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해리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체육교실의 선생님으로 일하게 됐다. 스네이프 아버지의 사고로 지급된 돈만으로 성인남성 두 명이서 1년을 버티긴 힘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해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무료한 생활에 좀이 쑤셨다. 여가시간에 퀴디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직업인 오러 역시 활동적인 일이었던 해리였다. 며칠 집 안에만 있는 것이 해리에겐 벌을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네이프의 말대로라면, 이 마을에는 릴리 이전과 이후에 마법사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해리가 바깥을 돌아다닌다 해서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래서 해리는 마법을 써서 머글들이 보기에 아주 적절한 절차를 거쳤다고 생각하게 한 뒤,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남의 일자리를 뺏은 건 아니었다. 해리는 호그와트로 들어간 후에는 머글들과 같이 일을 할 일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즘 해리는 일이었어도 즐거운 기분으로 출근을 나갔다. 가끔 지팡이를 깜박하고 들고 가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지팡이를 들킨다면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니, 해리는 웃음이 나왔다.


스네이프는 일은 나가지 않았지만, 집 안에서 책을 읽거나 마법 약을 만들어 비축해두었다. 마법재료들이 부족할 때는 해리가 바깥에서 가져온 머글 머리카락을 넣은 폴리주스 약을 만들어 다이애건 앨리에 다녀왔다. 훌륭한 포션 마스터인 스네이프가 만들어낸 폴리주스의 효과는 아주 좋아서, 해리가 혹시나 싶어 챙겨간 투명망토도 전혀 필요가 없었다. (그린고트의 금고는 꼭 본인이 가지 않더라도 신분증명만 되면 금고를 들를 수 있어서, 폴리주스로 변신한 해리는 스네이프의 열쇠와 편지를 가지고 마법 약 재료를 살 돈을 찾아왔다.)


마법사의 은신생활은 생각보다 편안하고 쉬웠다. 이러니 과거의 자신이 도저히 찾을 수 없었겠지. 과거의 해리는 스피너즈 엔드를 스네이프에게 있어 자신의 프리벳가 4번지 같은 곳이라 여겼기 때문에, 스네이프가 절대로 거기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 게 맹점이었다. 지금 둘은 그 곳에서 생각보다 조용하고 마찰 없이, 서로의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직장 근처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사왔어요!”


집 안으로 들어온 해리는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향기에 그대로 몸을 멈춰 세웠다. 빗자루로 허공을 가를 때 느껴지는 냄새, 축축한 흙냄새, 들꽃냄새, 그리고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은 마른 책 냄새 같은 것이 코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순식간에 몽롱하게 행복해지는 느낌이었다. 향기는 부엌으로 다가갈수록 더욱 진하게 맡아졌다.


“왔나, 포터.”

“교수님, 이거...”


스네이프는 요즘 소일 삼아 교과서에 쓰인 약물들을 차례로 만들어보고 있었다. 그 약이 오늘은 사랑의 묘약인 게 틀림없었다. 이토록 황홀한 향기는 그 약이 아니고선 맡을 수 없었다. 해리의 얼굴이 불그스레하게 물들었다. 해리는 가까이 다가가, 스네이프가 젓고 있는 아름다운 색의 액체를 바라보았다.


“웃기는 얼굴을 하고 있군, 포터...”


스네이프는 해리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빈정거리며 한 쪽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해리는 맡고 있는 향기가 너무 좋기도 했고, 향의 끝에 느껴지는 이 마른 책 냄새 같은 것이 왜 나는지, 이걸 어디서 맡아본 건지 생각이 나질 않아 스네이프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이건 위즐리의 가게에 납품할 생각이다. 놔둬봤자 제일 쓸모도 없는 약이니까.”

“와, 스네이프 교수님의 사랑의 묘약이라니... 엄청나게 효과가 좋을 텐데, 호그와트 학생들 사이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겠네요.”

“흥. 유치한 것들...”


고작 물약 따위로 사람의 마음을 훔칠 수는 없었다. 스네이프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들었지만, 이 약에 대해 전혀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해리는 이 약을 마시지 않아도, 약에서 풍겨오는 자신이 좋아하는 향기들을 맡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지니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고, 퀴디치 생각도 났다.


스네이프도 지금, 맡고 있겠지. 문득 해리는 자신이 스네이프였다면 지금 어머니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을 느꼈다. 엄마 냄새라는 건, 몰리아줌마의 품에 안겼을 때에 이런 느낌일까 생각해본 게 전부였다. 그래서 생각도 거치지 않고 입 밖으로 튀어나간 말은, 수습할 수가 없었다.


“엄마 냄새는 어때요?”

“...뭐, 라고?”

“지금 교수님이 맡고 계신... 아.”


해리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스네이프의 국자를 젓던 손이 뚝 멈추었다. 무시무시한 스네이프의 얼굴을 마주하자, 해리는 투명망토를 뒤집어쓰고 딱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죄송합니다. 엄마 냄새가 궁금해서... 저도 모르게 말이 헛나갔네요.”

“......”

“...교수님?”

“하아... 나는 가끔씩 포터, 네가 릴리의 아들이란 걸 까먹는군.”

“네?”


화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스네이프가 내놓은 말은 뜻밖이었다.


“이제 곧 죽을 줄 알고 너에게 기억을 다 털어놓은 게 후회스럽군. 불쑥불쑥 네가 릴리의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다면...”


스네이프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근간 스네이프의 말랐던 몸에도 살이 조금 붙고, 얼굴도 편안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릴리를 떠올리면 괴로운 듯, 스네이프는 벽을 멍하게 볼 뿐이었다. 해리는 그런 스네이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놔두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서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스네이프의 손목을 잡고 응접실로 데려와 소파에 앉혔다. 그는 정신이 없어보였다.


“교수님. 죄송해요. 저한테도 엄마를 떠올리면 괴로운 부분이 있으니까, 교수님도 그러실 텐데. 제가 배려를 못했습니다.”

“......”

“앞으로 엄마 얘기를 전혀 안 하고 싶으세요...?”


해리는 이걸 지금 물어봐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스네이프가 어떻게 대답하든, 그에 따라주기로도 마음먹었다.


“...그럴 순 없겠지.”


스네이프가 조금 정신이 돌아와 해리의 눈을 마주했다. 릴리에게서 물려받은 해리의 초록 눈을, 지금 생각하니 의도적으로 피해온 것 같다고 스네이프는 생각했다.


“넌 릴리의 아들이고, 나는... 여전히 릴리를 잊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별로 그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다. 네 생각은 모르겠지만, 포터.”

“음... 전, 교수님이 엄마를 오래전부터 잘 알고 계신 분이니까... 엄마에 대해 듣고 싶다곤 생각해요. 하지만 교수님을 괴롭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교수님이 먼저 얘기해주시기 전까진 조심하겠습니다.”


스네이프는 해리가 이렇게 이해심 넘치는 태도를 보이는 게 놀랍기도 했다. 처음 봤을 땐, 허벅지까지 올까 싶을 만큼 작았던 맹랑한 녀석이. 어느새 한 명의 성인 남성으로 자라 낮아진 목소리로,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분명하게 의사를 전했다. 그리고 더 놀랍게 느껴지는 점은, 스네이프는 이 녀석이 완전히 자라면 제임스 포터와 똑같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렇지도 않단 점이었다. 스네이프는 가끔씩 해리가 릴리의 아들이란 걸 잊는 것만큼, 제임스의 아들이란 것도 잊어버렸다. 해리는 요즘 스네이프에게 그저 올곧이 해리로만 보였다.


이게 익숙해진다는 건가.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살고 있으니 해리 포터가 너무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그건 해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밝고 친근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일이 없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굉장히 무섭게 느껴졌다. 해리 포터와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이렇게 무탈하게 같이 살 수 있다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하지만 그런 질문이 무색하게, 둘은 여태 아무 일 없이 지내왔다.


“샌드위치 드실래요? 교수님이 저번에 맛있다했던 닭고기로 사왔어요.”


불현듯 떠올린 해리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봉투를 위로 들어보였다. 스네이프는 갑자기 허탈해져서, 정신적인 소모를 벌였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리고 해리가 자신이 했던 사소한 말까지 기억해서 음식을 사온 게 새삼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이걸 이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다는 게 스네이프는 믿기지 않았다. 해리 포터가 익숙해지다니. 자신이 해리 포터를 해리 포터로만 바라볼 수 있었다니. 그 모든 게, 얼마나...


해리는 스네이프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원래 그는 피부가 너무 하얘서, 언제나 창백하게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느낌이 좋질 못했다.


“...널 증오했다.”

“...교수님?”

“해리 포터, 넌 존재 자체로 나를 화나게 했어. 릴리가 그 자식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게... 나는 잠도 자지 못할 만큼 괴로워했다......”

“교수님...”

“그런 아이를 내가 지켜야했다. 내가 릴리를 죽게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죗값을 치러야 했어... 너를 지키다 그녀가 죽은 걸 알면서도... 너를 증오하면서도......”

“......”

“하지만 네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걸 알게 되자... 내가 여태 살아온 삶은 뭐였나 싶어, 환멸을 느꼈다... 릴리가 목숨 바쳐 지킨 너를, 나는 적절한 순간에 죽이기 위해서 보호해왔다는 생각에... 죽어서 릴리를 볼 낯은 생겼다고 믿었는데, 그것마저 소용없어진 것 같았다.”


해리는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스네이프는 울음을 꾹 참고 있었다. 내려다본 스네이프의 손은 핏줄이 불거지도록 주먹을 쥐고 있었다.


“...내기니에 물려 죽기 직전, 나는 너에게 기억을 주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널 살릴 수도 있었지만... 아예 릴리에 대한 희망을 버리기로 했다. 나는 덤블도어가 시킨 대로... 널 죽게 만들 기억을 결국 주었지. 그 때 난... 죽어서도 릴리를 만나지 못할 걸 각오하고 저지른 거였다.”


그 때, 스네이프가 마지막으로 원한 것은 해리의 눈이었다. 죽음 이후의 희망을 버리면서, 릴리의 초록색 눈을 마지막으로 보기를 원한 것이었다. 나를 보아달라고, 그 눈을 마지막으로 보며 죽는다면 그것으로 된 거라고. 해리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해리는 팔을 뻗어 스네이프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의 몸에선 마른 책 냄새가 났다.


“그 때 릴리를 완전히 놓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살아나니 여전히 릴리가 생각나고... 괴로워......”

“죄송해요, 교수님... 제가, 제가 멋대로 교수님을 살려서, 그래서...”

“......해리 포터.”


스네이프가 천천히 해리의 몸을 밀어냈다. 해리는 그 품을 계속 안고 있으려다가, 스네이프가 부정적인 느낌으로 밀어낸 게 아니라는 느낌에 서서히 몸을 떼고 시선을 마주했다. 해리는 눈물로 시야가 흐릿했다. 그럼에도 스네이프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 놓치지 않았다.


“난 널 이제 미워하지 않는다.”

“......네?”

“내가 날 살린 너에게 화나서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으냐? 끝난 걸 다시 시작으로 만들어버린 너에게 물론, 화가 나야 마땅하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졌어. 너와 사는 게 익숙해졌다. 놀라운 일이지 않나, 포터? 널 미워한다면 난 견딜 수 없었어야 해... 하지만 여태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내왔다. 그게 이상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해리는 생각이 제대로 정리 되지 않았다. 그래서 두서없이 다시 스네이프를 끌어안아버렸다. 해리는 눈물이 멈추질 않아서 그칠 때까지 울었다. 화해를 알게 된 밤이었다. 해리는 이미 오래 전에 스네이프를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고드릭 골짜기로 가지 않을래요?”


해리는 아침식사를 하던 중에 아주 사소한 질문인 것처럼 말을 던졌다. 스네이프는 수프를 뜨다가 해리와 눈을 마주쳤다. 오늘은 주말이었고, 해리는 일을 나가지 않았다. 주말이면 외출에 대한 말을 가끔씩 꺼내던 해리였지만, 오늘만큼 먼 곳을 가자고 말한 적은 없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지?”


스네이프는 어제 저녁의 일로 해리의 의도를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게 스네이프로선 최선이기도 했다.


“호크룩스를, 그러니까 내기니나 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무언가에 깃든 찢어진 볼드모트의 영혼들이요. 그걸 찾아다닐 때, 정보도 없이 헤매다가 뭔가 그곳에서라면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한 번 가봤었어요. 거기에서 볼드모트의 함정에 걸리긴 했지만, 지금은 아무 문제없을 테니까요. 교수님과 같이 간다면 뜻 깊을 것 같아요.”

“...정말 대단하군, 넌 나에게서 네 엄마를 지우고 싶지는 않은 건가?”

“제가 무슨 권리로요? 그리고 전 그렇게 사랑을 할 수 있단 게 대단하다고 느끼는걸요.”

“꼭 덤블도어 같이 말을 하는군.”

“저번엔 아무 것도 들고 가질 못해서, 꽃다발을 하나 사서 갈 생각이에요. 같이 가주실거죠?”

“흥, 제임스 자식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내 손으로 놈을 죽여 버리겠지만.”


스네이프 나름의 승낙의 말이었다. 해리는 씩 웃으며(그런데 그게 웃어도 되는 말이었을까?) 자리에서 일어났다. 꽃을 사오겠다며 해리는 문을 열고 나갔다. 창 너머로 멀어지는 해리의 뒷모습을 보다가, 스네이프는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날이 더워져가고 있었지만 스네이프는 까만 셔츠와 바지를 꺼내 입었다. 꽃다발 두 개를 사서 돌아온 해리는 스네이프에게 더워 보이게 그게 뭐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렇지만 딱히 갈아입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해리는 자신도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스네이프는 더워 보인단 해리의 말이 조금 신경 쓰여, 거울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조금... 그런가. 스네이프는 단정하게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하얀 뒷덜미에 작은 꽁지가 솟았다.


해리는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꽃다발과 투명망토를 챙겨 나왔다. 그리고 어제 못 먹은 샌드위치를 챙겨가자고 말하려는 찰나, 스네이프의 꽁지머리를 발견했다.


“헉. 아니... 우와!”

“...대체 그게 무슨 반응이지, 포터?”

“아니...그게! 처음 봐서... 와, 교수님, 머리를 묶으셨군요!”

“그렇게 요란한 반응이 나올만한 일은 아닌 것 같구나, 포터. 네 말대로, 조금 더울지도 모르니까...”

“완전...”


해리는 말을 하려다가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스네이프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내리긴 했지만, 더 이상 이 주제로 말하고 싶지 않아 무시했다. 해리는 해리대로, 자기 자신에게 놀란 상태였다. 해리가 뱉을 뻔한 말은 ‘귀엽다’였기 때문이었다.


‘귀엽다고? 스네이프가~???’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의문을 품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머리를 묶은 스네이프가 귀여워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건 일순간의 감상도 아니었고, 해리는 스네이프를 흘낏 볼 때마다 계속 그렇게 느꼈다. 물론, 스네이프가 지금 레질리먼시를 쓰고 있지 않아서 너무나 다행이라고 해리는 생각했다.


“가, 가죠.”

“샌드위치를 챙긴다하지 않았나, 포터?”

“아, 맞, 맞다! 아씨오 샌드위치! ...물병!”


해리는 냉장고 문이 벌컥 열리며 품으로 날아오는 샌드위치와 물병을 격하게 받아냈다. 스네이프는 허둥거리는 해리를 의아하게 내려다보며, 아씨오 주문으로 바구니를 불러내 그것들을 담았다. 해리는 두근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다잡았다. 스네이프에게 더워 보인다고 한 말을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싶었다. 그 말 탓에 묶은 스네이프의 머리 때문에 이렇게 더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아, 더워...


덥석, 잡힌 팔에 해리는 온 몸으로 소스라쳤다. 스네이프의 손이 해리의 팔뚝을 잡고 있었다. 도, 도대체 왜 이 순간에 몸을 건드리고 난리예요...?! 그렇게 해리는 소리치고 싶었지만, 곧 이게 동반순간이동을 위해서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고드릭 골짜기.”


스네이프가 말했다. 이윽고 온 사방에서 쥐어 짜이는 감각이 해리의 몸을 짓눌렀다. 해리는 이 정신없음이 그 순간이동 탓이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해리는 투명망토를 몸 위로 썼다. 스네이프는 해리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아주 가까이에 있어 기척으로 알아챘다. 해리는 이 근처에 마법사들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다 아무 분장도 하지 않은 스네이프의 존재유무가 들킨다고 해서, 딱히 안 좋을 일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보다 과거의 자신이 그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 스네이프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네이프의 존재가 마법사들에게 들키는 것도 해리는 싫었다. 해리는 과거의 자신과 마주치면 절대로 안 되기 때문에 반드시 숨어야만 했다. 그런데 스네이프의 존재를 마법사들이 알면, 자신은 들킬 염려가 커지므로 스네이프를 떠나서 살아야했다. 그걸 생각하니, 가슴이 콱 막혀오는 것 같았다.


광장을 가로지르다가 스네이프는 전쟁기념비 앞에 멈춰 섰다. 그것은 해리가 다가서자 세 사람의 동상으로 형태를 변모했다. 그걸 처음 봤던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 날,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던 동상은 이제 말끔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릴리의 다정한 눈길은 그녀의 품 안에 안긴 아기를 향해있었다. 아기의 이마는 번개흉터 없이 깨끗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아무 일 없이 행복하고 안온할 것처럼 보였다.


“이런 걸 세웠던 건 몰랐군...”


스네이프 역시 해리처럼 동상의 존재를 몰랐던 모양이었다. 스네이프는 아까부터 조용하게 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상인데도 여전히 그 시선은 나를 봐주질 않는군. 스네이프는 씁쓸하게 자조했다.


“교수님.”

“뭐지, 포터?”

“절 봐요.”


해리는 투명망토를 벗고, 자신을 돌아보는 스네이프의 눈동자에 자신의 초록색 눈동자가 비치는 걸 바라보았다. 스네이프의 동공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차마 시선을 돌리는 법을 잊은 듯, 해리의 예상보다 긴 시간동안 눈을 맞추었다. 해리는 눈을 깜박거리지 않게 의식하느라 눈물이 고였지만, 애써 꾹 참았다. 스네이프가 다시 아쉬운 기색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을 때에야 해리는 여러 번 눈을 깜박이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들린 스네이프의 말과 동시에 고였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고맙다.”


해리는 흘러내린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스네이프는 해리를 등진 채 서있었다. 해리의 가슴 안에서 뜨겁고 간질거리는 것이 뭉클거렸다.



공동묘지가 있는 교회로 향하는 동안 투명망토를 쓴 해리와 스네이프는 몇 명의 사람들을 지나쳤다. 하지만 그들 전부 스네이프에게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들이 마법사였다면 그를 몰라봤을 리가 없었다. 불과 일주일 전, 예언자일보에는 화제의 ‘해리포터의 데스이터 스네이프 변호 재판’이 실렸다. 신문엔 스네이프의 사진도 실렸고, 그 소식은 전쟁 이후 마법세계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다름 아닌 전쟁의 영웅 해리 포터가 그 어둠의 마왕이 가장 아꼈다는 데스이터를 변호하고 나섰으니 말이었다. 당시에 해리는 해리 포터가 돈 게 아니냐는 말도 심심찮게 들었다. 하지만 해리는 자신을 둘러싼 루머와 소문에 너무나 익숙한 유명인이었다. 당연히 그쯤은 개의치 않았다. 단지 스네이프의 결백이 밝혀질까에만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그래야 사라진 스네이프의 시신도 돌아올 것 같았다. 그랬던 해리는 이제 ‘스네이프의 존재가 들키지 않아 다행이다.’ 라는, 과거의 자신이 들었으면 분노했을 생각을 하면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교회를 빙 돌아 공동묘지에 도착한 해리는 두리번거리며 부모님의 묘를 찾았다. 이 근처인 것 같은데, 바로 찾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밤인데다 눈이 왔었다. 환한 낮에 찾으려니 그 때의 감각이 살아나질 않았다. 그러다 스네이프가 먼저 묘비를 발견한 듯 성큼 다가섰다. 해리도 하얀 대리석으로 된 묘비를 알아볼 수 있었다. 헤르미온느가 마법으로 불러냈던 크리스마스 장미화환은 관리자가 치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스네이프가 조심스레 릴리의 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묘비에 음각으로 새겨진 이름의 스펠링을 쓰다듬었다.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Lily를 섬세하게 쓸어내렸다. 투명망토를 벗은 해리가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처음 와보시는 거세요, 교수님?”

“...그래. 그녀가 죽은 날 이 골짜기에 와보고 여긴 처음이다. 난 장례식에 참가할 입장이 되지 못했으니까...”

“...자, 꽃다발. 이건 교수님이 올려놔주세요.”


해리는 백합다발을 스네이프에게 건넸다. 방금까지 릴리의 이름을 쓰다듬던 손가락이 꽃을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해리는 여러 가지 꽃이 섞인 다발을 아버지의 묘비 위에 올려놓았다. 스네이프는 가만히 백합의 향기를 맡았다가, 릴리의 묘비에 올려놔주었다. 스네이프의 얼굴은 고요했지만 호수 같았다. 축축한 물로 가득 찬 호수 말이었다. 해리는 잠시 자리를 피해주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설렁설렁 근처의 묘비들을 구경하러 간 척을 했다.


해리는 멀찍이 떨어져서 울창한 잎을 가진 까만 나무 아래에 섰다. 해리의 얼굴 위로 나뭇잎의 음영이 흐드러졌다. 멀리 스네이프의 등이 보였다. 저 밑에 묻혀 계신 부모님이 지금 해리와 스네이프의 모습을 봤다면, 무슨 반응을 보이실지 궁금했다. 제임스는 아마 기겁을 할 것이고, 릴리라면 웃으면서 바라봐줄 것 같았다. 그래, 해리 너도 그의 친구가 돼주기로 한 거니? 세베루스는 좋은 아이야, 다만 그를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사랑하진 못했구나. 그래서 세베루스는 상처를 입은 거란다... 사람의 감정이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안 그러니? 해리. 해리는 엄마가 했을 법한 말들을 상상하면서 발끝으로 돌멩이들을 헤집었다.


해리도 알고 있다. 사람 마음은 주는 대로 다 돌아오는 게 아니다. 스네이프는 아주 오랫동안 엄마를 사랑했지만, 엄마는 자신의 아빠와 결혼했고 자신을 낳았다. 그녀를 친구로만 바라볼 수 없었던 스네이프는 그래서 상처를 입었다. 해리는 지니가 자신이 싫어하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면, 그리고 그 남자를 닮은 아기까지 낳는다면? 이란 생각을 안 해볼 수가 없었다. 사실 스네이프의 기억을 알게 된 날부터 그런 생각을 해봤었다. 처음엔 엄청나게 화가 났고 분하고 억울해서, 해리는 주먹을 쥐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어째선지...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해리의 머릿속은 약간 멍해졌다.


“포터, 이만 가지.”


멍하게 서있느라 스네이프가 다가온 줄도 몰랐다. 어리벙벙한 해리가 겨우 정신을 차려 스네이프를 바라보니, 그의 눈가가 빨갛게 짓물러있었다. 까맣고 하얗기만 한 스네이프에게 빨간 눈가... 울었구나, 해리는 반 박자 느리게 그것을 깨달았다. 정신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그 깨달음 역시 자신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닌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해리는 자신의 이런 이상한 상태를 스네이프가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스네이프 역시 지금 릴리의 무덤 앞에서 정신적으로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왜지? 왜일까...? 어째서 사랑하는 연인인 지니가 다른 남자와 아기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상상을 했는데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을까. 해리는 믿을 수 없었지만, 이렇게 의혹을 가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해리가 지내는 방의 책상서랍에는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준비한 반지가 여전히 들어있었다. 그 반지를 준비한 일이 불과 몇 달 지나지도 않았다.


해리는 이만 인정해야 했다. 더 이상 지니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마음이 식었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 없이 어떻게 살아가든 아무렇지 않았다. 그 몇 달, 고작 몇 달을 보지 않고 지냈다 해서 결혼까지 생각한 연인을 이렇게 쉽게 잊을 수 있었다. 해리는 마음이 차갑게 얼어가는 걸 느꼈다. 지니에 대한 사랑 대신에 미안함과 연민이 빈 마음에 가득 찼다. 이 과거에서의 1년을 채우면, 해리에겐 1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지만 지니에겐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해리가 1년을 채워 미래로 돌아가면, 지니는 하루 만에 애정이 식은 남자친구를 만나게 될 것이었다.


“포터...?”


스네이프는 자신의 부름에도 굳어 서있는 해리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감정이 좀 정리가 되자, 스네이프도 서서히 해리의 상태를 인식할 수 있었다. 해리는 멍해보였다가, 지금은 아주 차가워보였다. 무슨 저주에라도 걸린 것처럼 보여서 스네이프는 다급하게 해리의 어깨를 잡아챘다.


“포터!!!”


고함소리에 해리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초록색 눈이 보였다.


“교...교수님.”

“왜 그러나, 포터? 뭔가, 주변에 무엇이라도...”

“아, 그게...”


해리는 자신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보다도 바로 눈앞의,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보이는 스네이프의 얼굴에 당황스러워졌다. 그리고 그게 스네이프가 자신을 걱정하는 얼굴이라는 걸 깨닫자, 텅 비고 차갑게 식었다고 생각한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이 마음은......


해리는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크게 떴다. 부릅뜬 눈이 자신을 걱정하는 스네이프의 얼굴을 여과 없이 투영했다. 해리는 자신의 어깨를 쥐고 있는 스네이프의 손바닥이 너무 뜨겁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건 자신이 그 접촉에 너무나 많은 신경을 쏟고 있어 감각이 예민해진 탓이었다. 스네이프의 얼굴과 손바닥과 아주 가까워서 느껴지는 숨길과... 해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스네이프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마음은 계속 그를 보고 있고 싶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해리는 자신이 스스로의 마음까지 속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정하는 게 빨랐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말 이 마음은, 이것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해리는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터?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어떤 순간에? 왜 하필 그를?


그리고 해리는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은 감정을 자각하자마자 이미 차여버렸단 것을. 릴리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보다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사랑한다. 해리는 방금까지 릴리의 묘 앞에서 눈물짓던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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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만에 본인 맘을 깨달은 해리찡..

빨리 불타는 로맨스를 해라 해리스네.. <-이 사람이 세계제일 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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