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해리는 스네이프의 무릎 아래를,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그의 까만 머리카락이 제 목덜미를 간질이고, 그의 뜨거운 숨길에 아찔한 취기를 느끼며 눈가를 찡긋거렸다. 아이처럼 파고드는 그를 보호자처럼 안아 일으켰다. 무릎 아래의 손이 지팡이를 살짝 흔들어 문을 열었다. 처음 들어오는 낯설고 아름다운 방, 하얀 침구가 깔린, 그리운 호그와트가 생각나는 넓직한 사주식 침대. 스네이프를 그 위에 눕혔다. 제 처연한 연인은 떨어지기 싫다며 매달려왔다. 해리는 그를 달랬다. 취한 연인은 보다 더 솔직하고, 사랑스러웠다.
하얀 침구 위를 까맣게 물결치는 머리카락, 술에 먹혀 붉은 얼굴과 꿈을 꾸는듯한 몽롱한 시선이 해리를 사로잡았다. 해리는 그의 위로 올라가서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렸다. 그가 입고 있는 까맣고 얇은 셔츠가 구불구불 살결을 타고 흘러내렸다. 해리가 볼 때마다 감탄하는 눈부시도록 하얀 거죽, 마른 뼈대. 창백한 살결은 차라리 푸르다고 해야할 것이다. 날카롭고 삐죽한 그의 육체마저도, 그 자신이 세베루스 스네이프라는 것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는, 그의 정체성으로 빚어져 있는 것 같았다. 해리는 그것에 늘 놀라워하고, 감탄했다.
해리의 큰 손바닥이 마른 배를 더듬었다. 미끄러져 내려가 잘록한 허리를 쓸고, 위로 다시 올라와 작은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걸었다. 스네이프는 그 모든 자극마다 반응하려고 했다. 한 달만이었다. 스네이프는 너무 오래 참았다. 제 위에 올라타 제 몸을 쓰다듬는 해리를 맹목적으로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말라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축였다. 스네이프는 자신의 아래가 젖는 걸 느꼈다.
“해리…….”
“응, 세베루스.”
“해리, 나…….”
해리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이 안온하고 다정했다. 스네이프의 목소리는 숨결 앞의 작은 꽃잎처럼 떨렸다. 해리는 이 순간 어쩐지 첫 관계의 날을 떠올렸다. 조심스럽고, 이른 오후인데도 촉촉했고, 가슴이 잔잔하고도 빠르게 뛰었던 그 행복한 순간을 상기했다.
스네이프가 자신의 손을 내려, 제 마른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해리는 그 모습을 살짝 웃으며 바라봤다. 먼저 스스로 제 것을 만지려나 싶어, 그의 흥분이 귀여웠다. 스네이프는 제 다리 사일 더듬더니 허벅지를 모아 좁혔다. 동그래진 눈이 해리를 보았다. 언뜻, 술에 깬 것도 같아 해리는 그와 다정히 시선을 맞췄다.
“해리…… 나, 나 밑을, 벗겨줘…….”
기꺼운 요구였다. 해리는 스네이프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이어 드러난 하얀 속옷이 어쩐지 질척하게 밀착 되어 보였다. 벌써 쿠퍼액을 이만큼 흘렸다니, 해리는 스네이프의 배꼽 밑에 입 맞추며 찬찬히 웃고, 속옷을 내렸다. 자연스레 드러난 스네이프의 성기의 끝은, 그러나 예상 외로 덜 젖어 있었다. 해리는 의아함을 느꼈다. 허벅지에 내린 속옷에는 분명히 스네이프의 다리 사이와 길게 이어지는 맑은 액이 보였다.
해리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이어 입이 벌어지고 눈이 커졌다. 살로 덮여 있어야 할, 스네이프의 음낭과 항문의 사이 회음부에 새로운 여성기가 생겨 있었다. 젖은 액은 거기에서 질퍽히 흐르고 있었다.
“세베루스, 나한테 말도 없이…….”
마법을 성공시킨 것을, 왜 진작 저에게 말하지 않았냐는 타박이었다. 스네이프는 겁을 집어먹은 눈이었다. 그 자신조차 마법이 성공한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해리는 그런 스네이프에, 녹색 눈을 맞췄다. 자신의 눈을 보면 편안해하는 스네이프를 알고 있었다. 태어나 가져본 적 없는 새로운 생식기에,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이 안타깝고, 어쩔 도리 없이 사랑스러웠다.
해리는 생각할 것 없이 그의 다리 사이에 코를 박았다. 혀를 내어 젖은 새 음부에 밀어 넣어봤다. 무릎을 세운 스네이프가 아으, 아, 당황한 신음을 토하고 다리를 펄쩍거렸다. 해리의 코와 입술, 턱 주변으로 스네이프가 흘린 애액이 묻었다. 부드럽고 촉촉한 새 음부는, 줄곧 탐했던 뒷구멍과 다르게 애초부터 성교를 위해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믿을 수 없게 부드럽고, 젖어 있었다.
“하, 흐으…. 생겼어…?”
“네, 생겼어요. 만져봐요.”
젖은 입주변을 소매로 대충 훔쳤다. 해리는 스네이프의 오른손을 잡아 미끌거리는 음부에 놓았다. 제 침과 스네이프의 애액으로 아래가 온통 투명하게 번들거렸다. 스네이프의 손끝이 녹은 얼음 위처럼 미끄러졌다.
“이상해…….”
겁먹은, 그러나 호기심 어린 소년처럼 스네이프는 새로운 자신의 육체를 탐구했다. 스네이프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여성기의 아래 위를 문질렀다. 음핵에 엄지를 얹고 굴리자, 절로 다리가 벌어지며 입술이 열렸다. 해리는 제 앞에서, 다리를 쫙 벌리고 여성기로 자위중인 스네이프에 성기 끝이 아릿하게 아팠다.
“해리, 나, 임신하고 싶어….”
눈이 풀린 채, 음핵을 문지르며 스네이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해리는 드레이코의 앞에서도 그랬지만, ‘임신하고 싶다’는 문장의 파급력이 이렇게 큰 줄은 처음 알았다. 스네이프의 입에서, 스네이프의 목소리로, 스네이프의 의지로 말해서 그런걸까. 이미 해리는 흥분이 고통에 가까웠다. 이렇게 많은 물로 젖어 있으니, 넣어도 되지 않을까? 해리가 손가락 두 개를 질구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뒤와 다르게 너무 부드러운 삽입이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스네이프가 다리를 벌린 채 자위하는 걸 내려다보며, 해리는 머리 위로 티셔츠를 벗었다. 해리가 벗는 모습을 바라보는 스네이프의 손가락이 빨라져갔다. 하읏, 흐으…. 흥분한 숨을 흘리면서 노골적인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독하게 솔직한 스네이프였다. 그의 욕망이 눈에 보이게 넘실거려서 해리는 웃었다. 해리의 바지와 속옷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스네이프의 오금을 잡아 허공으로 처들었다. 녹색 눈과 검은 눈은 서로에게서 시선을 뗄 줄을 몰랐다. 스네이프의 다리를 들어 잡은 자세 그대로, 해리가 삽입을 시도했다. 처음 들어가보는 곳이었다. 원래부터 거기에 있어 자신을 맞아들였던 것마냥, 새로운 음부는 해리를 쉽게 받아들였다. 해리는 삽입하는 내내, 스네이프를 바라보았다. 스네이프는 제 음부보다 해리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황홀하게 저를 보는 그 표정이, 귀두가 입구에 걸렸을 때 찡그린 눈가가, 묵직한 삽입에 빠듯이 조여오는 좁은 안쪽이, 떨리는 가느다란 두 다리가 해리를 미치게 했다.
“진짜 좁다…….”
목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내벽이 성기를 끊을듯이 압박해서 숨이 부족했다. 해리는 벌써 땀이 맺혀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꼭 취한 제 연인처럼 얼굴이 붉어져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첫 삽입에도 스네이프는 버틸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좁은 구멍 안 쪽 어딘가에 정말로 자궁이 있는 걸까? 해리는 스네이프의 밋밋한 배를 바라보았다. 저 배가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는 걸 상상했다. 하, 젠장. 해리는 너무 흥분했다. 허리 아래의 움직임이 성급해지기 시작했다.
“앗…. 어…? 으응……흐, 으응, 아-”
평소와 다른 곳이 쑤셔지는 느낌에, 스네이프는 살짝 놀랐다. 하지만 제 안을 꽉 채우는 해리의 것에, 금세 물을 질질 흘려보내며 잔뜩 달아올랐다. 흥분할 때마다 분비되는 애액에 시트가 푹 젖어들었다. 말포이가, 당신이 자기 집 침대에, 소변 봤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예요? 척척한 시트에 해리의 무릎이 닿였다. 박으면서 해리는 연인을 짓궂게 놀렸다. 스네이프는 너무나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세게 도리질 쳤다. 물론, 해리가 남이 보도록 둘의 정사 흔적을 남겨놓을 리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창피했다. 해리의 상체가 앞으로 내려와 스네이프의 귓가에 얼굴을 기대고 허릿짓을 했다. 세브, 진짜 물 많다…. 아래서, 질척이는 소리 들려요? 응? 해리가 속삭이는 말들에 정신이 아찔아찔했다.
해리의 것이 귀두 밑까지 빠져 나갔다가, 뿌리의 조금 더 앞까지 스네이프의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이 구멍은 좁고, 길이 짧았다. 반려의 안쪽이 다칠까, 해리는 뿌리까지 박아넣는 건 본능적으로 피했다.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스네이프의 내장에 손상을 입혔다간, 제 욕심에 남성인 그에게 아이를 요구해놓고 상처까지 입혔다간……. 해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스네이프에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론에서 스네이프에게 계속 자기희생, 헌신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 그의 전쟁영웅 타이틀을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해리는 정말로 자신에 한해서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이렇게 자기 몸을 바치는 헌신을 목도할 때면, 참을 수 없게 그가 사랑스럽고, 또 너무 미안했다.
“세베루스,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당신을….”
감정이 넘실거렸다.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한 것을 스네이프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자신의 이 마음은 사랑보다도 더 컸고, 아득히 깊었다. 스네이프가 해리의 등을 끌어 안았다. 한 몸처럼 맞붙은 이 느낌이 좋았다. 어떻게 2주나 되는 시간동안 해리와 떨어져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도…. 너를 너무, 사랑해, 해리….”
“응, 알아요. 알고 있어요….”
“알아…? 아니, 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 아… 사랑, 하는지…… 너는 모를 거야, 해리….”
스네이프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해리를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었다. 불가능도 전부 가능으로 바꿔서 해낼 것이었다. 그를 위해 저의 마법적인 능력, 자기자신, 모든 걸 이용해도 좋았다. 해리를 위해 존재하는 게 기뻤다. 나는, 너의 것이니까, 해리 포터. 스네이프는 해리의 등을 안고 어깨에 이마를 비비면서, 해리의 체온을 느꼈다.
다음날 아침, 7시가 되기 몇 분 전에 해리는 눈을 떴다. 스네이프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해리는 얼룩진 시트 부분에 지팡이를 대고 흔적을 지웠다. 연인의 다 벗은 몸에 감긴 이불을 다시 제대로 덮어주었다. 해리는 옷을 입으면서 그를 내려다 보았다. 스네이프가 간밤에 여러 번, 임신을 시켜달라고 보채며 울었던 게 생각났다. 취해서 그런지, 그는 그런 말을 쉽게도 내뱉었다. 마주 보며 누워서, 마주 보고 올라타 앉아서, 엉덩이만 치켜 올린 채 뒤로 고개를 돌려서 저를 바라보며, 스네이프는 끊임없이 사정을 요구하고 젖은 구멍을 벌렸다. 물론, 지칠 때까지 그를 몰아 붙이면서도 해리 역시 자제를 몰랐다. 야하고 아름다운 그를 앞에 두고 적당히를 찾는 게 어려웠다. 해리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방 문을 나섰다.
응접실은 집요정이 치워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해리는 크리처를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어차피 자신도 호그와트로 가게 되니, 크리처를 굳이 데려올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 때, 해리가 나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말포이가의 집요정이 갑작스레 뿅, 하고 나타났다. 이 집에 머글의 cctv 같은 게 달린 건 아니겠지……. 해리는 스네이프와의 밤을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드레이코가 싫긴 하지만, 관음증은 없을 것이다.
“포터 씨, 따로 아침을 내드릴까요? 아니면, 드레이코 도련님께서는 늘 7시 30분에 아침식사를 드십니다.”
드레이코와 대화를 하는 편이 좋았다. 해리는 스네이프를 깨워 같이 먹겠다는 대답을 했다. 집요정은 끄덕이더니 드레이코의 방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어 오라는 드레이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리는 새삼 여기가 드레이코의 방에 딸린 개인 응접실인 게 생각났다. 부내가 철철 흘러 넘치는군. 제 어린시절의 벽장이 지금 해리가 앉아있는 암녹색 카우치만 했던 것 같았다.
문이 열렸다. 얇은 회색 실크가운을 입은 드레이코가 집요정의 뒤에서 머리를 쓸어넘기며 해리를 보았다. 어딜 봐도 그는 권태로운 귀족의 도련님이었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유치해 보이는 것도 없고, 이 대저택에 어울리는 품새였다. 짜증나네…. 해리는 팔짱을 끼고 드레이코를 노려봤다. 스네이프에게 언감생심 품었다간, 영웅의 이름을 앞세워 아즈카반에 처넣어 버려야지. 그제야 해리의 입꼬리가 만족스레 올라갔다.
“교수님은 주무시나?”
“그래. 피곤할테니.”
해리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드레이코는 해리의 저 빤질한 낯짝에 홍차를 한 번 부어보고 싶었다. 어젯밤처럼 1인소파에 앉으며 드레이코가 집요정에게 손짓을 했다. 알아 들었는지 집요정은 따듯한 물을 따라 주인과 손님의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는 모양으로, 허리를 공손히 굽힌 뒤 사라졌다.
“궁금한 게 있는데, 포터.”
“뭐지?”
컵을 들어 물을 들이키며 해리가 흘깃거렸다. 드레이코는 심상한 투로 물었다.
“교수님이 정말로 임신이 가능한 것 같던데. 내 생각이 맞지 않나?”
“…….”
대번에 험악해진 해리의 표정을 보고서도 드레이코는 굽히지 않고 시선을 마주했다. 해리는 짜증스레 컵을 내려놓고, 다시 팔짱을 꼈다.
“네가 교수님에게 요구했다는 게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아서.”
“밤새 안 자고 그 생각만 한 건 아니겠지? 말포이. 이 집에 방음마법이 걸려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데.”
“물론, 걸려 있어 포터. 어제 교수님이 취해서 하신 말씀 중에 들은 거야. 분명치 않은 발음이라 헷갈렸거든. 그런데 뭐…… 어제 그 모습을 보니.”
드레이코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야릇한 교수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매가 올라갔다.
“교수님은 남자인데, 어떻게 한거지?”
“마법사가 마법을 부렸겠지, 뭘 어떻게 하겠냐?”
“미친놈. 교수님이 한번에 동의 하셨을리 없는 일을. 자랑인가?”
“우리 일에 관심 꺼, 말포이. 세베루스는 내게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하니까.”
드레이코가 역겹다는 얼굴로 해리를 흘겼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물 컵을 내려놓고, 턱 밑에 손등을 괴었다. 그런 쪽으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자신의 기숙사 사감인데, 저 해리 포터가 어떻게 알고 이렇게 그를 꿰찼는지, 솔직히 욕심이 났다. 어쩌면 해리 포터를 그렇게 사랑하는 눈으로 보는 교수의 존재가 부러웠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옆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으니까.
“이해가 안 가. 왜 세베루스가 네게 자기 과거를 얘기해준거지?”
“아끼는 제자라서 그런거겠지, 포터.”
“입 닥쳐, 말포이.”
오랜만에 뱉어보는 말이었다. 그에, 해리도 드레이코도 짤막히 웃음이 터졌다. 둘 사이에 어떤 유해한 공기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뭐, 내가 생각하기엔…… 스네이프 교수님이 내가 전쟁 이후로 혼자 박혀있는 모습을, 몹시 못마땅해 하시는데. 아무래도 지금 내 모습에서 교수님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시는 것 같아.”
“널 위로해주기 위해서라고?”
그건 더 마음에 안 드는 이유지만, 해리는 그냥 한숨만 한 번 쉬고 말았다. 드레이코 말포이를 싫어하고 한심해하긴 해도, 자신이 그를 진짜 아즈카반에 넣고 싶을 만큼 싫어하냐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말포이가가 보석금으로 풀려났다고 했을 때도 해리는 루시우스는 몰라도 드레이코는 다행이라고 지나가듯이 생각했을 정도였다.
해리는 머틀의 화장실에서 울고 있던 드레이코를 떠올렸다. 덤블도어의 앞에서 사시나무처럼 떨며, 살인 저주를 결코 입에 올리지 못하던 나약한 모습도, 악마의 화염에 불타는 필요의 방에서 제게 구조를 바라며 간절히 올려다 보던 얼굴 역시. 그리고 지금도 나약한 정신으로 이 대저택에 저를 혼자 가두고 있는 드레이코 말포이였다.
“그리고 내게 네 얘기를 하기 위해서도, 교수님께선 당신의 과거 이야기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신 거 같아. 나도 들었어, 포터… 그 ‘예언’……. 교수님이 처음 듣고, 어둠의 주인에게 전달했던 거라고….”
해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스네이프가 예언을 듣고, 볼드모트는 예언이 가리키는 아이가 저라고 생각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그리고 제 부모를 죽이고, 자신은 죽이지 못했다.
“교수님은…… 네 부모가 죽은 게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셨어. 그래서 포터 네게 가족을 꼭 만들어줘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으신 것 같…….”
“입 닥쳐라, 드레이코 말포이.”
흠칫 놀란 드레이코와 해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시무시하게 화난 얼굴의 스네이프가 서있었다. 낭패를 느끼며 드레이코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꾹 물었다. 해리는 마음이 아팠다. 제게 죄책감을 가진 스네이프를 쳐다보기가 아플 정도로. 단순 죄책감만으로, 의무감으로 제 아이를 임신하겠다는 건 아닐테지만 스네이프가 정말로 그런 마음도 갖고 있을 거라는 걸, 이제 해리는 알았다.
스네이프는 둘의 뒤에서 주먹을 움켜쥐고 떨었다. 해리의 숙여진 뒤통수에서 저에 대한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런 감정을 해리가 느끼라고 자신이 노력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포터, 정말로 네 아이를……. 아니, ‘우리’의 아이를 원했다. 남자인 자신이 임신을 각오하는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동반되는 것이었다. 스네이프는 간밤의 기억이 흐릿하지만 분명한 건, 제가 노골적으로 임신을 원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걸 자신이 의무라고만 여겨서 해리에게 재촉한 게 아님을, 해리는 알아주어야…….
스네이프는 드레이코를 한 번 힐끗거렸다. 천천히 해리에게로 다가가 옆에 앉았다. 해리가 크고 따듯한 손으로 제 찬 손을 잡아 쥐었다. 드레이코에게 들리지 않게 해리가 고개를 숙였다. 스네이프의 귀를 찾아서 조그맣게 속삭였다.
“신경쓰지 말아요. 말포이 쟤가 뭘 알겠어요? 우리가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아이를 원하는지 몰라서 하는 말이지.”
스네이프는 해리가 저에 대한 연민을 티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위로하려 이렇게 말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제 과오는 모른척해주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만 덮으려 하는 연인이었다. 해리의 가족을 잃게한 것이 자신이라는 죄의식. 이 죄책감이 스네이프에게서 완전히 사라질 일은 없었다. 그래도, 스네이프도 해리의 옆에서는 오직 이게 서로의 사랑때문에 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하는 척 하기로 했다. 해리가 그러길 원할 것 같았다.
“그 상처가 아직도 있다고?”
이름 모를 외국의 스프를 숟가락으로 뜨던 해리가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생각도 못했는데, 드레이코의 몸에는 제가 쏜 섹튬셈프라에 베인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다고 말했다. 지난 저녁, 저주 주문의 상처 치료약을 개발중이라는 드레이코의 말만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싶었던 일이었다. 제가 실수로 날린 저주 주문이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흉이 남았을 줄은, 해리는 뒤늦은 죄책감에 목이 막혔다.
혼혈왕자, 스네이프의 교과서에 ‘적에게 사용’이라는 설명이 적힌 주문이었다. 그 주문을 날리고, 피웅덩이에 쓰러져 있는 드레이코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해리는 이기적이게도 스네이프가 그를 잘 보살폈겠거니 했다. 본인의 잘못에서 회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저질러놓고 도망쳐버렸던 자신의 과오가, 지금 이 순간 해리의 뒤통수로 강한 둔통을 일으켰다. 해리는 아침식사 전, 스네이프의 과오로 죽어버린 제 부모의 얘기를 들었다. 그랬는데, 제가 이런 잘못을 짓고 줄곧 몰라왔던 것을 이제야 알았다.
해리가 숟가락을 스프에 내려놓았다. 야채 건더기가 떠다니는 스프에 수저의 머리가 깊이 빠져 들었다.
“……미안, 말포이. 전혀 몰랐어.”
거만한 눈으로 해리를 보던 드레이코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과 따위로 네 저주의 흔적이 사라지진 않지, 포터. 드레이코다운 가벼운 빈정거림이었다. 하지만 해리는 드레이코가 몸에 남은 상처만큼, 마음으론 그 일에 깊게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드레이코를 진정 외롭게 하고, 고통 속으로 몰아가는 상처는 자기 자신이 저지른 과오였다.
“어차피 내 몸에 흉터가 있든 말든, 몸을 봐줄 애인도 없고 말야. 너처럼, 포터.”
“그 애인이 지금 우리 앞에 앉아있는 교수님인데, 말포이.”
“아, 이런. 실례했어요, 교수님.”
눈썹을 으쓱인 드레이코가 크큭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제 앞에 해리와 스네이프를 앉히고 식사를 하고 있는 것도 우스웠고, 이 셋이 앉아 있는데 편안한 분위기인 것도 말이 되지 않게 느껴졌다.
“포터, 오러는 관뒀다며?”
“방구석 도련님이 소식통은 빠삭하시군.”
“그 소식통이 우리 앞에 앉아 있는 교수님이라서.”
“포터, 드레이코. 재미있나, 지금?”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스네이프가 입을 열었다. 학창시절 기싸움을 벌이던 두 제자들이 이제는 합심해서 저를 골리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저 둘이 합이 맞는 친구였다고. 그러나 성정들을 보았을 때, 충분히 그들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뭐, 하여튼. 맞아, 말포이. 오러 일을 관두고 호그와트 교수를 준비중이야. 다시 공부 하려니까 머린 좀 아프더라.”
“잘 다니던 직장을 왜? 설마 포터, 교수님 옆에 있으려고 그런 건 아니겠지.”
벌써 정답을 알아버린 드레이코가 넌덜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리는 뿌듯한 얼굴이었다. 스네이프는 고개를 젓고, 제 몫의 식사에만 관심을 두기로 했다.
“열아홉 살 교수라니, 어지간히 무시 받겠는데?”
드레이코가 입꼬리를 올려 비웃었다. 해리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스네이프 쪽을 돌아보았다.
“세베루스, 첫 부임에 무시 당했나요? 당신, 스물두 살이었잖아요.”
드레이코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고보니, 눈 앞의 스네이프 교수의 첫 부임 시기도 굉장히 일렀다. 학창시절에 집단 괴롭힘을 당했었다는 말 또한 생각났다. 그 당시를 기억하는 학생들이 제자가 됐을 터인데…….
스네이프는 자신의 과거가 주제가 되는 상황이 불편스러웠다. 정말이지, 이 인생은 스스로 평가해봐도 마음에 드는 역사가 없군. 그것도 식사를 먹다가 나누기에는 적절치 않은, 술자리 안주감으로도 입맛을 떨어지게 하는 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일 것이다. 해리는 스네이프의 표정을 보고 얼굴을 한 번 더 굳혔다. 저 표정이 이미 질문의 답을 하고 있었다. 볼드모트가 종적을 감춘지 불과 몇 달만에 호그와트의 교수로 등장한 어린 데스 이터, 세베루스 스네이프……. 알버스 덤블도어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무조건적 변호가 있었다지만, 해리 역시 스네이프의 기억을 보기 전까진 그의 진실을 오해했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얼마나 심했을지 감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의심과 분노의 굴절이 어린 교수에게로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릴리의 죽음 앞에, 그 모든 비난은 스네이프에게 어떤 생채기도 내지 못했을 것이란 것도…….
“듣고 싶은 얘기가 뭐지? 포터, 드레이코. 스물두 살의 전 데스 이터, 학교를 다닐 땐 동급생들에게 괴롭힘 당하던 찌질하고 기름진 교수가 저보다 겨우 너다섯살 어린 학생들에게 어떤 멸시와 조롱을 들었는지?”
해리는 치아를 꽉 물고 화와 슬픔을 참았다. 스네이프가 잘못을 저지른 범죄자인 건 맞았다. 하지만 그가 피해자였던 것으로 조롱 당하는 분위기까지는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심지어 그 괴롭힘의 주동자가 자신의 아버지이고 사랑하는 대부 시리우스 블랙이라는 것도.
“그 어린 학생놈들이 날 괴롭히고, 놀리고 싶어해봤자 네 아빠와 친구들에 비해선 발톱의 때만큼도 못한 수준이었고, 난 그 당시 그것은 신경도 안 쓰일 정도로 무너져 있었으니…… 쓸데없이 뒤늦은 동정 품지마, 포터.”
스네이프는 차갑게 일갈했다. 해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드레이코는 그 둘의 지독하게 얽힌 고리에 인상을 썼다. 악연도 저런 악연이 없지 싶었다. 어쩌다 해리 포터와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게 된건지─
“하아, 죄송해요 교수님. 미안, 포터. 이런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널 놀리는 것도 교수님 앞에선 자중해야겠네.”
드레이코가 불쑥 꺼낸 말로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했다. 드레이코가 이런 노력을 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눈앞의 연인은 일견 서먹해보였다. 어젯밤, 밤새 뭔 짓을 했을지 남의 눈에 다 보이게 들어가 놓고서. 우스운 아침이었다.
“미안해요, 세베루스. 앞으로 과거 얘기 같은 건 묻지 않을게요. 다 지나간 일이니까.”
스네이프는 해리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스네이프는 해리가 저를 살린 이후의 삶에 집중하길 바랐다. 자신의 과거, 과오를 기억하고 신경써야 하는 건 오직 저 혼자만의 일이어야 했다. 자신의 구원자가 저의 무게가 아닌 것을 짊어져서는 안 되었다. 예언도, 본인의 가족을 잃은 것도, 그의 아버지와 대부가 저지른 잘못도,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저지른 모든 죄들도 모두 해리의 탓이 아니었다. 해리가 말했듯이, 모두 지나간 일이기도 했다. 이제 바꿀 수가 없는 과거였다. 그리고, 스네이프는 새삼 깨달았다. 미래에서 와서 자신의 목숨을 살린 해리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건지 새삼 알게 되었다. 해리는…… 바꿀 수 있었다. 그 위대한 영웅은 그럴 수 있었다. 세베루스 스네이프에게 두번째 삶을 주고, 첫번째의 삶과 완전히 바꿔줄 수 있었다.
“다음에 ‘또’ 오지, 말포이.”
“나는 교수님을 초대한 건데, 포터?”
“그래서 온다는 거야, 말포이. 이 정신 나가게 넓은 집에 혼자서만 박혀 있으니까 뇌가 잘 안 돌아가나본데. 그래서야 마법약 개발이 되겠냐 싶어 내 애인이 널 도와준다는 거니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지.”
“하, 백수라 시간이 넘쳐나니 여기저기 간섭할 시간도 넘쳐나는군, 포터. 너 같은 무식한 놈이 들어와서 내 마법약 연구실의 기운을 흐려놓으면 어떻게 책임질거지?”
“나보다 더 오래 된 백수라서 넘쳐나는 시간에 대한 이해도는 높구나, 말포이.”
스네이프는 저 둘이 계속 이런 대화를 나눌 거면, 굳이 정원을 함께 걸어 대문까지 올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오전에, 대저택의 아름답고 푸릇한 정원에서 두 청년은 하늘로 언성을 드높였다. 금방이라도 열한 살 꼬마들로 돌아가 서로에게 지팡이를 겨눌 태세라, 스네이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핀도르고 슬리데린이고 각자 점수를 깎아버리고 싶었다. (어느 쪽 기숙사의 점수를 더 많이 깎아버릴지에 대한 갈등은 조금 있었다.)
“포터, 그냥 여긴 앞으로도 나 혼자 오겠다.”
“무슨 소리예요, 세베루스! 저 자식의 어딜 믿고 당신을 혼자 보내요?”
드레이코는 그저 자신의 제자─ 이런 소리가 해리에게 씨알도 먹힐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한숨만 한 번 쉬고 말았다. 이어 스네이프가 지팡이를 부드럽게 휘둘러 육중한 검은 대문을 열었다. 해리도 뒤따라 문 밖으로 나왔다. 방금까지 소릴 높여가며 싸운 것이 무색하게, 스네이프의 두 제자는 뻔뻔스런 시선을 교환했다.
“다음 번엔 내 셔츠값 50갈레온과 함께 와라, 포터.”
“말포이, 다음엔 값 싸고 질 좋은 옷가게의 명함과 함께 찾아오지. 아무래도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을 상대로 한 사기범죄에 연루된 것 같은데, 전직 오러로서 널 도와줄게.”
“그것 참 고마운데, 조언을 할 거면 10갈레온을 더 내. 네 형편 많이 봐준 거야, 포터. 그럼, 안녕히 가세요 스네이프 교수님. 포터가 또 속 썩이면 절 찾아오시고.”
“세베루스, 말포이가 졸린지 헛소릴 지껄이네요. 잘 수 있도록 얼른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둘이서 경쟁적으로 대화를 쏟아냈다. 스네이프는 표정 없이 그들을 보다가 드레이코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가지, 포터. 그 작은 목소리에도 해리는 바로 팔짱을 끼며 치아를 드러내고 웃었다. 드레이코는 못마땅하게 해리를 보았지만, 이내 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드레이코는 어깨를 으쓱하며 저택의 안으로 순간이동했다. 모처럼 소란스러운 밤과 아침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빙그레 미소 지었다.
집 거실로 순간이동한 해리와 스네이프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급격히 서로의 얼굴이 굳어감을 느꼈다. 드레이코의 앞에서는 투닥대고, 빈정대며 평소와 같은 티를 냈었지만, 둘 다 속으로는 아침의 대화들을 신경쓰고 있었음을 서로 알아채었다.
해리는 베란다로 가서 난간에 팔을 올렸다. 담배는 피운 적 없는데, 꼭 이런 기분에는 그런 게 어울릴 것 같았다. 해리는 멍하니 담배연기 대신에 한숨을 내쉬었다. 스네이프는 그런 해리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해리에게 무게를 지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해리 포터가 자신의 애인이랍시고, 제 죄의 무게까지 얹으려는 오만은 스네이프도 사양이었다. 따지자면 자신이 데스 이터였던 것이, 어떤 것에서든 최악의 이유였다. 힘을 얻고자 했던 과욕이 불러온 재앙이었다. 예언도, 릴리의 죽음도, 호그와트로 다시 돌아오고나서의 모든 비난과 멸시와 조롱도.
“세베루스. 이리 와봐요.”
그렇지만 이렇게, 단 둘만이 남은 상황에서, 해리가 자신을 불러 세우는 이 순간에는 스네이프는 두려움에 떨었다. 해리에게서 무슨 소리를 듣게 될까, 두려움에 눈꺼풀이 꽉 닫혔다가 겨우 떠졌다. 그렇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세베루스 스네이프는, 해리 포터가 부르면 이끌려갈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해리가 손가락으로 꽃 화분이 가득한 카페를 가리켰다. 일전에 스네이프가 제 취향이라며 초면에 집적거리던 머글 사장이 있던 카페였다. 그 후로 그 쪽 길로는 발길도 끊은 스네이프였다.
“저 가게 사장 이름, 시리우스더라고요. 알았어요?”
“…응.”
“그래서 저길 박차고 나온 거였어요? 가게 안에서의 추행은 없었는데?”
“포터,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기억도 지운 머글에게 보복하려고 다시 갔던 건가?”
스네이프는 베란다의 난간에 팔을 걸친 해리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안경 뒤의 가라앉은 녹색 눈, 평소와 다른 조용한 분위기에 마음이 스산해졌다. 스네이프는 괜스레 주먹을 꾹 쥐었다 놓았다.
“그 날 제가 카페 앞에 도착했을 땐, 론이 사장을 가게 안으로 데려가서 제대로 얼굴도 못봤으니까…. 당신에게 관심있다고 손목까지 잡은 놈을, 내가 그냥은 못 두죠.”
“……어떻게 했는데?”
열여덟 살의 질투에 눈이 먼 오러가, 이미 기억을 지운 머글에게 정말로 상해를 입혔을까. 스네이프는 해리가 정말로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마법부가 그 사실을 모르게만 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는 여전히 이렇게 인성이 돼먹지 못했다. 제게 소중한 것들만 눈에 보였다.
“…아무 짓도 안했어요.”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얼굴의 해리가 중얼거렸다.
“그 사람 이름을 듣는 순간…… 아무 것도 못하겠더라고요.”
“하, 네 대부랑 이름이 같아서 전의를 상실했나 보지?”
스네이프가 조소를 흘렸다. 해리 포터가 그 이름마저 아끼고 사랑하는 대부이니 그럴만 했다. 하지만 해리는 스네이프의 비웃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 녹색 눈은 습하고 어두웠다.
“아니요. 또 다시 같은 이름의 사람이 당신을 괴롭혔다는 생각에.”
“…….”
스네이프는 왜 그 순간, 자신이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눈물이 전조도 없이 턱 밑으로 흘러 내렸다. 순식간에 온 얼굴을 덮는 눈물을 손으로 가리려 애쓰며 스네이프는 울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제 몸에선 제 의지가 아닌 눈물이 미친듯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과거에 매여있는 자신이 한심하고 억울해서였는지, 해리가 저를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에 어리석게도 감동 받아서였는지 스네이프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이처럼 꺽꺽대며 울었다. 아무도 그 일로 자신을 안아준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지워지는 일들만 목도해왔다. 그리고 자신도 그 중 하나였다. 펜시브에 기억을 덜면서 제 인생에서 삭제시키고 싶은 일이었다.
해리는 제 앞에서 눈물을 쏟아내는 스네이프를, 차마 안지도 못하고, 안쓰럽게 바라보기만 했다. 해리 자신도 제가 느끼는 이 감정들과 생각을 가지런히 정렬할 수 없었다. 제 소중한 사람이, 또 다른 소중한 사람에게 지우지 못할 큰 상처를 줬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기도 하고 미워하고 싶기도 했다.
“저도…… 마법세계에서는 마치 제가 숭고한 영웅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리지만…… 드레이코 말포이에겐 낫지 않는 저주를 날려 놓고, 피를 쏟는 꼴을 보고도 두려워서 회피하고, 여태 그 일로 걔가 얼마나 다쳤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살아왔어요. 내가 여전히 사랑하는 아빠나 시리우스를, 당신을 괴롭혔다고 대놓고 미워할 수도 없어요. 그리고 저는 예언을 듣고 볼드모트에게 말한 당신도 미워하지 않아요. 그 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든 지나간 과거니까. 이미 끝났으니까. 세베루스, 사람이 어떻게 한 가지 면만 존재해요? 나도 좋은 놈은 아니예요. 나 때문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렇지만 나는 내가 살린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사는 이기적인 놈이라고요…….”
해리의 말은 거짓이었다. 해리는 제 탓이 아닌 죽음까지도 저의 탓으로 몰아넣고, 이렇게 자신에게 책임을 뒀다. 그 죽음들에 눈 돌리지 못하면서 이기적을 운운하는 해리가 우스웠다. 스네이프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해리의 앞으로 발을 움직였다. 해리는 그제서야 스네이프의 몸에 손댈 수 있었다. 스네이프의 허리를 안고, 어깨에 턱을 얹고 해리는 연인을 토닥였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품에서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미안해…. 내가 네 가족을 잃게 해서, 그리고 그 때문에 꼭 내가 네 아일 낳아주고 싶었어…. 그렇지만 처음에 내가 그런 마음이 든 건, 내가 해리 너를 사랑하니ㄲ…….”
스네이프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해리가 스네이프에게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순간 그 행위가 입을 막는 것처럼 느껴졌다가도, 이 다정한 온도에 스네이프도 모를 수가 없었다. 해리는 다 알고 있구나.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구나. 스네이프는 해리의 등의 옷깃을 꼭 쥐고 안겼다. 부드러운 입맞춤에 그냥 자신을 맡겼다. 언제나 자신을 구원해주는 저의 영웅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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