨떠름하기도 했으나, 꽤 순순히 단추를 풀었다. 자학을 하고 있다는 교수의 지적은 정확했다. 요즘 들어 드레이코는 오랜만에 ‘살아있다’는 감각을 강렬히 느끼고 있었다. 하루하루, 의미 없이 반복 되던 나날들이었다. 드레이코는 종일 약재를 공부하고 조합하고, 끓여낸 것들을 덜 식힌 채로 제 환부에 바르는 자극을 즐겼다. 그 고통은 끔찍한 과거의 기억에서 한순간 저를 유리시키는 것 같았다.
드레이코는 이 상처가 생기던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울보 머틀이 저를 얼마든지 가엽게 보고, 동정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정신은 뇌수가 바다처럼 출렁이는 것 같았고, 눈에선 수도꼭지가 틀어진 것 같았다. 목끝까지 찬 압박감과 정신적인 붕괴, 갑작스레 등장한 해리 포터, 벌어진 싸움, 온 몸이 칼날로 도배 당하는 감각…… 피가 분수처럼 터지고, 당혹감에 차서 저에게서 도망치는 해리 포터의 얼굴과…….
“이 저주 주문은 학창시절의 내가 만든 거다, 드레이코.”
“그 주문을 어떻게 포터가 알고 있었죠?”
“포터가 6학년 때 갑작스레 마법약의 천재가 되지 않았나? 나는 네가 포터에게 이 주문을 당한 걸 보고 알아챘지. 포터는 내 교과서로 마법약 수업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그 교과서에 내가 만든 마법주문을 여럿 적어 놨었지.”
드레이코의 환부를 살피며 스네이프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잠자코 진찰 받듯 앉아있던 드레이코가 인상을 찡그렸다. 역겨운 포터 자식. 남의 교과서, 주문을 훔쳐 제 실력인 양 굴었던 게 뻔뻔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놈이 뭐가 좋아서 만나고 계십니까? 포터가 그- 교수님이 사랑했다는 그 분과 닮은 구석은 조금도 없을 것 같은데요.”
“나는 포터가 릴리를 닮아서 만나는 게 아니다, 드레이코.”
“그럼요? 대체 뭘 잘못 보고?”
스네이프는 드레이코의 말들에 피식 웃었다. 노골적으로 해리 포터를 싫어하는 티를 내는 드레이코에게서 예전의 자신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일 터다. 드레이코에게 셔츠를 다시 건네주고, 스네이프는 책상 앞에 앉아 드레이코가 적어놓은 마법약 수식들을 눈으로 훑었다.
“옻나무 껍질은 너무 과용 되었군, 수업 중에 집중하지 않았나? 이러니 수포가 나는 부작용이 생긴 거다, 드레이코. 정해진 수치가 있는데…….”
“포터 얘길 저에게 하러 온 거 아니세요? 계속 말씀을 돌리시는 것 같습니다만.”
“틀린 걸 눈으로 보고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잖은가. 슬러그혼 교수 밑에서는 정말 정신을 빼고 배운 듯 하군….”
드레이코는 6학년 때의 기억은 송두리째 삭제시키고 싶었다. 스스로의 뇌에 지팡이를 겨눠 오블리비아테를 쏘고 싶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스네이프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제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다 보였다.
“포터 얘기를 하기 전에. 내 과거 이야기부터 들어줬으면 한다, 드레이코.”
“저에게요?”
드레이코는 뜻밖이라는 눈을 하고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정말 제게 그 얘길 들려주신다고? 그건 듣기 싫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뭣 때문에 저 같은 놈 앞에서 스네이프 교수가 제 과거를 털어 놓는다는 건지.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몹시 궁금했다.
해리 포터가 위즌가모트에 스네이프 교수의 죽기 전 기억을 제출했다, 교수가 포터의 어머니를 어렸을 때부터 사랑해서, 볼드모트가 그녀를 살해했을 때부터 데스 이터에서 변절 해 반평생 포터를 지키는 데 삶을 바쳤다는 말들이 마법세계에 퍼졌고, 그게 드레이코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기억의 핵심은 있었지만 단순화 된 문장들은, 그저 동화적인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나는 머글 아비와 순수혈통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교수님이 혼혈인 건 알고 있었어요. 당신의 어머니가 프린스 가문이셨다고 아버지께 들었었죠.”
“내 가난한 머글 아비가 매일 술에 취해 어머니와 내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건? 집을 나가 며칠을 들어오지 않을 때면, 제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를, 만약 집에 살아 돌아온다면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어 있기를 내가 기도했다는 것은? 그것도 루시우스에게서 들었나?”
드레이코는 감히 머글이(이 대목에서는 전쟁이 끝난 지금, 양심이 조금 찔려왔으나) 마법사, 그것도 순수혈통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꾹 쥔 주먹이 살짝 떨렸다.
“우리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가난한 머글 동네에서도 가장 구석이었지. 그리고 강 하나만 건너면 있는 마을은 중산층이 사는 좋은 동네였다. 포터의 엄마인 릴리는 거기에 살던 머글의 막내딸이자, 마녀였지. 나는 강둑 너머로 넘어가 릴리와 그녀의 머글 언니가 노는 모습을 자주 지켜 보았다. 릴리는 자신이 부리는 재주가 마법인지 알지 못했어. 나는 그녀에게 우리가 마법사라고 가르쳐 주었다.”
태어날 때부터 마법사인 걸 알고 있는게 당연했던 드레이코로서는, 머글태생이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깨닫는 과정을 신선하게 받아 들였다. 예전 같으면 입학 전에 마법학교의 존재 자체도 몰랐던 그들이 혐오스러웠을 터인데, 약간이나마 제가 변한 게 느껴졌다.
“릴리는 내게 처음이자, 유일하게 생겼던 진정한 친구였다. 기차를 함께 타고 호그와트로 갔지만…… 그녀는 그리핀도르로, 나는 슬리데린으로 배정 받았다. 나는 그 때, 꽤 많이 슬퍼했던 것 같군…. 그녀의 성정이 나와 정반대라서 좋아했음에도.”
스네이프가 이마 옆으로 손을 괴었다. 드레이코는 덤덤한 까만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제임스 포터와 시리우스 블랙도 물론, 루시우스에게서 들어 알겠지. 그리핀도르의 구제불능 순수혈통들이었으니.”
“블랙은 제 어머니의 사촌이니까 꽤 잘 알고 있어요. 제임스 포터… 그는, 자세히 듣진 못했지만 순수혈통을 혐오하고 학교에 말썽을 일으키는 주범이었다고─”
“이 마법사회는 제임스 포터를 그냥 귀여운 정도의 말썽을 일으켰던 학교의 못말리는 악동으로 미화하기 바쁘지. 제 친구들을 몰고 다닐 때마다 으스대며 날 공격하고 괴롭혔던 사실은 쏙 빼고. 집단으로 공격 받았던 나는 그들의 행복한 추억 미화 속에서 불필요한 오물일테니까, 깨끗이 닦아냈겠지.”
“잠시만요, 제임스 포터가? 교수님을? 그는 해리 포터의 아버지 아닌가요…?”
“드레이코, ‘말포이’인 네가 보기에도 마법세계 영웅의 친아버지가 찌질한 집단 폭력의 수장이었던 게 믿기지 않나 보군.”
스네이프는 빈 웃음을 흘렸다. 당장이라도 제임스 포터가 제가 만든 주문을 뺏어, 역으로 자신을 공격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스네이프가 가만히 앉아 있었어도, 복도를 그저 지나는 길일 뿐이었어도 상관없었다. 저를 향해 웃으면서 휘두르는 주문들은 저를 골리기 위해 갈수록 악질적으로 변해갔다. 저주 주문을 만들 때의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마음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폭력은 떨어질 수 없는 연처럼 자신을 따라 붙었다. 자신이 먼저 폭력을 휘두르는 강한 존재가 되지 않는다면 이 연쇄를 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스네이프는 힘을 원했고, 릴리는 그런 스네이프를 끊어 내었다.
“……하루는 제임스 포터의 괴롭힘에 머릿속이 폭발해, 릴리에게 실언을 했다. 릴리를 잡종이라고 불렀다.”
“설마…….”
드레이코는 믿을 수 없어 눈을 부릅 떴다. 제가 입버릇처럼 머글태생들을 잡종이라고 불러댄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스네이프가 자신의 오랜 친구, 그것도 짝사랑하는 여자애에게 들려줄 수 있는 가장 모욕적인 말을 내뱉었을 만큼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었다는 것이……. 드레이코는 정신적으로 몰린 상황, 그것이 막다른 한계를 어떻게 이끌어내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울보 머틀의 화장실 속 울보 드레이코는, 그걸 너무도 잘 알았다.
“사과하려고 계속 그리핀도르 기숙사 앞에서 릴리를 기다렸다……. 하지만 보다시피…… 그녀가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난 적 없지.”
드레이코는 아랫입술을 짓씹고 셔츠의 밑단을 손톱으로 뜯었다. 실수 한 번에,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파도 벽이 된다. 드레이코는 왼팔의 흐릿해진 표식을 떠올렸다. 무의식적으로라도 왼팔을 붙잡지 않기 위해 드레이코는 부단히 노력했다.
“교수님…… 힘드시다면 이야기를 그만,”
“내가 직접 누군가에게 과거를 들려주는 건 자네가 처음인데, 드레이코? 포터도 기억을 봐서 아는 것일 뿐 내 입으로 친절히 설명한 적 없다. 그 영광을 기꺼이 걷어 차겠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스네이프는 조소에 가깝게 살짝 웃으며 말했다. 드레이코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제 방이 있는 곳에 제 전용 개인 응접실이 있습니다. 정말 괜찮으시다면, 거기에서 더 들려주세요.”
집요정이 과일, 비스킷, 카나페, 치즈가 가득 든 그릇을 들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스네이프의 잔에 와인을 반 정도 붓고, 드레이코는 제 잔에도 조금 따랐다. 몸에 약물을 쓰고 있기 때문에 금주가 나았지만, 드레이코는 무거운 주제를 들으며 술 생각이 간절했다.
“어디까지 얘기 했지?”
“그 분을 다시 만난 적 없다는 부분까지 하셨습니다, 교수님.”
교과서 페이지를 설명하듯 드레이코가 대답했다. 스네이프는 와인을 꿀꺽 넘기며 무표정을 유지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불쾌하고 토 나오는 영역이군. 뭐, 여태까지도 충분히 그랬나? 아무튼……. 그 제임스 놈이 릴리와 결혼했다. 나는 데스 이터로 지내는 동안에 그들은 불사조의 기사단이 됐고 어둠의 마왕과 대적하는 사이가 되었지. 그런 상황에 릴리가 그토록 무모한 집단에 들어간 건 나를 항상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릴리는 머글태생이었으니까, 언제라도 표적이 될 것 같아서 충분히 두려웠지. 그래도 그녀는 그 상황에 무사히 아이를 낳았고…… 그게 해리 포터다.”
스네이프는 제 반려의 탄생을 말 하면서 최대한 건조한 톤을 유지하려 애썼다. 입 안이 말라 와인의 남은 양을 한 번에 다 들이켰다. 드레이코는 잔이 비어질 적마다 와인을 다시 채워 주었다.
“포터는 예언…… 그것 때문에 마왕이 직접 나서 죽이려고 했지.”
스네이프의 목소리가 마침내 떨리기 시작했다. 드레이코는 예언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소스라쳤다. 그 때문에 자신이 덤블도어 살해라는 말도 안 되는 명을 볼드모트에게 부여 받고, 왼팔에는 혐오스런 표식을 달았다. 물론, 영광이라고 생각하며 들떠있었던 어리석고 어린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리며 드레이코 말포이는 깊게 참회했다.
“루시우스도 몰랐을 거다. 그 예언을 처음 듣고 어둠의 마왕에게 전달한 건 나였다, 드레이코.”
“……?!”
예언……. 해리 포터의 이마에 번개무늬 흉터가 생기게 된 이유, 볼드모트가 자신의 숙적을 스스로 만들게 된 이유, 릴리 포터가 살해 된 이유. 드레이코는 번개를 맞은 듯 몸을 흠칫 떨었다. 스네이프가 이 사실을 받아 들여야 했을 때 감당했어야 할 격통과 후회, 스스로에 대한 비난을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자신이 명예와 영광의 수단을 찾아 주인께 달려가 바친 예언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인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
스네이프는 잔을 쥔 채로 끝내 고개를 숙였다. 드레이코는 스승의 눈물을 못 본 체했다. 저까지 목구멍이 먹먹해왔다. 동화적인 헌신적 사랑 이야기 뒤에는, 한 사람의 끔찍한 나날들이 펼쳐져 있었다. 드레이코는 와인을 들이키며 쓴 맛을 삼켰다.
“덤블도어를 찾았다. 그는 나에게 포터가 아직 살아있다고 말했다. 릴리가 죽었는데 그 핏덩이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 싶었지……. 정말로 나는 그 증오스런 존재에 어떤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릴리가 목숨 바쳐 지킨 존재를 죽게 놔둘 수 없어서, 살아 있었다.”
여기까지가 마법세계가 감동적이라고 생각하는 헌신적 사랑 이야기의 중반부였다. 드레이코는 구역감을 느끼면서 소파에 등을 기대 파묻혔다.
“내가 내기니에 물려 죽기 직전에 포터에게 기억을 넘긴 것은 다 알테지.”
“네, 교수님.”
“포터는 다음 순간, 미래에서 와서 나를 살렸다. 그리고 1년, 같이 숨어 살았다.”
“기사로 접했습니다. 그럼 같이 사는 동안 서로, 뭐랄까……. 오해? 아니지, 응어리? 그런 것들을 풀고…… 음, 포터에 대한 감정도 달라지신 건가요?”
스네이프의 과거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릴리의 아들이었던 해리 포터와 기억을 나눈 채 살아갔다면 확실히 전과는 달라졌을 것 같았다. 포터 놈은, 전쟁 이후에 스네이프 교수를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는 걸 확연히 드러냈다. 전 데스 이터이자 이중 첩자 스네이프 교수의 법정 재판에서, 해리의 열띤 변호는 스네이프의 헌신적 사랑 이야기까지 마법세계에 퍼뜨리며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결국 스네이프를 전쟁영웅으로 인정시켰다.
“포터가 나를 살렸을 때, 어떤 얼굴을 한 줄 아나?”
“굳이 제가 그 놈 얼굴까지 떠올려야 합니까? 교수님.”
드레이코가 장난스럽게 툴툴거렸다. 스네이프는 와인을 꽤 마셔서 붉어진 얼굴로 작게 키득거렸다.
“그런 포터의 표정은 처음 봤어. 나를 보는데 다정하게 웃고…….”
드레이코는 턱을 괸 채 물끄러미 제 스승을 바라보았다. 릴리가 주제일 때와는 딴판이었다. 술기운일테지만 살짝 웃는 얼굴이 솔직히 보기 좋아 보였다. 교수가 해리 포터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게, 진정으로 가슴에 느껴졌다.
“그런데…. 요즘은 포터랑 사이가 안 좋나요? 오늘은 왜 그런 슬픈 얼굴로 절 찾으신 건지 모르겠어요, 교수님. 이런 안 하던 얘기까지 저에게 다 털어 놓으시고.”
살짝 웃던 스네이프가 그 말에 미묘히 입매를 내렸다. 그리고 연거푸 와인을 두 잔 부어 연달아 원샷을 했다. 저걸 저렇게 마시면 안될 텐데. 드레이코는 집에 숙취 물약이 있던가를 떠올렸다. 말포이는 귀족 가문으로, 거할 정도로 마시는 습관이 없어서 자신이 지금 직접 만들지 않으면, 약물창고에도 없을 듯 했다. 드레이코는 고개가 아래로 조금 꺾여 흐느적거리는 교수의 긴 흑발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포터가, 나에게, 바라는 게 있어…….”
교수의 느릿느릿해진 목소리가 그래도 분명하게 문장을 말했다. 드레이코는 과연 그게 뭘까 머릿속으로 추측해 보았다. 뛰어난 마법 실력을 가진 제 교수가 해내기에도 힘든 일인가? 그런데 그 정도로 힘들다면, 포터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스네이프는 열 오르는 이마를 짚으며 나른하게 소파에 기울어졌다. 벨벳의 소파는 스네이프가 움직여 닿이는 대로 결을 드러냈다. 드레이코는 지팡이를 들어 교수의 잔과 와인병을 치워 버렸다. 이미 술에 먹힌 듯한 스네이프에, 진작 치웠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드레이코는 손을 겹쳐 잡고 제 턱밑에 두었다.
“그게 뭔데요, 교수님?”
“……신.”
“신?”
신을 바란다는 게…… 무슨 말이지? 드레이코는 대체 뭔 의미인지 몰라 머릿속이 알쏭달쏭했다.
“내가…… 포터의 가족을 잃게 했, 으니까 난 해내야…… 해.”
스네이프는 점점 더 취하는 것 같아 보였다. 집요정을 시켜 숙취 물약을 사오라고 할까? 아, 시간이 늦어 열려 있는 판매상이 없을 것이었다. 드레이코가 생각에 잠긴 사이, 취기에 붉어진 스네이프는 까만 눈을 멍하니 깜박, 깜박거렸다. 드레이코는 스네이프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도 스네이프 교수인데, 술 주정이 아주 고약하진 않을지도. 지금도 저렇게 눈만 깜박이고 얌전히 계시는…….
“포터……?”
아니요, 교수님. 걔랑 저는 머리 색깔부터 다르지 않습니까. 드레이코는 떨떠름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스네이프는 초점이 잘 안 맞는 사람처럼 연거푸 눈을 찌푸리고, 손으로 비벼댔다. 그 정도 했으면 저를 해리 포터로 착각하는 실수는 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드레이코는 아무래도 큰 걸 바란 듯 했다.
스네이프가 나른히 풀린 상체를 억지로 바로 하려 애썼다. 드레이코는 그냥 교수에게 수면 물약을 먹일까 생각했다. 음, 몇 분 후면 잠에 드실지도 모르니 잠깐 상대하고 있다보면, 까지 생각할 찰나.
“포터, 날…… 이제, 진짜로, 만지기 싫나……?”
아……. 드레이코는 마른세수를 세 번 거칠게 했다. 스네이프 교수님과 해리 포터의 밤생활 같은 거 궁금해본 적도 없다고요, 빌어먹을, 살라자르 슬리데린이시여…….
스네이프의 몸이 앞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교수가 제가 앉은 쪽으로 움직이려는 것 같아서, 드레이코는 등받이가 있는 1인 소파에 앉아 있다는 것도 까먹고 몸을 뒤로 뺐다. 막다른 곳에 등이 닿자 드레이코는 한숨이 나왔다. 스네이프는 양 손으로 소파의 선단을 짚었다. 뜨거운 숨을 흘리니 제가 풍긴 술냄새에 더 취하는 것 같았다. 앞이 온통 흐릿해서 분간이 가지 않았다. 누군가 제 앞에 있긴 한데, 제 앞에 있을 사람은 해리 포터뿐이었으니까, 당연히 해리 포터려니,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포터……. 나는… 너한테 안기고 싶…….”
“교수님, 잠시만요. 저는 포터가 아니라-”
“이, 제 날 이름으로도 안, 부르는…. 교수라고 부르는 건, 가? 난 이제, 포터 너한테, 아무 것도 아닌가…?”
스네이프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드레이코는 멍하니 스네이프가 붉어진 눈가를 짓무르며 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 교수님은 저렇게 우시는구나. 생각 외로…… 굉장히…….
“그게 아니라, 저는 포터가 아니고 드레이ㅋ……!”
스네이프가 일어났다. 드레이코는 숨도 멈춘 채 교수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스네이프는 드레이코가 앉은 소파의 팔걸이에 양 손을 얹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는 까만 눈동자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흘러내리는 까만 머리카락이 제 백금발의 정수리로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 거리면 제가 포터가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게 아닌지. 드레이코는 그러나 지팡이를 쥐고 교수를 밀어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네이프가 해리에게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긴장감도 약물 실험만큼이나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드레이코는 스네이프의 술냄새에 저도 취했나 생각했다.
“하고 싶어, 해리….”
헉……. 드레이코는 숨을 멈췄다. 스네이프가 무릎을 들어 제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안돼, 드레이코 말포이! 멈춰! 제발, 제발. 서면 안돼, 서지 마, 서지 말라고……. 지체할 틈이 없었다. 드레이코는 지팡이를 급하게 쥐고, 교수에게 시전할 적당한 주문을 찾아 머릿 속 모터를 팽팽 돌렸다.
“임신시켜줘, 해리, 응……?”
드레이코는 입을 떡 벌리고 교수의 얼굴을 넋을 보고 보았다. 주문을 생각하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지는 느낌이었다. 교수는…… 그러니까…… 너무 야했다. 이대로 스네이프가 저를 포터로 착각하게 두고, 안고 싶어질 만큼 드레이코는 강한 욕구가 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이성이 드레이코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치며 뜯어 말렸다. 술에 취한 남의 애인을 데리고, 게다가 지금 네 은사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드레이코 말포이!
“모빌리코르푸스!”
스네이프의 몸이 원래 앉아있던 카우치로 옮겨졌다.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두고, 아씨오 수면 물약까지 외쳤다. 수색꾼이었던 드레이코답게, 날아온 수면 물약을 잡아채서 바로 스네이프의 입에 먹였다. 스네이프는 금세 소리도 내지 않고 잠들었다. 드레이코는 방금 전 경주라도 끝마친 것처럼 크게 가슴을 들썩이며 이마를 훔쳤다.
해리는 암녹색 벨벳 카우치에 앉아서, 스네이프의 머리를 제 허벅지에 뉘인 채 드레이코의 말을 들었다. 세베루스가 자기 과거 같은 걸 얘기하다니. 말포이 저 자식한테 왜? 그리고 심기가 불편한 걸 감추지 않는 해리만큼이나, 드레이코도 짜증스럽게 팔짱을 끼고 대치했다. 제 집에서 저보다 더 당당하게, 교수까지 꿰차 앉아있는 해리의 모습에 절로 이마에 힘줄이 서는 것 같았다.
“그래…… 약물 개발중이라고? 내 세브를 얼마나 괴롭혔을지 눈에 보이는군, 말포이. 분수에 넘치는 행동이 아닐까, 재고도 해볼 줄 알아야 할텐데.”
“나에게 먼저 마법약에 소질이 있다고, 적성을 알아봐주신 건 스네이프 교수님이야, 포터. 교수님의 교과서를 훔쳐야만 수재 소리를 듣는 너랑은 난 차원이 다르거든…….”
으스대며 눈썹을 꿈틀이는 드레이코에 해리가 으득, 이를 갈았다. 저 자식이 혼혈왕자 교과서까지 알고 있다니. 뭘 얼마나 떠들어댄건지 스네이프를 깨워 화를 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뭐, 성공하길 빈다. 저주 주문에 듣는 약이 생기면 좋으니까.”
드레이코는 하, 기막힌 웃음을 흘리며 해리를 노려보았다. 진짜 저 새끼를 왜 좋아하는지 교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해리가 스네이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드레이코는 왼쪽 가슴 부근이 욱신거렸지만, 너무 열 받아서 그런거라고 넘겼다.
“포터, 너야말로 네 분수에 맞는 애인을 사귀지 그러냐?”
“……뭐라고?”
들짐승 같은 눈빛이었다. 안광이 비치는 녹색눈의 음험함에 순간 드레이코의 목 뒤가 오싹해졌다. 그러나 볼드모트의 앞에서도 있었는데 또래의 남자 앞에서 기가 죽고 싶지는 않았다. 드레이코는 부러 더 상체를 세우며, 입꼬리도 비뚤게 끌어 올렸다.
“교수님이 취해서 하시는 얘길 들었는데 말야…….”
“……?”
“요즘 네가 안 만져준다고, 네가 이제 애정이 식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 그럴거면 교수님을 놔주지 그래, 포터?”
“무슨…… 미친 소리야, 너?”
해리가 미간을 찡그리며 윽박질렀다. 안 만져준다고 애정이 식었다고 여겨? 누가 접촉을 금지했는데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기가 막혀서 웃음도 안 나왔다.
움찔, 그 순간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작은 움직임에 해리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스네이프의 미간이 살짝 좁혀 들었다. 드레이코도 해리의 반응으로 스네이프가 깨려고 하는 걸 알았다. 드레이코는 잠들기 전에 교수가 제게 보였던 행동을 떠올렸다. 살짝 얼굴을 붉힌 채, 드레이코는 교수의 찌푸린 미간에 시선을 두었다.
“해리……?”
스네이프가 멍하게 해리를 올려다 봤다. 해리는 작은 한숨을 내뱉고, 최대한의 다정으로 그를 내려다 보며 웃었다.
“걱정시키고 그래요, 왜.”
“해리, 네가, 싫어할까봐…. 드레이코, 니까….”
“그것보다는 말없이 날 두고 사라지는 게 더 싫거든요?”
어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실까. 스네이프의 눈 밑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자 푸스스 웃는 얼굴이 귀여웠다. 취해서 솔직한 세베루스는 이런 느낌이구나. 귀엽네, 평소보다 더.
“그것보다, 내가 요즘 안 만져준다고 말포이한테 다 일러바쳤다면서요. 그러면서 당신이 먼저 만지지 말라 했다는 소린 안 하고.”
“내가 그랬어도오…. 해리 네가 너무, 나를 안 만져줘서… 난, 너 만지고, 싶었는데…….”
아, 미치겠네 진짜. 해리는 참지 못하고 스네이프를 안아 일으켜 키스했다. 앞에서 드레이코 말포이의 눈이 썩어가든 말든, 제 알 바는 아니었다.
스네이프가 으응, 작게 웃으며 해리의 어깨를 팔로 안았다. 해리는 키스하면서 오른손을 뻗어 스네이프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쓸어 올렸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접촉이었다. 흥분이 마구 끓어 올랐다. 스네이프가 노골적으로 하반신을 붙여오는 게 느껴졌다. 해리는 입을 맞추면서도, 자꾸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아, 귀여워. 너무 좋아 세브…….
“우리 집을 삼류호텔 취급하지 말아줄래, 포터?”
신나게 혀를 섞는 중에 미간이 확 찡그려졌다. 여전히 입을 맞추면서, 해리는 스네이프의 얼굴 너머로 고개를 기울여 드레이코를 마주했다. 다리를 꼰 채,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고 머리를 괸 드레이코가 무표정으로 저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해리도 말포이 놈이 관전 중에 제 연인을 끝까지 안을 생각은 없었다. 해리는 드레이코와 대화를 하기 위해, 스네이프의 얼굴을 잠시 떨어뜨렸다. 그런데 스네이프가 다급히 다시 입을 맞춰 와, 당황하고 말았다.
“싫어…. 나 싫어진거야, 해리? 왜 키스 안 해줘?”
“아니- 세베루스, 잠시만…. 말포이랑 대화 좀, 잠깐, 아니, 안 싫어요….”
“빨리이…. 나 하고 싶어. 해리, 여보… 나 임신시켜줘…….”
“…….”
스네이프의 등을 안은 해리의 손이, 뚝, 소리가 날듯 굳어 멈췄다. 드레이코는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 데스 이터에게 가해지는 신종 고문이 따로 없었다. 드레이코는 돌처럼 굳은 해리와 눈을 마주쳤다. 표정 없는 드레이코가 엄지로 뒤쪽의 문을 가리켰다. 손님방이니, 자고 가. 해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드레이코 말포이가 마음에 든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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