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건 어떠세요? 교수님.”

“어떻긴 뭐가 어떻단 거냐, 포터.”


해리는 제 옷을 사야겠다며 들른 옷가게에서 스네이프의 몸에 연신 옷을 대고 있었다. 집는 옷마다 해리가 입기엔 점잖은 느낌이었다. 해리는 자신보다 스네이프의 옷을 고르는 데 더욱 열중하고 있었다. 스네이프는 귀찮단 얼굴로 손을 휘적거렸다. 네 옷을 골라라, 포터. 그렇게 말하는데도 해리는 듣질 않았다. 스네이프의 색다른 머글 차림이 신선한 충격이긴 했다. 하지만 그의 옷이 온통 까만색뿐이어서, 해리는 그에게 좀 다른 걸 입혀보고 싶었다. 분명 스네이프는 매부리코긴 해도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본인이 관리하려는 의지를 전혀 가지지 않았을 뿐이다. 해리는 오늘 그 신선한 충격을 깨달은 김에 좀 더 밀어붙여보고 싶었다. 스네이프를 꾸미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옷가게의 많고 깔끔한 옷들이 해리의 그 충동을 부추겼다. 스네이프는 짜증난 기색이었다.


“손님, 이 옷은 어떠세요?”


해리에게 뭐라고 짜증을 뱉으려던 스네이프는, 어느새 가게의 점원까지 다가와 옷을 보여주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해리는 와! 그거 아주 멋진데요! 라고 말하며 스네이프의 속을 긁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스네이프가 정중히 거절하려는 찰나, 해리보다 옷을 팔려는 염원이 강렬한 점원이 한 번 입어보기를 추천했다. 스네이프는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정말로 의아했다. 분명 포터의 옷을 사려고 들어왔는데, 왜 내가...... 이가 갈렸지만 낚아채듯 옷을 건네받았다. 탈의실로 들어가다 스네이프가 뒤돌아 해리를 노려보았다. 해리는 싱글싱글 웃으며 한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하하! 해리는 이렇게 즐거워도 되는 걸까 싶을 만큼, 즐거웠다.


해리가 옷들을 뒤적이며 제 옷을 골라보는 사이, 탈의실 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해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차림의 스네이프가 서있었다. 점원이 다가와서 핏을 확인하고 있었다. 해리가 보기엔 확인할 것도 없어보였다.


“너무 잘 어울리는데요, 교수님?”

“여기가 학교였다면...”


기숙사점수를 깎았을 테죠, 네. 해리는 싱긋 웃어보였다. 스네이프는 뚱한 얼굴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점원이 추천한 베이지색 얇은 니트는 스네이프의 까만 머리에 잘 어울렸다. 하얀 옷을 입은 스네이프는 처음 보았다. 이런 느낌이구나. 해리는 생각하면서 그의 옆에 다가가 섰다. 스네이프의 하얗고 마른 손가락이 어색한 듯 V자의 목 라인을 만지작거렸다. 스네이프 역시 성인이 된 후론 하얀 옷을 입은 적이 없어서 제 모습이 낯설었다. 이상한 느낌에 뒷목이 간질거렸다.


“그거, 사셨으면 좋겠어요.”


해리는 거울 속에 스네이프와 자신이 나란히 비치는 걸 보며 말했다. 거울 속의 스네이프가 해리의 옆모습을 돌아보았다. 해리는 그럼, 저도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하며 손에 든 옷을 들어보였다. 학생 같은 초록색 후드티셔츠였다. 초록색... 스네이프는 해리의 그것에 약했다. 그래서 해리가 한 말에 휘둘리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살 생각도 없었던 옷을 사게 될 리가 없었다.


해리는 초록색 후드티말고도 체크무늬셔츠와 청바지를 샀다. 스네이프의 니트까지 지출이 꽤 컸지만, 별로 후회는 되지 않았다. 먹을 걸 아껴서 좋은 모습 봤다 치지 뭐. 텍을 뗀 하얀 니트를 입은 채 스네이프가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론이나 헤르미온느가 지금 이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둘은 근처에 보이던 대형마트로 들어왔다. 카트를 끌고, 자동문을 들어서는데 스네이프는 몹시 놀란 눈치였다. 일단 마법 없이 문이 자동으로 열리기도 했고, 안에 머글들도 너무 많았다. 아니면 마트의 내부가 엄청나게 환해서, 호그와트의 어두운 지하 감옥이 익숙한 스네이프에겐 굉장한 부담이 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딱히 스네이프가 자신의 놀람을 티내고 싶지 않아보여서, 해리는 슬그머니 모른 척 해주었다.


“교수님, 요리는 하세요? 사실 전 별로 안 해봤거든요. 페투니아 이모가 시켜서, 아침에 먹을 간단한 것 정도는 하지만.”


양파를 담으면서 해리가 물었다. 스네이프는 혼자 살아서 몇 개 정돈 할 줄 안다고 대답했다. 스네이프는 근처에서 토마토와 호박, 계란 등도 찾아 카트에 담았다. 이제 머글식 쇼핑에 적응된 스네이프는 카트를 끌고 정육코너에서 소고기와 돼지고기도 샀다. 해리는 근처에서 베이컨을 집어서 카트에 담았다.


주류와 음료는 같은 코너에 몰려있었다. 해리는 그냥 지나치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스네이프의 팔목을 붙잡고 이끌었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해 뭐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해리는 개의치 않고 음료코너를 두리번거리다가 곧 콜라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스네이프도 익숙한 까만 물을 보더니 몸을 멈칫했다. 그리고 해리가 콜라 1.5L를 카트에 담는 걸 군소리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해리에게 너 마실 것은 안사냐며 스네이프치곤 매우 친절하게 물어주었다. 해리는 음료수는 생각이 없었지만, 가끔 스네이프와 술을 기울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리가 와인을 고르자 성인이라는 거냐, 포터? 하며 스네이프가 비웃었다. 비웃든 말든, 포터는 성인이 맞았기 때문에 발끈하지 않았다. 사실 해리로선 대단한 발전이었다. 다혈질인데다, 상대는 ‘그’ 스네이프이기까지 했는데. 해리는 정말로 자신이 어른스러웠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피곤하진 않으세요?”


새벽에 그 난리가 있었는데 둘 다 여태 잠도 자지 못했다. 마트 한편에 마련된 휴게실에 앉아 해리가 물었다. 피도 많이 흘린 사람을 데리고 조금 무리한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아, 약국에서 철분제 사올게요.”

“전직 마법 약 교수에게 머글 약이라니...”


스네이프가 재밌단 듯이 중얼거렸다. 해리는 생각도 못했던 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뭐, 머글 약도 효과 괜찮아요. 그리고 과목도 변경하셨잖아요.”

“그래, 변경한 사이 넌 내 교과서로 우등생이 되어있더군.”

“아...”


이거야말로 더더욱 생각도 못했던 말이었다. 해리는 혼혈왕자─스네이프─의 교과서를 신줏단지 모시듯 했던 제 과거가 생각났다. 덤블도어를 죽인 스네이프에 대한 분노로 이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굉장히 유용했어요. 글씨가 깨알 같아 해석하는 게 좀 힘들긴 했지만, 재밌어서, 열심히 코를 박고 해석했죠.”

“흥, 그렇게 내 실력을 훔쳐 그레인져까지 누르고 말이다.”

“안 그래도 그래서 헤르미온느가 교수님의 교과서를 상당히 안 좋아했어요. 제가 혼혈왕자 덕택에 그녀를 이겨서 말이죠. 완전히 리들의 일기장 같은 취급이었다니까요.”

“뭐, 알고 보니 별 다를 것 없는 인물 아니었나.”

“네에? 교수님, 지금 리들이랑 교수님을 비교하시는 거예요?”


해리는 진심으로 뜨악해서 물었다. 하지만 스네이프가 더 어이가 없는 눈치였다. 해리가 자신을 좋게 보는 것이 너무 어색했다. 물론 비교대상이 볼드모트라곤 해도, 지금까지 해리가 볼드모트와 스네이프를 등급을 매겨서 어느 쪽이 더 끔찍하다 여겼을 리가 없었다. 둘 다 똑같이 끔찍하고 싫었겠지. 그건 스네이프도 알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그랬다. 볼드모트도, 제임스 포터도 등급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싫었다. 그런 포터를 빼다 박은 아들 해리 역시, 싫었다.


싫었지만, 해리가 가진 초록색 눈은 바라보고 싶은 충동이 항상 있었다.


“철분제 사올게요. 여기 계세요.”


해리가 일어서서 약국 쪽으로 걸어갔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유리창 밖의 플라타너스 나무에 두었다. 창에 희미하게 하얀 니트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살아있다.’ 지금 이 순간, 왜 그렇게 그 사실이 와 닿았을까.



장을 본 게 가득 든 묵직한 상자를 들고 스피너즈 엔드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해리는 계속 끙끙거리다가, 인적이 드물어지자 마법을 써서 상자를 공중에 띄웠다. 스네이프는 쯧, 새파랗게 젊은 놈이, 라며 빈정거렸다. 해리는 왜 이럴 때는 마법사식 방법을 썼는데도 욕을 먹어야할까 진심으로 억울했다. 물론, 스네이프는 해리의 모든 걸 트집 잡고 싶을 뿐이겠지. 하지만 다시 끙끙대며 상자를 들고 갈 오기를 부리기엔 해리는 너무 졸리고 피곤했다. 반면에 철분제의 효과가 좋았던지, 스네이프의 허연 얼굴에는 약간의 혈색이 돌았다. 옷도 밝게 입고, 머리카락도 찰랑거리고. 새벽에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해리는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집에 도착하자 스네이프는 냉장마법이 걸린 일종의 냉장고에(머글들 것과 다른 점은, 문을 열기 전까진 이 안이 얼마나 넓은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란 것이었다.) 차곡차곡 장본 것을 넣었다. 해리는 제가 할 생각이었지만, 스네이프가 가볍게 지팡이를 휘두르자 식품들이 알아서 착착 들어가는 것을 보곤 딱히 도울 필요가 없음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욕실로 들어가 대충 씻고 나왔다. 자꾸 눈꺼풀이 감겼다. 스네이프는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건 요리책이었지만, 해리는 너무 졸려서 그에 맞는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교수님, 저는 어디서 자, 자-면 좋을까요? 하품이 나오는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해리가 물었다.


“예전에 웜테일이 쓰던 방이 있다. 거길 쓰면 될 거다.”

“웜테일? 그가 여기 있었다고요?”


해리는 순간 졸음이 달아난 눈으로 스네이프를 쳐다보았다.


“볼드모트가 날 도우라고 놔둔 거였다. 뭐, 집 청소 같은 걸 했지. 그러다 말포이 저택으로 불려갔고.”

“저도 그 때 봤어요... 음, 뭐, 죽는 모습도...”

“설마 동정하진 않겠지.”

“그럴 리가요! 그는 배신자예요... 그 자가 불지만 않았으면 절대로 저희 엄마와 아빠는......”


해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부모의 죽음에는 눈앞에 있는 남자도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리와 스네이프는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여서, 아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백 번 나을 것 같았다. 스네이프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지만, 해리는 그가 정말로 담담해하는 게 아닌 걸 알았다.


“교수님을 원망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음, 예언은 저 말고도 다른, 네빌도 가리키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볼드모트가 저를 선택한 거죠... 교수님이 볼드모트에게 예언을 가르쳐줬지만, 그건, 제가 아닐 수도 있었어요.”

“네가 날 변호할 필요는 없다. 난 릴리를 죽게 만들었어.”


스네이프는 견고한 성 같던 표정을 결국엔 무너뜨렸다. 성은 모래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버석하게 얼굴을 쓸어내리는 스네이프는 무척이나 괴로워보였다. 해리의 뒷목으로 모래의 까끌함이 느껴졌다.


“예언이잖아요. 어떻게든 이뤄질 일이었어요.”


해리는 스네이프를 두고 침실로 가는 게 맞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 끝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 스네이프는 소파에 몸을 누이는 해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날 동정하는 건가?”

“그냥 이러고 싶을 뿐이에요. 잠깐만 자고 일어날게요.”


해리는 더 이상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눈과 입을 닫아버렸다. 스네이프는 한동안 그런 해리의 동그란 뒤통수만 내려다봤다. 어느 샌가 작은 응접실에 색, 색 하는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스네이프는 어쩌다 이 덩치만 커다란 애송일 떠맡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조용한 공간, 타인의 숨소리. 스네이프는 다시 요리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해리가 눈을 뜬 건, 코로 음식의 냄새가 흘러들어 와서였다. 순간 버로우에 있는 것처럼 익숙하고 따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곧 몰리아줌마의 호박수프가 아닌 걸 깨달았다. 해리는 꿈결을 더듬다가, 서서히 잠에서 벗어났다. 깜박, 깜박 눈꺼풀을 움직이니 무수히 많은 책이 꽂힌 책장이 보였다. 그걸 보니 절대 여기가 버로우는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좀 더 무겁고, 답답하고, 차분한 곳이었다. 스네이프의 집. 해리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상체를 든 해리가 부엌 쪽을 보았다. 스네이프가 냄비를 국자로 젓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마법 약 시간에도 볼 수 있던 모습이었다. 해리는 어쩐지 그리웠다. 무섭고 싫었던 마법 약 교수가 그리운 건 아닐 것이다. 그냥, 해리는 이젠 아득한 과거 같은 그 모습이 그리웠다. 해리는 더 이상 호그와트의 학생이 아니었고, 스네이프도 호그와트의 교수가 아니었다. 그가 다시 복직한다고 해도 해리는 그의 수업을 들을 수 없었다. 해리는 눈물이 맺힌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미래에서 왔지만, 이렇게 과거를 선명하게 느끼는 일은 처음이었다.


해리가 스네이프의 곁으로 다가가자, 눈치 채고 있었던지 스네이프는 후추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해리는 얌전히 그의 손에 후추 통을 얹어주었다. 프라이팬엔 소고기 스테이크가 두 개 지글지글 굽혀지고, 옆의 냄비에 담긴 양파수프엔 소고기가 조각조각 들어있었다. 무심하게 툭툭 수프에 후추를 뿌린 스네이프는, 국자로 떠서 맛을 보았다. 부엌에 가득 찬 따듯한 냄새가 미칠 듯이 좋았다. 해리는 방금 자고 일어났으면서도 얼른 먹어보고 싶었다. 실력 좋은 마법 약 교수는 음식도 계량대로(혼혈왕자이니 더 좋은 방법도 개발했을 것이다.) 잘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그릇이랑 수저나 갖다 놓지, 포터. 물론, 머글식으로.”

“앗, 네, 넵.”


머글식이라고 해봐야 딱히 힘든 일도 아니었다. 조금 귀찮을 뿐. 해리는 수저통을 뒤져 숟가락과 칼, 포크를 두개씩 챙겼다. 낮에 끓여놨던 주전자의 물도 컵에 따라 식탁에 올렸다. 스네이프는 다 구워진 스테이크가 든 프라이팬을 들고 다가왔다. 스네이프가 집게로 그릇마다 고기를 올리는 사이, 해리는 양파수프를 떠서 가져왔다. 그렇게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해리는 마트에서 산 와인이 생각났다. 찬장에서 와인 잔을 꺼내고 와인 병을 들고 쪼르르 오는 해리를 보며 스네이프는 콧방귀를 끼긴 했지만, 말리진 않았다.


“교수님.”


마개를 딴 와인을 들고 해리가 웃었다. 스네이프는 잔의 가느다란 다리를 쥐고 들었다. 해리는 조심스럽게 그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른 뒤, 스네이프의 앞으로 잔을 들어올렸다. 무심하게 해리를 본 스네이프가 가볍게 잔을 맞부딪혔다.


“동거 첫 날을 기념하며. 이제 앞으로 364일 남았네요.”

“끔찍하니까 카운트는 그만 둬라.”

“네.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큭큭 웃으며 해리가 한 모금 들이켰다. 으와, 이거 쓰네요! 해리의 감상에 스네이프는 와인 처음 마셔보냐며 타박을 주었다. 해리는 거의 처음인 건 맞았지만, 그렇다고 솔직히 긍정하긴 싫었다. ‘와인도 처음 마셔보는 어린애’ 취급이 기분 나빠서였다. 물론 그런 태도가 더 어린애답다는 걸 해리는 어려서 몰랐다.


“와, 수프 진짜 맛있어요. 몰리아줌마 호박수프가 최곤 줄 알았는데...”


양파 수프를 맛보고 해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냄새만으로 합격점이긴 했지만 혀로 닿는 맛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


“마법 약이 아니라 마법의 요리 수업이었으면 전 교수님을 엄청나게 존경했을지도...”

“헛소리.”

“하하! 하지만 진짜 맛있는 걸요. 저 말고 교수님 음식을 다른 누가 먹어봤나요?”

“글쎄. 요리 자체를 잘 안 하고 혼자 있을 때만 하니까, 없을 거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데... 혼자 드시면 아깝지 않았어요? 칭찬도 못 듣잖아요.”

“칭찬을 바라며 요리를 하는 게 아니라 먹으려고 만든 거니까, 전혀 아깝지 않다, 포터.”

“앞으론 제가 매일매일 맛있다고 해드릴게요!”

“요리를 아주 다 나에게 떠넘기려는 발언 같군, 포터. 난 네 식모가 아니다.”


칭찬을 칭찬으로 듣지 못하시긴. 숟가락을 입에 물고 해리가 비죽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천진한 어린 아이 같던지. 스네이프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초록색 눈, 발그레한 볼, 동그란 안경을 낀 얼굴. 그걸 보고 하마터면 귀엽다고 생각할 뻔 했다. 큰일 날 생각이었다. 제임스 포터랑 거의 판박이라고, 저 놈은. 또 릴리의 초록색 눈에 홀리고 만 것이라고 스네이프는 생각했다. 해리는 스네이프가 시선을 마주치지 않자 신경이 쓰였다. 와인은 여전히 썼고, 혀에 떫은맛이 돌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교수님은 어디서 주무세요?”

“네가 지낼 방 옆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낸 방인가요?”

“...그런 게 왜 궁금하지?”

“그냥요. 대화잖아요. 수업도 아니고, 취조도 아닌데...”


나눌 수 있는 말이잖아요. 이제 우리 사이엔. 해리는 그렇게 말을 덧붙이려다 말았다. 이제 우리 사이가 어떻다는 건지 해리도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보다는 편한 사이? 그렇다고 해서 스네이프와 사적인 대화를 막 나눌 만큼 편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스네이프가 그런 게 왜 궁금하냐고 말했을 때, 그 벽 앞에서 그만뒀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해리는 그건 또 인정하기가 싫었다. 잘 지내고 싶은 마음에 오기가 섞였다. 해리는 어렸다.


“날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이 보이는군.”

“...그럼 안 되나요?”

“뭐?”

“친구... 할 수도 있지 않나요.”


해리는 자신이 말을 뱉으면서도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이건 정말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스네이프와? 친구라고? 정말로 내가 그와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나? 온갖 생각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이 어리고 당돌한 제자의 말에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 건 스네이프도 마찬가지였다. 스네이프는 평생에 친구라곤 릴리뿐이었다. 그는 그런 것까지 생각나서 미칠 것 같았다.


“건방지다 여겼더니 정말 끝을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포터.”


싸늘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해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해리의 심장으로 유달리 아프게 쑤셔 박혔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사과하는 목소리가 가라앉아있었다. 따듯한 저녁식사는 그걸로 끝이었다. 해리는 그 후 아무 말도 없이 저녁을 먹었다. 칼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숟가락이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 같은 잔 소음만 들렸다. 해리의 가슴 안에 울컥 울컥거리는 모종의 감정이 솟아올랐다. 해리는 스스로도 이 감정이 뭔지 잘 몰랐다. 그건 분노 같기도 했고, 창피함 같기도, 그리고 놀랍게도 슬픔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책장 뒤편에 숨어있었다. 웜테일이 지냈던 방 침대에 누워 해리는 계속해서 호흡을 골랐다. 자꾸 불규칙적인 숨을 쉬고, 심장박동이 커지고 있었다. 감정은 갈무리가 되지 못했다. 해리가 이 감정이 정확히 뭔지를 알았다면, 이렇게 오래 끌진 않았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기에 해리는 내버려두지 못했다.


해리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낮잠을 자서 더 잠에 들기 힘들었다. 방은 작았으며 천장이 낮았고, 틀이 찌그러진 옷장이 있었다. 벽에 양초 등잔이 걸려있었고 창은 하나 나있었다. 창 너머로는 답답한 벽돌집들이 보였다. 저 멀리, 아주 희미하게 강이 보였다. 해리는 어린 스네이프가 창문 앞에 쭈그려 앉아, 강 건너 마을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는 걸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지저분하고 우스꽝스럽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어린아이. 머리카락도 자르지 않아 여자아이처럼 길게 기른 까만 머리는 온통 뒤엉켜있었다.


그런 불우한 소년의 앞에 마법을 할 줄 아는 또래의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해리는 그것만으로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알 수 있었다. 두들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이모와 이모부에게 무시를 당하면서, 어린 해리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지곤 했다. 해리는 자신이 그럴 때, 어린 스네이프 같은 녀석이 나타나준다고 해도 너무나 감격했을 거라 생각했다. 해리를 처음 마법세계로 안내했던 해그리드보다도, 또래의 친구가 먼저 나타나 해리에게 그 세계를 가르쳐주었다면.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친구’란, 바로 그럴 때 생기는 것일까? ‘사랑’이란, 바로 그럴 때 느끼는 것일까?


지금, 스네이프는 삶의 목적을 다 이뤘다. 릴리가 죽은 후, 죽으려했던 그에게 덤블도어는 그녀의 아들을 살리라며 스네이프를 죽지 못하게 두었다. 이제 해리 포터는 볼드모트를 없앴고, 마법세계는 평화로워졌다. 스네이프에게 해리를 지키라는 명령은 이제 끝난 것이다. 해리는 자신도 덤블도어처럼 그를 죽지 못하게 또 한 번 방해한 걸까, 생각했다. 스네이프는 이제 살아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니, 해리는 가슴이 아팠다. 스네이프는 오직 그 자신을 위해서 살아본 적이 있을까? 그는 해리에 의해 두 번째 삶을 부여받았다. 이번에는 스네이프가 그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해리는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미래에서 여기로 돌아온 게 아닐까 생각했다. 스네이프에게 살고 싶어지는 이유를 주자. 그 이름이 ‘친구’일 수도 있겠지.


해리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덮었을 때에는, 수월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스네이프는 자신보다 해리가 먼저 일어난 게 뜻밖이라는 얼굴이었다. 해리는 부엌에서 계란프라이와 베이컨을 굽고 있었다. 스네이프에게 있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부엌에서 음식냄새가 나는 건 정말로 낯선 일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그의 엄마가 살아있을 때나 맡아보았다.


“앉아계세요.”


주전자에서 물을 따르며 해리가 말했다. 스네이프가 식탁 앞에 앉자, 해리는 물을 따른 컵을 건넸다. 그 일련의 행동이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스네이프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이건 마치...


“예언자일보를 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부엉이가 나타났더라고요. 그래서 정기구독을 하기로 했어요.”


그러고 보니 식탁에 오늘자 예언자일보가 놓여있었다. 1면에는 해리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해리 포터, 어둠의 마왕을 몰아내다!> 사진 속의 해리는 지쳐보였지만, 기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스네이프는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사진 속 해리의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시 눈앞의 해리로 시선을 돌렸다. 해리는 스네이프의 앞에 계란과 베이컨이 든 그릇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정말로 볼드모트가 죽었나보군.”

“그렇다니까요. 볼드모트는 교수님이 딱총나무 지팡이의 주인인 줄 알았지만, 사실 아니었거든요.”

“그래? ...드레이코였나?”

“어떻게 바로 아셨어요?”


해리가 베이컨을 우물거리며 놀란 눈을 했다. 스네이프는 계란프라이를 칼로 썰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드레이코의 손에 그게 들려있었으니까. 그 지팡이는 죽여서 뺏는 방식만 통하는 게 아니었던 거로군.”

“네. 하지만 볼드모트는 당연히 죽음으로만 그런 강력한 지팡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정확히 따지자면, 말포이도 이미 진짜 주인이 아니었어요.”

“......? 그럼 누가 그 지팡이의 주인이지?”

“저요, 저였어요. 제가 말포이 저택에 들어갔을 때, 말포이의 지팡이를 뺏었거든요. 그 때 딱총나무 지팡이에 대한 권한도 제게 넘어온 거죠.”

“기가 막히는군...”


스네이프가 계란을 입에 넣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모든 상황이 완전히 해리 포터가 이기기 위해 움직인 것 같았다. 그러다 스네이프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너는... 죽지 않았군. 덤블도어의 말을 들었을 때, 네가 죽어야만 하는 줄 알았는데.”

“아뇨... 전 한 번 죽었었어요.”

“...”


스네이프가 해리를 쳐다보았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 간절히 보고자 했던 그 초록색 눈이 꿰뚫을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수님의 기억을 모두 보고... 죽기 위해 길러진 돼지는 이제 그 자신의 참된 운명을 깨달은 거죠.”


해리는 웃고 있었지만 그 때의 기분을 떠올렸는지,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스네이프는 덤블도어에게 적절한 때에 그를 죽이기 위해 살려놓게 한 거냐며 화를 냈던 모습이 떠올랐다. 덤블도어는 남들이 아는 것만큼 선량하지 못했다. 너무도 똑똑해서, 정확한 계산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


“덤블도어 교수님이 제게 유품으로 남긴 게 있었어요. 제가 첫 시합 때 잡은 스니치와 그리핀도르의 칼이었죠. 저는 그 스니치를 입으로 잡았거든요. 그걸 이렇게, 입술에 대면... ‘나는 끝에서 열린다.’라는 문장이 떠올랐어요. 처음에 저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죠. 죽음의 성물에 대해 알게 되고 안에 부활의 돌이 들어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요. 그리고 교수님의 기억을 보고, 스니치에 떠오른 문장의 의미를 알게 되었죠. 저는 스니치에게 나는 이제 죽으려고 한다, 고 속삭였어요.”


그랬더니, 열린 거죠. 해리는 담백하게 미소 지었다. 스네이프는 눈앞의 어린 애송이가, 자신의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의 커다란 무게감을 느꼈다.


“...들어있었겠군, 부활의 돌.”

“네, 덤블도어 교수님의 손을 그렇게 새카맣게 태워버린 것 말이죠... 저는 돌에서 나온 아버지, 어머니, 시리우스, 루핀과 함께 볼드모트가 기다리고 있는 금지된 숲으로, 죽기 위해서, 들어갔어요. 그리고 살인주문에 맞았죠. 전 죽어서 제 몸에 기생해있던 볼드모트의 불구가 된 영혼도 보았어요. 다시 살아 돌아왔을 땐, 죽은 척을 하고 있다가 틈을 노려 볼드모트와 싸웠고... 어... 지금 생각해보니까, 전 부활의 돌에서 교수님이 나올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 돌은 죽은 사람만 부를 수 있으니까... 교수님은 살아계시니까 나타나지 않았던 걸지도요.”


해리의 마지막 말은 뜻밖이었다. 스네이프는 부활의 돌에서 자신이 나올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는 해리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싫어했는데도... 죽기 직전이라 할 수 있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시 만나게 되었네요.”


그렇게 말하는 해리는 진심을 다해 웃는 것 같았다. 스네이프는 해리가 구운 계란프라이와 베이컨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마치... 그랬다. 이 안온하고 익숙하면서 거부감이 드는 느낌을 스네이프는 알고 있었다. 해리와 자신이 마치 꼭, ‘가족’처럼 느껴졌다.


“살아서 다행이에요.”


스네이프는 조금, 목 안이 뜨거워졌고, 코끝이 시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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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당연한 거겠지만, 몇 시간이 지났으니 비에 젖어 축축했던 해리의 옷도 완전히 말랐다. 그래서 해리는 더욱 자신이 살던 미래와 멀어진 기분이었다. 그 시간만큼 굶주린 배도 너무 고팠다. 몰리아줌마의 따듯한 호박수프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1년은 그들과 떨어져 살아야한다. 스네이프 한 명을 살린 대가가 이렇게 클 줄이야. 심지어 1년간 지니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주머니엔 아직도 프러포즈를 위해 준비한 반지케이스가 들어있는데...! 그러나 해리가 옆에서 머리를 싸매며 괴로워하든 말든, 스네이프는 영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럼, 1년간 잘 숨어 지내도록 해라.”


해리는 허둥지둥 머리를 싸맨 양 팔을 풀었다. 스네이프가 일어섰다. 큰 키 때문에 해리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어이가 없어, 넋이 나가 입을 떡 벌린 채 해리가 스네이프를 올려다보았다. 스네이프는 그런 해리를 한심스럽게 내려다봤다. 해리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지금 교수님 혼자 가신다고요?!”

“그럼? 너와 내가 같이 살기라도 해야 한단 말이냐?”


윽, 그렇게 물어오면...! 해리 또한 저도 물론 싫다구요! 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니,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앞으로의 고생을 견뎌야 하는데! 홀랑 자신을 두고 떠나가겠다니, 세베루스 스네이프란 사람이 아무리 매정해도 이렇게 매정할 수는 없었다. 나 몰라라 서로의 길을 가자고? 물론, 해리도 그간의 서로 간 좋지 못한 감정을 기억했고, 스네이프 같이 대하기 까다로운 사람과 함께 산다면 여러모로 불편할 것은 알고 있었다. 스네이프 또한 그런 마음에서, 자신과 해리 모두를 위한 방향으로 말한 것일 테다. 하지만 이건 그 이전의 문제였다. 해리는 도저히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내가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는데 나 혼자 쓸쓸히 1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하는가? 게다가 모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 지내야만 했다. 해리는 도저히, 억울해서 그렇게는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를 입 밖으로 꺼냈다간, 스네이프 역시 당연스럽게 누가 날 살려달라고 부탁했냐고 되물을게 뻔했다. 그러면 해리는 또 할 말이 없어졌다. 완전히 꼬일 대로 꼬였다. 골치가 아팠다.


해리는 돌아서는 스네이프의 손목을 확 끌어 잡아챘다. 스네이프가 등을 보이자 얼굴부터 굳었다. 두 번이나 해리에게 손목이 잡힌 스네이프의 인상이 마구 구겨졌다. 스네이프가 뭐냐고 쏘아붙이기도 전에, 표정 없이 저를 뚫어보는 해리의 시선과 마주쳤다. 저, 저 망할 초록색 눈. 스네이프는 꼼짝없이 그 눈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바닥에 발이 붙었다.


“교수님은 뱀에게 물리셨어요. 피도 엄청나게 쏟았고, 분명히 지금 몸이 좋진 않을 겁니다.”

“네 재주로 상처 없이 나았다. 피가 부족한 건 음식을 먹으면 보충될 문제다, 포터.”

“저와 같이 살아요.”

“내가 왜 그래야하지? 너도 싫을 거 아니냐?”

“제가 싫고 말고는 교수님이 따질 필요 없으시잖아요. 제 감정인데.”

“뭐라고? 이 오만한... 이제 볼드모트를 죽인 진정한 영웅나리랍시며 이렇게 건방지게 구는 건가?”

“그래요! 전 볼드모트도 없앴고, 교수님의 목숨도 살렸어요! 그러니까 전 이렇게 요구해도 된다고요. 전 혼자서는 1년이나 숨어 못 살아요. 교수님이라도 함께 살아주셔야 해요.”

“하! 정말이지...너무 유치해서 못 들어주겠군...”


스네이프가 해리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해리의 말은 완전히 어린아이나 부릴법한 생떼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스네이프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해리는 오히려 웃음이 피식 나왔다. 해리가 웃음을 보이니 스네이프는 더욱 경악스러운 눈이었다. 1년 자란 사이 더더욱 싫은 인간이 되었구나, 포터. 레질리먼시를 쓰지 않았어도 해리에겐 그의 마음의 소리가 이렇게 들리는 것 같았다.


“포터, 네가 나와 같이 살자고 조르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군.”

“네, 저도요.”


얄미운 해리의 대답에 스네이프는 눈을 흘겨 해리를 보았다. 해리는 사실 스네이프와의 대화가 점점 더 재밌어지고 있었다. 이제 둘은 선생과 학생의 입장이 아니었고, 똑같은 어른 대 어른의 입장이었다. 그 기분이 해리는 무척이나 새로웠다. 스네이프와 대등해질 수 있다는 게 놀랍고 즐거웠다.


“그렇다면, 어디서 살지는 생각은 해봤나?”

“어...글쎄요. 그건 이제부터 함께 고민해봐야죠...?”

“이렇게 무계획해서야... 과연 제임스 포터의 아들이지, 아주 똑같아.”


스네이프의 언짢은 말투에 해리는 학생 때처럼 다시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모든 상황이 다 갑작스럽게 이뤄진 거였다. 해리는 자신이 과거로 돌아올 것도, 스네이프의 목숨을 구하게 될 것도, 1년을 모두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야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당연히 해리에겐 계획이 없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데도 익숙하게 스네이프에게 혼이 나니 말수가 부쩍 줄었다. 입이 딱 붙어버린 해리를 보며 스네이프는 혀를 끌끌 찼다.


이겨 먹으려들더니 꼴좋군, 해리포터. 해리는 속으로 스스로를 향해 빈정거렸다.


“...교수님은 저와 헤어져서 어디로 가시려고 했는데요?”


그래도 계속 말을 안 할 순 없었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질문에 한 쪽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곧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스피너즈 엔드.”

“..아.”


스네이프가 어릴 때 산 곳이었다. 그렇구나, 스네이프는 그곳에서 아직까지 지내고 있었다. 끔찍한 유년기의 기억이 있는 곳일 텐데... 해리는 스네이프의 과거를 봤기에 알았다. 그래서 자신처럼 스네이프 역시, 호그와트를 집처럼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돌아갈 집은 스피너즈 엔드에 있는 것이다. 자연스레 해리는 프리벳가 4번지가 떠올랐다. 아니, 거긴 돌아가선 안 된다. 그 곳으로 간다면 과거의 자신에게 들키지 않을 수도 없을뿐더러, 이제 영원히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 순간 해리는 깨달았다. 앞으로 둘이서 숨어 지낼 장소로 완벽한 세계가 있었다.


“머글계에서 살면 돼요. 그럼 마법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혀 들키지 않고, 둘이서도 살 수 있어요!”


스피너즈 엔드도 프리벳가 4번지도 모두 머글이 사는 세계에 속했다. 해리는 이토록 완벽한 은닉장소가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다는 데에 소름이 돋았다. 마법세계의 영웅인 해리포터도 머글들 사이에선 그저 동그란 안경을 쓰고, 이마엔 좀 별난 상처가 나있는 청년일 뿐이었다. 스네이프는 또, 그들에겐 중년남자치곤 별나게 머리를 좀 길렀고, 그 머리를 좀체 안 감는지 기름져 보인다고 생각할 남자일 것이다.


“머글계라... 뭐, 딱히 그곳이라 해서 마법사들이 아주 없진 않을 텐데, 포터. 영국에서 마법사만 사는 마을은 호그스미드가 유일하단 걸, 물론 위대하신 마법세계의 영웅 포터께서는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만.”


스네이프의 빈정거림에 해리는 잠시 움찔했다. 하긴, 머글계에 숨어 살고 있는 마법사들은 해리의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머글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잘 섞여든 마법사나 마녀들은, 반대로 해리포터는 아주 잘 알아볼 게 분명했다. 해리포터는 그들에게 유명해도 너무 유명했다. 오늘이야말로 볼드모트를 죽여 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사라지게 한,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되지 않았는가. 분명 자신의 이름은 <마법의 역사>에도 실릴 것이고, 어쩌면 피브렐 형제들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화 속 주인공이 될지도 몰랐다. 해리포터와 뭐 어쩌고 저쩌고 시리즈 같은, 영웅 해리포터의 학년별 연대기라든지... 해리는 스스로 그런 것들을 생각하자니 몹시 창피했다. 낯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스피너즈 엔드에는 교수님 말고 다른 마법사가 살고 있나요?”

“아니, 거긴 머글들조차도 살지 않지. 워낙 더럽고 추한 곳이니까.”

“잘됐네요, 그럼.”

“설마 포터, 내 집에서 신세지겠다고?”

“네. 안되나요?”

“거긴.. 거긴 나 혼자 살기에도...”


처음으로 스네이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해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스네이프를 보았다. 설마... 설마? 스네이프는 지금 뭔가를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해리는 추측했다. 작고 누추한 집을 자신에게 보여주기가 창피해서? 해리의 머릿속으로, 여성용의 우스꽝스런 블라우스를 가리기위해 터무니없이 큰 외투를 걸치고 있던 작고 깡마른 소년이 떠올렸다. 지금 해리에게 스네이프는 그 소년이 몸만 자란 것처럼 보였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엄마, 릴리에게도 한 번 자신의 집으로 놀러오라고 말을 한 적이 없을 것이었다. 너무나 창피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스네이프는 정말이지 불쌍하고 가엾은 소년이었다. 해리는 그리고 그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스네이프의 스피너즈 엔드의 그 집은, 해리에겐 프리벳가 4번지의 좁고 거미가 나오는 벽장이었다.


“그래도 제가 살던 벽장보다는 2인용에 가깝겠죠.”


스네이프는 움찔하더니 해리의 눈을 쳐다보았다. 해리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해리는 비틀거리다가 곰팡이가 슨 벽에 손바닥을 대고 엉거주춤히 섰다. 공복에 동반순간이동을 했더니 몹시 어지럽고 속이 역했다. 스네이프는 해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지팡이로 이곳저곳을 겨누며 청소를 시작했다. 그간 학교에서 지내느라 비운 틈에 집 꼴이 더 엉망이었다. 낡고 허름한 집은 마법의 힘으로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 같은 얼굴로 간신히 고개를 든 해리는, 그제야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조그맣고 낡고 허름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게 맞나 싶은 공간이었다. 페투니아 이모가 봤다면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거라고 해리는 생각했다.


벽은 오래된 가죽이 씌워진 책들로 가득했다. 천장에는 양초 등잔이 달려있었는데, 지금은 낮이어서 쓸 필요가 없었지만, 사실 밤에도 그다지 쓸모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등잔 아래엔 아주 낡은 소파와 오래돼 보이는 안락의자, 어떻게 서있는지가 의심스러운 탁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스네이프는 그 낡은 소파에 앉아서 해리를 노려보며 다리를 꼬고 있었다. 흡사 지하 감옥 같은 이 집의 간수장 같았다. 스네이프는 막상 해리를 이 집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자신이 내린 판단이 몹시 못마땅하고 후회되는 것 같았다. 해리는 스네이프에게서 지금 당장 꺼지란 말이 날아올까 봐, 냉큼 안락의자에 가 앉았다.


“집이 좋네요.”

“입에 침은 발랐나, 포터?”


해리는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 혀가 아랫입술을 축였다.


“어...부엌에 먹을 게 좀 있을까요? 한 번 살펴보고 올게요.”


스네이프가 어이가 없는 듯 해리를 쳐다보았다. 해리 스스로도 헛수고일거란 생각은 했다. 주인이 오랫동안 비운 집에 별 기대는 없었지만, 스네이프와 마주하는 것이 꺼려진 것이니, 뭐. 물론 스네이프도 해리의 머릿속을 레질리먼시 없이도 훤히 꿰뚫어본 것 같았다.


부엌은 낡고 컴컴했지만 더럽진 않았다. 이 집은 전체적으로 색채가 바래 흐렸다. 그래서 낮임에도 다소 어두웠다. 부엌에는 조리도구도 많이 없었다. 이 빠진 머그컵이 세 개, 그릇 몇 개, 냄비 두 개, 주전자 하나... 주전자 옆에는 찻봉지가 하나 놓여있었다. 겉포장에는 먼지가 앉아있었지만 그럭저럭 먹을만해보였다.


해리는 수돗물을 틀어(물이 안 나오지 않을까 걱정스러워하며) 주전자에 물을 받았다. 잔을 달그락 소릴 내며 꺼내고, 물을 끓이는 소리가 부엌에서 들리자 조금은 사람 사는 집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예상한 것처럼 찻봉지 외엔 전혀 수확이 없는 부엌이었다. 해리는 김이 나는 컵 두 개를 들고 응접실로 돌아왔다. 따듯한 걸 들이키니 속이 조금 낫는 것 같았다.


“장을 봐야할 것 같아요. 우선...밥부터 식당에서 먹고.”

“머글 돈은 없겠지, 물론.”

“아... 돈, 맞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머글 식당에서 밥을 먹어본 적이 도대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두들리 가족과 함께 살 때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해리는 사실 태어나서 머글 돈 자체를 손에 쥐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린고트 금고에 잔뜩 쌓인 금화를 봤을 당시 기분이 어땠던가? 열한 살짜리 소년은 자신이 이렇게나 많은 돈을 가졌단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해리가 가지고 싶은 건 항상 두들리가 가지고 있었고 해리는 그저 손가락만 빨았다. 두들리의 장난감 한 개라도 마음 놓고 갖고 놀아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런 해리에게 머글 돈이라니,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린고트에 있는 마법사 돈조차 마음대로 가져올 수 없었다. 호크룩스를 찾는 중에도 몇 개월을 숨어 다녔는데, 또다시 숨어 지내야하다니. 이번엔 1년이었고, 해리는 당장 살 길이 막막했다.


“...내게 머글 돈이 조금 있다.”


해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스네이프의 입에서 ‘머글 돈’이란 단어가 나오는 것조차도 낯설었다. 그런데 스네이프가 그걸 갖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교수님에게요?! 머글 돈이...?!”

“...아버지란 작자가 사고로 죽었을 때, 남은 가족 앞으로 약간의 돈이 나왔다. 하지만 내가 그 더러운 작자가 남긴 걸 쓸 리가 있겠나? 그대로 한 푼도 쓰지 않았지.”

“와, 세상에... 진짜 기대도 안 했어요. 이대로 굶어 죽나 싶었는데...”

“흥, 포터, 머글 돈 없는 정도로 굶어 죽는다면, 자네가 마법사라고 할 수나 있는지 의문이군.”


스네이프는 심술궂게 툴툴댔지만 해리에겐 기적 같은 말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것만 같았는데! 스네이프만 아니었다면 얼싸안고 제자리에서 몇 바퀴 돌았을 것이다. 해리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물었다.


“그 돈은 어디 있나요? 머글들의 은행에?”

“내가 머글 은행에 계좌가 있겠나, 포터? 생각 좀 하고 말하길 바라는 건 자네에겐 너무 큰 기대인가?”

“윽.. 물을 수도 있잖아요! 머글 돈이니까!”


해리가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쳤다. 스네이프는 해리가 그러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해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스네이프는 지팡이 끝을 바닥의 구석으로 겨눴다. 그는 유연한 동작으로 손목을 위로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바닥에서 작은 직사각형 모양 뚜껑이 딱 소릴 내며 열렸다. 아씨오, 머글 돈. 스네이프의 낮은 부름에, 뚜껑 아래 있던 돈 꾸러미가 둥둥 허공을 떠왔다. 꾸러미는 낡은 탁자 위에 놓였다.


“나는 머글 돈은 잘 모른다. 네가 알아서 쓸 만큼 꺼내라, 포터.”


해리는 이미 꾸러미를 풀고 있었다. 오랫동안 묵혀 있던 옛날 지폐들이었지만, 아직 사용은 할 수 있었다. 해리는 며칠간 생활비와 2인의 식사비 정도를 가늠해 챙기고, 다시 꾸러미를 묶었다. 스네이프는 그걸 다시 바닥에 넣어놓았다.


“그럼, 나가기 전에 좀 씻고 갈아입죠. 교수님, 핏자국도 묻어 계시고...”

“포터 너에게 빌려줄 옷은 없다.”

“...알겠어요. 교수님만 갈아입고요.”


하여튼 저 비뚤어진 인간... 해리는 생활비에 자신의 옷 몇 벌도 포함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머글들에게 마법사망토는 어색하니 망토는 벗어 안락의자에 걸쳐두었다. 스네이프는 욕실로 들어갔고, 해리는 남은 차를 후루룩 들이켰다.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스네이프의 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피를 씻고 있는 스네이프를 기다리고 있는 게?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해리는 생각했다.



스네이프는 까만 셔츠와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평소 단추가 엄청나게 많은 스네이프의 신부복 같은 옷에 익숙했던 해리에겐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머리는 감았는지 기름지지 않고 약간 부스스했다. 전체적으로 늘 보던 스네이프의 모습은 아니었다.


해리는 생각보다 더 그를 오랫동안 멍하게 쳐다본 모양이었다. 스네이프의 눈이 가늘어지며 해리를 싸늘하게 보았다. 해리는 그 시선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혈색이 안 비치는 흰 피부에 까만 머리, 까만 옷을 입으니 스네이프는 더더욱 하얗게 질려보였다. 바지폭이 좁아서 마른 몸은 더 드러났다. 아, 어쩐지 교수님인데도 교수님 같지가 않네. 옷차림만 바뀌었을 뿐인데 좀 더 젊어 보이기도 했다. 해리는 정신을 차렸지만 간간히 옆을 흘낏거렸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시선을 무시하기로 했는지 앞서 문을 열고 나갔다. 성큼성큼 앞서나가서, 해리는 후다닥 그의 뒤를 쫓아나갔다.


밖으로 나와 보니 스피너즈 엔드는 온통 똑같이 생긴 벽돌집들이 가득한 동네였다. 판자를 덧댄 깨진 창과 흙먼지에 뒹구는 쓰레기들.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 스네이프의 집은 그 동네에서도 가장 구석이었다. 어느덧 스네이프의 옆까지 따라붙은 해리는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슬쩍 뒤쪽을 본 시선엔 폐공장의 굴뚝이 손가락처럼 우뚝 서있었다.


“진짜 여긴 아무도 안 사나보네요, 교수님.”

“살고 싶은 동네여야 말이지. 공장이 멈춘 후론 다 떠나갔다 보면 되겠지.”

“지금 우린 옆 동네로 가고 있나요?”

“그래. 그러니 마법을 쓸 생각은 하지마라.”

“어머니가 자란 집도 있겠네요, 그럼.”

“......”


스네이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에게 릴리의 아들과 릴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해리는 자신의 엄마를 알고 있는 사람과 같이 엄마에 대한 대화를 하고 싶었다. 자신은 릴리의 뱃속에서 나왔지만, 공유하는 추억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남자는 릴리의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다. 엄마의 ‘친구’였다. 릴리로선 의절했고, 스네이프로선 아직 짝사랑을 하고 있는 기묘한 관계였긴 하지만 말이었다.


해리는 사실 스네이프는 사랑이라곤 모르는 냉혈한으로만 알았다. 해리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시리우스조차도 몰랐을지도. 물론 자신의 아버지 제임스포터는 잘 알았을 것이다. 해리는 그가 자신의 아버지고, 제임스가 릴리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자신도 태어나지 않았을 테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여자의 오랜 친구를 그렇게 괴롭힌 아버지의 모습은 영 불편하게 느껴졌다. 괴롭힘의 이유가 스네이프가 어둠의 마법에 빠져서라고 다들 말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스네이프가 릴리를 좋아했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어리고 외롭고 못난 스네이프는, 괴롭히기엔 아주 좋은 사냥감의 모습이었다. 해리는 두들리 패거리의 사냥감이었기 때문에 그걸 너무 잘 알았다.


스네이프는 여전히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면서, 평생을 사랑으로 살고 있었다. 물론 그건 집착이나 탐욕으로도 보였다. 하지만 해리는 그럼에도 스네이프를 나쁘게 볼 수 없었다. 해리는 이제 스네이프를 나쁘게 보고 싶지도 않았고,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말 단순한 이유였다. 또 자신은 그렇게 오랫동안 한 사람만을 사랑해본 적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해리는 가끔씩 스네이프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둑으로 나오자 여기와는 색채부터 다른 마을이 보였다. 해리는 어머니가 자란 동네라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드릭 골짜기에 갔을 때와는 닮은 듯 다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스네이프와 함께 라는 사실이 달랐다.


“여기 들어갈까요?”


스네이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거리와는 다른 현대적인 머글 거리, 쇼윈도에 두 명의 키 큰 마법사가 비쳤다. 민트색 지붕의 식당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해리는 너무도 머글적인 거리에서 스네이프와 함께 걷는 것도, 식당을 들어가는 것도 낯설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그 기분은 상당히 좋았다.


밝은 우드테이블에 앉은 그들에게 종업원이 다가와 물과 컵을 내려놓았다. 스네이프는 메뉴판을 받았고, 해리가 컵에 물을 채워 스네이프의 앞에 놓았다. 이렇게 머글로 가득한 곳에 들어오니 스네이프의 차림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머글과 섞이는가싶어, 새삼 해리는 놀라웠다. 스네이프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삐뚜름히 메뉴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뿐이군. 스네이프는 짧게 감상을 던졌다. 이내 메뉴판은 해리의 손에 들렸다. 적당히 네가 골라라. 해리는 메뉴를 살펴보며 여기가 이탈리아식당인 걸 알았다. 해리가 종업원을 불러 점심세트를 부탁했다.


날씨가 아주 좋았다. 칙칙한 집 안에만 있다가 나와서인지 온 사방이 유달리 밝았다. 해리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미 자신이 볼드모트를 죽이고도 남을 시각이었다. 한창 마법세계는 축제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해리는 그런 순간에 자신이 적당히 번잡하고 한가로운 머글 거리에서, 스네이프와 파스타와 피자, 콜라를 기다리고 있는 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실감했다. 해리는 또 다시 즐거워졌다. 과거의 자신은 지금 한창 여기저기에 쓸려 다니고 있겠지만, 지금은 이런 여유를 느끼고 있었다.


“...믿기지 않군.”


스네이프가 말했다. 해리는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건채로 스네이프를 쳐다보았다.


“뭐가요?”

“지금 포터, 너 말이다.”

“제가 뭘요?”

“아까부터 실실 웃고 있잖나. 내 앞에 있으면서. 그런 건 처음 본다고.”

“아아.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걸요.”


해리는 가볍지만 진심으로 대답했다. 스네이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하지만 스네이프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콜라와 피자를 가져온 종업원에 말문이 막혔다. 이제 스네이프는 동그랗고 노란, 이 해괴한 음식은 대체 뭐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리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피자란 거예요. 자, 그릇에 한 조각 덜어드릴게요.”


갓 구운 피자에서 치즈가 쭉 늘어나 그릇에 지저분하게 담겼다. 스네이프는 입을 꾹 다물고, 절대로 저걸 입 안에 넣지 않을 것이란 기색을 완고히 풍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리는 오랜만에 먹어보는 피자를 얼른 입에 넣었다. 이렇게 갓 나온 따끈한 피자는 해리도 처음이었다. 해리는 보통 두들리가 몇 판을 먹어 배가 불러 도저히 건드리지 못할 즘, 식은 피자 한 조각 정도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배고팠던 해리에게 갓 나온 피자의 맛은 천국 같았다. 볼드모트를 죽인 보상을 이렇게 받는구나 싶을 정도로 감격스러운 맛이었다. 스네이프는 독약을 보듯이 탄산이 올라오는 검은 물(콜라)을 살피고 있었다.


“피자 안 드세요?”

“못 먹겠다. 그리고 이건 실패한 마법 약 색깔 같은데...”

“엄청 맛있는데. 그 콜라도 보지만 말고 드셔보세요.”

“코... 콜, 뭐?”

“‘콜라’요. 색은 저래도 먹고 안 죽어요. 머글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료인걸요.”

“머글들은 이래서 정말 이해할 수 없군...”


딱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해리는 마법 약 시간에 제가 만든 마법 약을 스네이프가 반드시 먹어야만 한다면 저런 표정을 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스네이프가 콜라를 들어 한 모금을 홀짝였다. 그리고 생각과는 너무도 다른 단맛이 혀에 닿자 어깨를 움찔 튀었다. 해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피자를 한 조각 또 집었다. 마침 토마토파스타가 와서 스네이프와 해리의 앞에 놓였다.


스네이프는 이제 콜라의 맛에 완전히 탄복한 것 같았다. 혀와 식도를 톡톡 쏘는 이건 마법없이 어떻게 한 거냐고 물으면서도, 스네이프의 컵에서 콜라가 반 이상 사라졌다. 그가 처음 콜라 맛을 본 4살짜리 꼬마 같아 해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건 탄산이 들어서 그래요. 맛있어요?”

“..음.”

“그쵸? 머글들이 일반적으로 잘 먹는 걸로 주문했으니까 교수님도 의심 풀고 이제 드세요.”


해리는 콜라를 마시면서, 피자를 베어 물려다 치즈가 늘어나는 걸 감당하지 못하는 스네이프를 바라보는 기분이 꽤 괜찮다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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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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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변이 어두컴컴해서 바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비가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그 사이 그친 것일까? 그렇게 믿어야겠지만 자꾸 의구심이 솟았다. 해리는 제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어두움은 대낮에 비구름이 몰려와 어둑해진 정도의 하늘이 아니었다. 분명히, 아직 한밤중이었다. 해리는 순간 손목에 차고 있던 자신의 시계가 생각났다. 막 0시가 된 듯, 시침과 분침이 모두 숫자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초침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해리는 심장박동이 점점 커져가는 걸 느꼈다. 침착하려했지만 주먹 쥔 손에 땀이 스몄다. 젖은 바지에 땀이 찬 손을 닦아 봐야 소용없었지만 여러 번 천에 손바닥을 비볐다. 비에 젖은 생쥐 꼴인 몸만 아니었다면 해리는 방금까지 빗속에 있었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이 정말로 1년 전의 오늘이라면. 아니, 이젠 가정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해리는 자신이 그 날 자정에 어디에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래번클로 기숙사의 유령이며 래번클로의 딸인 회색 숙녀에게서 보관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마지막 호크룩스의 정체는 알게 되었지만 어디에 있을지를 막막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해그리드와 마주쳤다. 자정, 전투의 시작. 맞아. 해그리드와 함께 론과 헤르미온느의 행방을 찾으며 보관이 있을 장소를 떠올려냈었다. 필요의 방. 그 방으로 가던 길에 겁에 질린 팽을 쫓아간 해그리드와 헤어지고, 여러 사람들과 마주쳤었다. 그 길에 마주쳤던 인물 중에는 애버포스도 있었다. 그와 나눴던 대화를 해리는 기억했다.


슬리데린의 학생 몇을 인질로 잡을 생각은 왜 아무도 안 했을까? 그런 걸론 볼드모트를 못 막아요. 그리고 덤블도어였다면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으셨을걸요.


그 말을 했을 때, 해리는 스네이프의 결백에 대해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덤블도어는 오랫동안 스네이프를 변호했다. 그런 악인마저 믿은 사람이 학생들을 인질로 붙잡아둘 리 없다고......

스네이프를 증오하고 격렬히 분노했을 때의 감정을 해리는 여전히 기억했다. 이어서 해리는 그럼, 지금 이 순간엔 스네이프가 살아있겠구나 생각했다. 아찔했다. 예리한 화살촉에 심장이 관통당하는 느낌이었다. 스네이프 뿐만이 아니었다. 프레드도, 루핀도, 통스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아직은 살아있을게 분명했다. 하지만 과거에 미래의 사람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 괴롭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아무도 살리지 못해.


어쨌든 해리는 여기에 줄곧 서있을 수만은 없었다. 저 먼 곳에서부터 함성과 비명이 웅성웅성 들려왔다. 가까운 호그스미드에서 들리는 소리들도 있었다. 해리는 젖은 몸 위로 투명망토를 다시 뒤집어썼다. 순간이동으로 호그와트 근처까지 가니 소리는 귀를 멎게 할 만큼 크게 들렸다. 사방에서 오색의 주문들이 춤을 췄다. 해리는 몸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았지만 완벽하게 투명해진 게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주문이 날아온다면 피할 순 없었다. 해리는 프로테고(방어마법)를 쓰면서 사람들에게서 제법 떨어진 장소로 이동했다.


데스이터들과 마법생물들이 호그와트 학생들을 겨냥할 때, 남모르게 도움을 주면서 해리는 그곳에 몸을 은닉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문을 튕겨낸 학생들은 어리둥절해하다가도 곧 새로운 적을 마주하거나 자리를 피했다. 해리는 한숨을 내쉬며 스네이프가 죽기까지는 아직 4시간 정도는 더 있어야함을 상기했다. 전투 중에 지루할 틈은 없겠지만,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중간 중간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회중시계는 해리의 목에 걸려 달랑거리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들, 쓰러지는 사람들, 안도하는 사람, 분노하는 얼굴, 눈물과 웃음. 해리는 당시에 성에서 호크룩스를 없애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 완전히 참여하진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전투의 모습은 처참했다. 볼드모트에 대한 분노가 절로 솟구쳤다. 해리는 다시 시간을 확인 했다. 이쯤이면 볼드모트가 루시우스를 통해 스네이프를 찾는다는 걸, 볼드모트의 머릿속으로 침투한 과거의 자신이 깨달았을 즘이지 않을까. 해리는 조심스럽게 주문을 피하며 사람들을 지나, 버드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아무도 없는걸.”


아직 자신과 론, 헤르미온느는 성 안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해리는 버드나무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의 풀숲에 몸을 기대앉았다. 비명을 지르는 오두막으로 가는 구멍이 보였다. 저 안에 지금 볼드모트와 내기니가 있다. 그 생각에 내장이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해리는 양쪽의 옆구리를 붙잡으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해리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번개에 뒤통수를 맞은 듯 전율을 느꼈다. 아니, 정말로 번개를 맞아서 돌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스네이프... 해리의 눈앞에 스네이프가 있었다.


스네이프는 곧장 버드나무를 향해 침착하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하얀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볼드모트에게 죽임을 당하러가는 길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미래를 예감했을까. 아니, 스네이프는 늘 죽음을 각오했다. 두려워하면서도 그 위치를 항상 지켰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마법사의 충실한 종을 연기하는 것. 볼드모트처럼 영혼을 갈래갈래 찢지 않는 이상, 사람의 목숨은 평등하게 하나였다. 그런 목숨을 내놓고, 자신이 사랑하는 릴리를 죽였던 자의 밑에서, 온 세상 사람들의 오해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 1년 만에 본 스네이프의 모습에 해리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스네이프를 보면서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다. 지난 1년간, 시신 한 부분이라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 지금 살아서 눈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해리는 가슴 위를 달랑이며 두드리는 회중시계를 손으로 꽉 쥐었다.


살릴 순 없을 거야. 하지만 그 후 시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해리의 가슴이 크게 쿵쾅쿵쾅 뛰었다. 계속 여기서 지켜볼 것인가? 아예 저 안으로 스네이프를 따라 들어가는 건 어떨까?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해리는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정신없이 쿵쿵거렸다. 해리는 발소리보다도 심장소리가 들킬까봐 머플리아토 주문을 썼다.


좁은 구멍을 기어가는 동안, 해리는 긴장으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곧 스네이프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해리는 힐끗 볼드모트와 은빛을 뿜는 마법구체 속의 내기니를 보곤 스네이프에게서 조금 떨어져 몸을 웅크렸다. 스네이프가 지팡이를 휘둘러 통로의 입구를 낡은 상자로 막았다. 방 안의 불빛은 기억 속 그대로 희미하고 어두침침했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저는 해리포터를 찾고 있었습니다.”


볼드모트는 대답이 없었다. 길고 가느다란 해골 같은 손가락으로 딱총나무지팡이를 유려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섬세한 손놀림이 계속 이어졌다. 스네이프에게서 아주 약간 초조한 기색이 내비쳤다. 까만 눈은 마법구체로 보호되고 있는 내기니를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는 채였다. 덤블도어에게서 들은 명령을 떠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기니가 보호받는 때가 오면, 해리에게 말을 전해도 된다는 명령. 그 말이란, ‘해리포터는 반드시 볼드모트의 손에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주인님, 저는 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해낼 것입니다. 해리포터를 찾아내어, 주인님께 그를 바칠 영광을 제가 기꺼이 누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해리로선 스네이프의 낮고 끝이 약간 갈라지는 목소리를 아주 오랜만에 듣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 그의 목소리. 해리는 이제 아무런 분노와 증오를 담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들을 접했다. 그런 마음으로 처음 접해본 것들은 해리의 기억과 닮은 듯, 달랐다. 해리에게 말할 때의 스네이프의 목소리는 항상 비아냥거림으로 일관되어있었다. 스네이프는 볼드모트에게 아첨하는 말조차 담백하고 차분했다. 그의 하얀 얼굴은 무감정해보였다. 까만 눈이 내기니를 줄곧 응시할 뿐이었다.


“.......주인님, 저들의 저항이 약해지고 있......”

“그래, 네 도움 없이도 그렇게 되고 있지.”


해리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제부터는 기억 속에 있는 대화였다. 그렇다는 건, 입구를 막은 저 낡은 상자 뒤에 과거의 자신이 숨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 기분은 상당히 묘했다. 낡은 상자 뒤에도 투명망토를 쓴 해리포터가 있었고, 이 방 안에도 투명망토를 쓴 해리포터가 있었다.


볼드모트와 스네이프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1년 전에 낡은 상자의 희미한 틈으로 봤을 때와 다르게, 지금 해리는 그 방 안에 함께 존재하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스네이프는 계속 해리를 찾아 나서게 해달라며 구걸했다. 해리는 이제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볼드모트에겐 상당히 귀찮게 들릴 만한 집요하고 끈덕진 요구였다.


“어쩌면 너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느냐? 어쨌든 너는 대단히 영리한 자니까, 세베루스. 그동안 너는 착하고 충실한 종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유감스럽구나.”

“주인님......”

“딱총나무 지팡이는 나를 제대로 섬길 수가 없었다, 세베루스. 왜냐하면 나는 이 지팡이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딱총나무 지팡이는 이전 주인을 죽인 마법사의 소유가 된다. 그런데 네가 알버스 덤블도어를 죽였다. 세베루스, 네가 살아 있는 한 딱총나무 지팡이는 진정한 나의 소유가 되지 못한단 말이다.”

“주인님!”


스네이프가 지팡이를 치켜들며 반발하는 게 보였다. 해리는 숨을 죽였다. 곧, 곧이었다... 주문을 써서 제 인기척이 들리지 않게 막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해리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들킬까 염려스러웠다. 그만큼 심장이 너무 빠르고 불길한 박자로 뛰고 있었다.


“달리 다른 방법이 없구나. 나는 반드시 이 지팡이의 주인이 되어야만 한다. 세베루스, 이 지팡이를 지배해야 결국에는 포터를 지배할 수 있다.”


그 뒤를 알고 있었지만 볼드모트가 지팡이를 휘두르는 순간, 해리 역시 스네이프처럼 지팡이 끝에서 살인주문이 날아올까 긴장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대로, 볼드모트는 내기니가 든 구체로 지팡이를 휘두른 것이었다. 한순간 안도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뱀의 우리를 바라보며 스네이프는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내기니가 스네이프의 머리와 어깨를 덮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해리는 쉭쉭거리는 볼드모트의 소름끼치는 말소리를 들었다. 이제 해리는 파셀통그를 할 수 없었으므로 그 소리는 그저 쉭쉭거림으로만 들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 뜻만은 확실히 기억했다. ‘죽여.’ 해리의 발끝에서부터 싸늘함이 올라왔다.


“유감스럽구나.”


전혀 유감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오두막은 오로지 스네이프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볼드모트는 차갑게 뱀 우리와 함께 돌아섰다. 홀로 버려진 스네이프는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목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미친 듯이 솟아나왔다. 피 웅덩이 속에 핏기가 사라져가는 하얀 고목이 누워있었다. 해리는 고통에 찬 스네이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해리 역시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지만 계속해서 그를 보았다.


문득 해리는 투명망토를 벗고 나타난 과거의 자신을 발견했다. 해리처럼 스네이프도 그를 발견하고서 눈을 크게 떴다. 미래의 해리가 본 과거의 자신의 얼굴은 온통 혼란으로 일그러져있었다.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행동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과거의 해리는 스네이프의 몸 위로 허리를 숙였다. 스네이프의 목구멍에서 꼴딱꼴딱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숨이 꺼져가는 소리는 듣는 사람의 심장을 쥐어짰다.


“이걸...받아... 이걸...받아......”


스네이프가 자신의 기억을 해리에게 주고 있었다. 피와 은빛의 기억들이 흘러나오는 스네이프의 몸은 기이해보였다. 과거의 해리는 멍청하게 있다가 헤르미온느가 불러낸 플라스크로 겨우 기억을 담아냈다. 스네이프는 힘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남은 기력을 모두 짜내 한 마디를 뱉었다.


“나를...보아라......”


과거의 해리가 스네이프의 까만 눈에 제 초록색 눈을 비췄다. 스네이프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과거의 해리는 멍하니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 때, 날카롭고 싸늘한 볼드모트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과거의 해리는 다시 볼드모트가 오두막으로 돌아온 줄 알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건 호그와트와 인근 지역을 향한 확대된 음성임을 곧 깨달았다.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는 입구를 통해 다시 통로로 돌아갔다.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과거의 해리가 한 번 뒤돌아 스네이프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미래에서 온 해리는 스네이프의 곁에 앉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해리는 스네이프가 내기니에 물려 피를 뿜는 순간부터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깨달았다. 해리는 거추장스러운 투명망토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입고 있는 망토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새벽, 스네이프의 추도식에서 만난 퍽스의, ‘불사조의 눈물’이었다. 해리는 아낌없이 스네이프의 구멍 난 목덜미에 그것을 부었다. 이 눈물은 바실리스크의 독조차 낫게 했다. 하지만 부활의 돌이 말해주듯, 이미 죽은 자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제발, 아직까지 스네이프가 꺼져가는 마지막 목숨 한 자락을 쥐고 있다면.


스네이프의 목덜미에 뚫렸던 구멍이 메워졌다. 상처 하나 없이 하얀 목덜미가 돌아왔다. 진저리치는 스네이프의 신음이 해리의 귀에 아주 반갑게 들렸다. 그는 정신을 바로 차리지 못했다. 흐릿하게 깜박이는 스네이프의 눈은 제일 먼저 자신이 쏟아낸 피 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스네이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자신의 출혈량에 넋을 놓았다. 그리고 그의 눈길은 옆에 앉아있는 해리의 운동화에 와 닿았다.


“너, 넌..”

“괜찮으세요, 교수님? 어디 아픈 곳은 없나요?”


스네이프는 눈을 찌푸렸다가, 감았다가, 다시 부릅떴다. 해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해리는 이보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리둥절해하는 스네이프를 보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평안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있지...? 하나도 아프지 않아... 분명 난 그것에 물렸는데...?”


스네이프의 손이 더듬더듬 제 목덜밀 짚었다. 그리고 놀란 듯 고개를 돌려 상처를 확인했다. 뚫린 구멍조차 없었다. 스네이프는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이게 죽은 후의 세계인가 싶었다. 그런데 왜 죽은 뒤에 해리포터를 만난거지?


“아하! 너도, 나도 죽은 거로군. 내 기억을 보고 포터, 넌 죽으러 간 것이구나.”

“하하하! 지금 우리가 죽은 거라고요? 여기가 사후세계 같으세요, 교수님?”


해리의 말투는 놀리는 것처럼 장난스러웠다. 스네이프는 기분이 상한 듯 한쪽눈썹을 쭉 일그러뜨렸다. 해리는 지금, 굉장히 신기한 기분이었다. 스네이프를 전혀 나쁜 감정 없이 바라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11살 때 스네이프를 처음 봤던 첫인상마저도 불쾌했었다. 왜 저 교수님은 나를 저런 표정으로 바라보실까. 낯선 이에게서 받는 무조건적인 경계는 이질적이고 불유쾌했다. 하지만 이제 해리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얼굴로, 어린 스네이프를 괴롭히던 소년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해리의 아버지, 제임스포터. 이렇듯 자신의 외형이 그를 빼다 박았기 때문에, 스네이프는 조금도 해리를 좋게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해리가 릴리의 어느 부분을 더 많이 닮았다면, 둘의 관계는 일찍이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볼수록 스네이프와 자신의 관계는 흥미로웠다. 해리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리를 싫어하면서도 스네이프는 릴리의 아들인 해리의 생명을 구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엔, 해리가 스네이프의 생명을 구했다.


“죽은 게 아니라면...대체 넌 뭐지? 왜 다시 돌아온 거야? 기억은 보았나? 볼드모트는...”

“와, 교수님이 이렇게 저에게 질문이 많은 날은 기념비라도 세워야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아, 기념비는 아니지만 비석 하나는 세웠군요.”

“대체 아까부터 무슨 태도냐, 포터! 대답을 해!”


해리는 이제 스네이프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스네이프까지 바뀌라는 법은 없었다. 해리는 사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너무 적응이 안 되었을 테니까.


“우선, 저는 교수님이 아시는 포터는 아니에요.”

“무슨 소리지? 포터가 아니면 넌 누구란 말이냐?”


스네이프는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해리의 안경 앞에 지팡이를 겨눴다. 아하, 이런. 해리는 스네이프를 구하자마자 자신이 죽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무장해제주문이 스네이프에게로 빠르게 날아갔다. 스네이프의 지팡이는 가볍게 허공에 떴다가, 해리의 손에 들렸다. 그 행동에 스네이프는 이제 완전히 자신을 적으로 간주한 것 같았다.


“아, 물론 전 해리포터입니다 교수님. 제 말은, 제가 교수님이 지금까지 알고 계시는 해리포터가 아니란 말입니다. 저는, 1년 후 미래에서 왔어요. 황당하시겠지만, 아, 저도 정말 믿기 힘들었다고요? 이게 타임터너였어요, 교수님.”


해리는 목에 걸린 회중시계를 꺼내 스네이프의 손 위에 올렸다. 스네이프는 의심 가득한 까만 눈으로 천천히 시계를 살폈다. 뚜껑을 열자 아무것도 없는 하얀 판만 보였다.


“...시계 같지 않은데.”

“그렇죠?”

“그럼 왜 1년 후에서 네가 여기로 온 거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묻는 스네이프의 눈에 깜박 빛이 들어왔다. 질문과 동시에 대답을 깨달은 것 같았다. 정말이지 세베루스 스네이프는 인정하기 싫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군.


“나는 원래 죽었었나 보군.”

“글쎄요, 그게 좀 애매해요. 스네이프 교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 살아계신 분 앞에서 시신이라고 말하니 좀 그렇지만. 어쨌든 1년 전 저는 전쟁이 끝나고 바빠서 사흘 동안 이 오두막엘 못 왔죠. 아, 맞아, 전쟁은 우리의 승리였어요. 볼드모트를 제가 죽였어요. 음, 설명할 것이 너무 많아서 복잡하네... 어쨌든! 제가 사흘 후 돌아왔을 때, 교수님의 시체는 사라졌었어요.”

“내 시체가 없어졌다고?”

“흔적조차 없었죠. 그래서 제가 그동안 얼마나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교수님은 모르실 거예요. 물론, 굳이 알아주실 필요는 없지만요.”

“그래서 포터 네가 그 타임터너로 날 살리러 온 거다?”

“아니, 그거랑은 달라요.”


스네이프는 의아한 얼굴로 해리를 바라보았다. 해리는 몇 번 입술을 달싹였다. 목이 칼칼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사실... 프레드랑 루핀교수님, 통스 등...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전 그 사람들을 살리려고 하지 않았어요.”


해리의 시선이 스네이프를 피해 바닥을 향했다. 스네이프는 루핀이 죽었다는 말에 깜짝 놀란 것 같았지만, 곧 덤덤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질문을 하지 않고 해리의 말을 기다렸다.


“미래의 사람이 바꿀 수 없는 과거에 개입해선 안 되니까요.”

“그럼 넌 왜 날 살린 거지?”

“그건, 제가 바꿀 수 없는 과거에 개입한 게 아니니까...일까요?”

“......? 무슨 아리송한 소리냐, 포터.”

“저는 이 타임터너를 우연히 얻었어요. 전 지금 오러로 활동하고 있는데, 오늘은 혼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죠. 이게 정체를 모를 사람들의 거래물품이었고, 전 이게 무엇인지 몰라서 무슨 목적의 물건인지 알아내야 했어요. 오늘은 1년 후엔 종전기념일이죠. 교수님의 비석 앞에서, 아, 그건 금지된 숲에 세웠어요. 하여튼 전 사람들과 교수님의 추도식도 가졌어요. 오늘 하루 종일 저는 교수님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거예요. 저는 교수님의 시신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해서, 일이 어떻게 된 걸까, 전 정말 그 전말을 알고 싶었어요. 그랬더니, 이 물건이 절 1년 전으로 돌려놨죠.”

“...여전히 도통 모르겠군. 왜 날 살린 건지에 대한 설명이 안 돼.”

“모르시겠어요? 교수님의 시신은 오늘, 사라진 거예요. 왜겠어요?”


해리는 조금 웃었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웃는 얼굴을 아주 낯설게 바라보았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건 어색한 일이었다.


“제가 미래에서 와서 교수님을 데리고 사라졌기 때문에, 1년 전 저는 교수님을 찾을 수 없었던 거죠.”


그동안의 고민이 이런 식으로 풀릴 줄 몰랐다. 해리는 시원하기도 했고, 이 해답이 놀랍기도 했다. 스네이프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가득 찼지만 이것이 정답인 것은 당연했다.


그보다 해리는 한 건을 해결했다 싶은 후로, 슬슬 배고픔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타임워프 이전에도 점심시간에 가까운 때였고, 과거로 넘어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4시간 넘게 정신과 체력을 소모했다. 임무를 끝내고 호그스 헤드에서 버터맥주를 마시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버터맥주는커녕, 학생들의 대피 때문에 미어터지는 호그스 헤드에 발조차 들일 수 없을 것이었다.


해리는 다시 스네이프에게서 회중시계를 돌려받았다. 그리고 함께 돌아가기 위해 스네이프의 손목을 잡았다. 스네이프는 기분 나쁜 듯 쳐내려고 하다가, 해리의 의도를 알고 못마땅하게 손목을 내주었다. 앙상하게 마른 손목은 여자만큼 가늘었다. (비교대상은 지니와 헤르미온느 뿐이었지만, 그녀들도 무척이나 가늘었으니까) 그건 그동안 그가 얼마나 못 먹고 지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우선 자신의 배고픔이 먼저였다.


“1년 후 오늘로 돌아가고 싶어.”


해리는 시계의 뚜껑을 열고, 하얀 판에 또박또박 말을 읊었다. 스네이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해리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해리는 빨리 판이 까맣게 변해서, 황금색 세 개의 침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시계는 묵묵부답이었다. 해리는 당황해서 다시 한 번 똑똑히, 흰 판에 입술이라도 부딪힐 듯 가까이에서 말했다. 그러나 결과는 아까와 같았다. 해리는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회중시계는 미래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선 어떠한 힘도 보여주지 않았다. 해리는 눈치를 살피며 스네이프를 바라보았다. 스네이프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제 손목을 잡고 있던 해리의 손을 뿌리쳤다.


“그래, 포터. 앞으로 1년간 잘 숨어 지내야겠군. 과거의 자신과 마주치지 않으려면 말이다.”


스네이프의 입술이 비뚜름히 위로 올라갔다. 아, 그 빈정거림은 정말이지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반갑지 않았다.


아아, 믿을 수가 없어... 해리는 양손으로 머리를 틀어잡았다. 사실 이게 현실인 것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 꿈을 꾼 거다. 스네이프의 사라진 시신의 행방이 너무 알고 싶었던 나머지, 심지어 이런 꿈을 꿔버린 거다. 해리는 제 팔을 세게 꼬집었다. 아야, 따끔함에 눈물이 찔끔 났다. 사실 이게 현실이라는 건 너무도 자명했다. 애써 회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1년을 스네이프와 함께 숨어 살아야한다고...? 설마! 그런 대가를 치러야 할 줄은 몰랐다고...!


나무판자로 막힌 오두막의 창의 틈에서 어스름한 푸른빛이 비췄다. 해리의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얼굴과 스네이프의 떨떠름한 얼굴이, 틈새로 들어온 빛으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어쨌든 1년이 지나기까지 쭉 스네이프의 행방조차 알 수 없었으니, 해리는 자신이 그를 데리고 잘 숨어있었겠거니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은 이제부터 자신이 해내야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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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우리 해리 고생길이 훤하다

아니다 이것은 사랑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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