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당연한 거겠지만, 몇 시간이 지났으니 비에 젖어 축축했던 해리의 옷도 완전히 말랐다. 그래서 해리는 더욱 자신이 살던 미래와 멀어진 기분이었다. 그 시간만큼 굶주린 배도 너무 고팠다. 몰리아줌마의 따듯한 호박수프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1년은 그들과 떨어져 살아야한다. 스네이프 한 명을 살린 대가가 이렇게 클 줄이야. 심지어 1년간 지니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주머니엔 아직도 프러포즈를 위해 준비한 반지케이스가 들어있는데...! 그러나 해리가 옆에서 머리를 싸매며 괴로워하든 말든, 스네이프는 영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럼, 1년간 잘 숨어 지내도록 해라.”


해리는 허둥지둥 머리를 싸맨 양 팔을 풀었다. 스네이프가 일어섰다. 큰 키 때문에 해리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어이가 없어, 넋이 나가 입을 떡 벌린 채 해리가 스네이프를 올려다보았다. 스네이프는 그런 해리를 한심스럽게 내려다봤다. 해리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지금 교수님 혼자 가신다고요?!”

“그럼? 너와 내가 같이 살기라도 해야 한단 말이냐?”


윽, 그렇게 물어오면...! 해리 또한 저도 물론 싫다구요! 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니,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앞으로의 고생을 견뎌야 하는데! 홀랑 자신을 두고 떠나가겠다니, 세베루스 스네이프란 사람이 아무리 매정해도 이렇게 매정할 수는 없었다. 나 몰라라 서로의 길을 가자고? 물론, 해리도 그간의 서로 간 좋지 못한 감정을 기억했고, 스네이프 같이 대하기 까다로운 사람과 함께 산다면 여러모로 불편할 것은 알고 있었다. 스네이프 또한 그런 마음에서, 자신과 해리 모두를 위한 방향으로 말한 것일 테다. 하지만 이건 그 이전의 문제였다. 해리는 도저히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내가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는데 나 혼자 쓸쓸히 1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하는가? 게다가 모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 지내야만 했다. 해리는 도저히, 억울해서 그렇게는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를 입 밖으로 꺼냈다간, 스네이프 역시 당연스럽게 누가 날 살려달라고 부탁했냐고 되물을게 뻔했다. 그러면 해리는 또 할 말이 없어졌다. 완전히 꼬일 대로 꼬였다. 골치가 아팠다.


해리는 돌아서는 스네이프의 손목을 확 끌어 잡아챘다. 스네이프가 등을 보이자 얼굴부터 굳었다. 두 번이나 해리에게 손목이 잡힌 스네이프의 인상이 마구 구겨졌다. 스네이프가 뭐냐고 쏘아붙이기도 전에, 표정 없이 저를 뚫어보는 해리의 시선과 마주쳤다. 저, 저 망할 초록색 눈. 스네이프는 꼼짝없이 그 눈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바닥에 발이 붙었다.


“교수님은 뱀에게 물리셨어요. 피도 엄청나게 쏟았고, 분명히 지금 몸이 좋진 않을 겁니다.”

“네 재주로 상처 없이 나았다. 피가 부족한 건 음식을 먹으면 보충될 문제다, 포터.”

“저와 같이 살아요.”

“내가 왜 그래야하지? 너도 싫을 거 아니냐?”

“제가 싫고 말고는 교수님이 따질 필요 없으시잖아요. 제 감정인데.”

“뭐라고? 이 오만한... 이제 볼드모트를 죽인 진정한 영웅나리랍시며 이렇게 건방지게 구는 건가?”

“그래요! 전 볼드모트도 없앴고, 교수님의 목숨도 살렸어요! 그러니까 전 이렇게 요구해도 된다고요. 전 혼자서는 1년이나 숨어 못 살아요. 교수님이라도 함께 살아주셔야 해요.”

“하! 정말이지...너무 유치해서 못 들어주겠군...”


스네이프가 해리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해리의 말은 완전히 어린아이나 부릴법한 생떼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스네이프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해리는 오히려 웃음이 피식 나왔다. 해리가 웃음을 보이니 스네이프는 더욱 경악스러운 눈이었다. 1년 자란 사이 더더욱 싫은 인간이 되었구나, 포터. 레질리먼시를 쓰지 않았어도 해리에겐 그의 마음의 소리가 이렇게 들리는 것 같았다.


“포터, 네가 나와 같이 살자고 조르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군.”

“네, 저도요.”


얄미운 해리의 대답에 스네이프는 눈을 흘겨 해리를 보았다. 해리는 사실 스네이프와의 대화가 점점 더 재밌어지고 있었다. 이제 둘은 선생과 학생의 입장이 아니었고, 똑같은 어른 대 어른의 입장이었다. 그 기분이 해리는 무척이나 새로웠다. 스네이프와 대등해질 수 있다는 게 놀랍고 즐거웠다.


“그렇다면, 어디서 살지는 생각은 해봤나?”

“어...글쎄요. 그건 이제부터 함께 고민해봐야죠...?”

“이렇게 무계획해서야... 과연 제임스 포터의 아들이지, 아주 똑같아.”


스네이프의 언짢은 말투에 해리는 학생 때처럼 다시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모든 상황이 다 갑작스럽게 이뤄진 거였다. 해리는 자신이 과거로 돌아올 것도, 스네이프의 목숨을 구하게 될 것도, 1년을 모두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야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당연히 해리에겐 계획이 없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데도 익숙하게 스네이프에게 혼이 나니 말수가 부쩍 줄었다. 입이 딱 붙어버린 해리를 보며 스네이프는 혀를 끌끌 찼다.


이겨 먹으려들더니 꼴좋군, 해리포터. 해리는 속으로 스스로를 향해 빈정거렸다.


“...교수님은 저와 헤어져서 어디로 가시려고 했는데요?”


그래도 계속 말을 안 할 순 없었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질문에 한 쪽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곧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스피너즈 엔드.”

“..아.”


스네이프가 어릴 때 산 곳이었다. 그렇구나, 스네이프는 그곳에서 아직까지 지내고 있었다. 끔찍한 유년기의 기억이 있는 곳일 텐데... 해리는 스네이프의 과거를 봤기에 알았다. 그래서 자신처럼 스네이프 역시, 호그와트를 집처럼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돌아갈 집은 스피너즈 엔드에 있는 것이다. 자연스레 해리는 프리벳가 4번지가 떠올랐다. 아니, 거긴 돌아가선 안 된다. 그 곳으로 간다면 과거의 자신에게 들키지 않을 수도 없을뿐더러, 이제 영원히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 순간 해리는 깨달았다. 앞으로 둘이서 숨어 지낼 장소로 완벽한 세계가 있었다.


“머글계에서 살면 돼요. 그럼 마법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혀 들키지 않고, 둘이서도 살 수 있어요!”


스피너즈 엔드도 프리벳가 4번지도 모두 머글이 사는 세계에 속했다. 해리는 이토록 완벽한 은닉장소가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다는 데에 소름이 돋았다. 마법세계의 영웅인 해리포터도 머글들 사이에선 그저 동그란 안경을 쓰고, 이마엔 좀 별난 상처가 나있는 청년일 뿐이었다. 스네이프는 또, 그들에겐 중년남자치곤 별나게 머리를 좀 길렀고, 그 머리를 좀체 안 감는지 기름져 보인다고 생각할 남자일 것이다.


“머글계라... 뭐, 딱히 그곳이라 해서 마법사들이 아주 없진 않을 텐데, 포터. 영국에서 마법사만 사는 마을은 호그스미드가 유일하단 걸, 물론 위대하신 마법세계의 영웅 포터께서는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만.”


스네이프의 빈정거림에 해리는 잠시 움찔했다. 하긴, 머글계에 숨어 살고 있는 마법사들은 해리의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머글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잘 섞여든 마법사나 마녀들은, 반대로 해리포터는 아주 잘 알아볼 게 분명했다. 해리포터는 그들에게 유명해도 너무 유명했다. 오늘이야말로 볼드모트를 죽여 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사라지게 한,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되지 않았는가. 분명 자신의 이름은 <마법의 역사>에도 실릴 것이고, 어쩌면 피브렐 형제들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화 속 주인공이 될지도 몰랐다. 해리포터와 뭐 어쩌고 저쩌고 시리즈 같은, 영웅 해리포터의 학년별 연대기라든지... 해리는 스스로 그런 것들을 생각하자니 몹시 창피했다. 낯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스피너즈 엔드에는 교수님 말고 다른 마법사가 살고 있나요?”

“아니, 거긴 머글들조차도 살지 않지. 워낙 더럽고 추한 곳이니까.”

“잘됐네요, 그럼.”

“설마 포터, 내 집에서 신세지겠다고?”

“네. 안되나요?”

“거긴.. 거긴 나 혼자 살기에도...”


처음으로 스네이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해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스네이프를 보았다. 설마... 설마? 스네이프는 지금 뭔가를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해리는 추측했다. 작고 누추한 집을 자신에게 보여주기가 창피해서? 해리의 머릿속으로, 여성용의 우스꽝스런 블라우스를 가리기위해 터무니없이 큰 외투를 걸치고 있던 작고 깡마른 소년이 떠올렸다. 지금 해리에게 스네이프는 그 소년이 몸만 자란 것처럼 보였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엄마, 릴리에게도 한 번 자신의 집으로 놀러오라고 말을 한 적이 없을 것이었다. 너무나 창피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스네이프는 정말이지 불쌍하고 가엾은 소년이었다. 해리는 그리고 그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스네이프의 스피너즈 엔드의 그 집은, 해리에겐 프리벳가 4번지의 좁고 거미가 나오는 벽장이었다.


“그래도 제가 살던 벽장보다는 2인용에 가깝겠죠.”


스네이프는 움찔하더니 해리의 눈을 쳐다보았다. 해리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해리는 비틀거리다가 곰팡이가 슨 벽에 손바닥을 대고 엉거주춤히 섰다. 공복에 동반순간이동을 했더니 몹시 어지럽고 속이 역했다. 스네이프는 해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지팡이로 이곳저곳을 겨누며 청소를 시작했다. 그간 학교에서 지내느라 비운 틈에 집 꼴이 더 엉망이었다. 낡고 허름한 집은 마법의 힘으로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 같은 얼굴로 간신히 고개를 든 해리는, 그제야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조그맣고 낡고 허름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게 맞나 싶은 공간이었다. 페투니아 이모가 봤다면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거라고 해리는 생각했다.


벽은 오래된 가죽이 씌워진 책들로 가득했다. 천장에는 양초 등잔이 달려있었는데, 지금은 낮이어서 쓸 필요가 없었지만, 사실 밤에도 그다지 쓸모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등잔 아래엔 아주 낡은 소파와 오래돼 보이는 안락의자, 어떻게 서있는지가 의심스러운 탁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스네이프는 그 낡은 소파에 앉아서 해리를 노려보며 다리를 꼬고 있었다. 흡사 지하 감옥 같은 이 집의 간수장 같았다. 스네이프는 막상 해리를 이 집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자신이 내린 판단이 몹시 못마땅하고 후회되는 것 같았다. 해리는 스네이프에게서 지금 당장 꺼지란 말이 날아올까 봐, 냉큼 안락의자에 가 앉았다.


“집이 좋네요.”

“입에 침은 발랐나, 포터?”


해리는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 혀가 아랫입술을 축였다.


“어...부엌에 먹을 게 좀 있을까요? 한 번 살펴보고 올게요.”


스네이프가 어이가 없는 듯 해리를 쳐다보았다. 해리 스스로도 헛수고일거란 생각은 했다. 주인이 오랫동안 비운 집에 별 기대는 없었지만, 스네이프와 마주하는 것이 꺼려진 것이니, 뭐. 물론 스네이프도 해리의 머릿속을 레질리먼시 없이도 훤히 꿰뚫어본 것 같았다.


부엌은 낡고 컴컴했지만 더럽진 않았다. 이 집은 전체적으로 색채가 바래 흐렸다. 그래서 낮임에도 다소 어두웠다. 부엌에는 조리도구도 많이 없었다. 이 빠진 머그컵이 세 개, 그릇 몇 개, 냄비 두 개, 주전자 하나... 주전자 옆에는 찻봉지가 하나 놓여있었다. 겉포장에는 먼지가 앉아있었지만 그럭저럭 먹을만해보였다.


해리는 수돗물을 틀어(물이 안 나오지 않을까 걱정스러워하며) 주전자에 물을 받았다. 잔을 달그락 소릴 내며 꺼내고, 물을 끓이는 소리가 부엌에서 들리자 조금은 사람 사는 집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예상한 것처럼 찻봉지 외엔 전혀 수확이 없는 부엌이었다. 해리는 김이 나는 컵 두 개를 들고 응접실로 돌아왔다. 따듯한 걸 들이키니 속이 조금 낫는 것 같았다.


“장을 봐야할 것 같아요. 우선...밥부터 식당에서 먹고.”

“머글 돈은 없겠지, 물론.”

“아... 돈, 맞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머글 식당에서 밥을 먹어본 적이 도대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두들리 가족과 함께 살 때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해리는 사실 태어나서 머글 돈 자체를 손에 쥐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린고트 금고에 잔뜩 쌓인 금화를 봤을 당시 기분이 어땠던가? 열한 살짜리 소년은 자신이 이렇게나 많은 돈을 가졌단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해리가 가지고 싶은 건 항상 두들리가 가지고 있었고 해리는 그저 손가락만 빨았다. 두들리의 장난감 한 개라도 마음 놓고 갖고 놀아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런 해리에게 머글 돈이라니,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린고트에 있는 마법사 돈조차 마음대로 가져올 수 없었다. 호크룩스를 찾는 중에도 몇 개월을 숨어 다녔는데, 또다시 숨어 지내야하다니. 이번엔 1년이었고, 해리는 당장 살 길이 막막했다.


“...내게 머글 돈이 조금 있다.”


해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스네이프의 입에서 ‘머글 돈’이란 단어가 나오는 것조차도 낯설었다. 그런데 스네이프가 그걸 갖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교수님에게요?! 머글 돈이...?!”

“...아버지란 작자가 사고로 죽었을 때, 남은 가족 앞으로 약간의 돈이 나왔다. 하지만 내가 그 더러운 작자가 남긴 걸 쓸 리가 있겠나? 그대로 한 푼도 쓰지 않았지.”

“와, 세상에... 진짜 기대도 안 했어요. 이대로 굶어 죽나 싶었는데...”

“흥, 포터, 머글 돈 없는 정도로 굶어 죽는다면, 자네가 마법사라고 할 수나 있는지 의문이군.”


스네이프는 심술궂게 툴툴댔지만 해리에겐 기적 같은 말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것만 같았는데! 스네이프만 아니었다면 얼싸안고 제자리에서 몇 바퀴 돌았을 것이다. 해리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물었다.


“그 돈은 어디 있나요? 머글들의 은행에?”

“내가 머글 은행에 계좌가 있겠나, 포터? 생각 좀 하고 말하길 바라는 건 자네에겐 너무 큰 기대인가?”

“윽.. 물을 수도 있잖아요! 머글 돈이니까!”


해리가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쳤다. 스네이프는 해리가 그러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해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스네이프는 지팡이 끝을 바닥의 구석으로 겨눴다. 그는 유연한 동작으로 손목을 위로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바닥에서 작은 직사각형 모양 뚜껑이 딱 소릴 내며 열렸다. 아씨오, 머글 돈. 스네이프의 낮은 부름에, 뚜껑 아래 있던 돈 꾸러미가 둥둥 허공을 떠왔다. 꾸러미는 낡은 탁자 위에 놓였다.


“나는 머글 돈은 잘 모른다. 네가 알아서 쓸 만큼 꺼내라, 포터.”


해리는 이미 꾸러미를 풀고 있었다. 오랫동안 묵혀 있던 옛날 지폐들이었지만, 아직 사용은 할 수 있었다. 해리는 며칠간 생활비와 2인의 식사비 정도를 가늠해 챙기고, 다시 꾸러미를 묶었다. 스네이프는 그걸 다시 바닥에 넣어놓았다.


“그럼, 나가기 전에 좀 씻고 갈아입죠. 교수님, 핏자국도 묻어 계시고...”

“포터 너에게 빌려줄 옷은 없다.”

“...알겠어요. 교수님만 갈아입고요.”


하여튼 저 비뚤어진 인간... 해리는 생활비에 자신의 옷 몇 벌도 포함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머글들에게 마법사망토는 어색하니 망토는 벗어 안락의자에 걸쳐두었다. 스네이프는 욕실로 들어갔고, 해리는 남은 차를 후루룩 들이켰다.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스네이프의 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피를 씻고 있는 스네이프를 기다리고 있는 게?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해리는 생각했다.



스네이프는 까만 셔츠와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평소 단추가 엄청나게 많은 스네이프의 신부복 같은 옷에 익숙했던 해리에겐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머리는 감았는지 기름지지 않고 약간 부스스했다. 전체적으로 늘 보던 스네이프의 모습은 아니었다.


해리는 생각보다 더 그를 오랫동안 멍하게 쳐다본 모양이었다. 스네이프의 눈이 가늘어지며 해리를 싸늘하게 보았다. 해리는 그 시선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혈색이 안 비치는 흰 피부에 까만 머리, 까만 옷을 입으니 스네이프는 더더욱 하얗게 질려보였다. 바지폭이 좁아서 마른 몸은 더 드러났다. 아, 어쩐지 교수님인데도 교수님 같지가 않네. 옷차림만 바뀌었을 뿐인데 좀 더 젊어 보이기도 했다. 해리는 정신을 차렸지만 간간히 옆을 흘낏거렸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시선을 무시하기로 했는지 앞서 문을 열고 나갔다. 성큼성큼 앞서나가서, 해리는 후다닥 그의 뒤를 쫓아나갔다.


밖으로 나와 보니 스피너즈 엔드는 온통 똑같이 생긴 벽돌집들이 가득한 동네였다. 판자를 덧댄 깨진 창과 흙먼지에 뒹구는 쓰레기들.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 스네이프의 집은 그 동네에서도 가장 구석이었다. 어느덧 스네이프의 옆까지 따라붙은 해리는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슬쩍 뒤쪽을 본 시선엔 폐공장의 굴뚝이 손가락처럼 우뚝 서있었다.


“진짜 여긴 아무도 안 사나보네요, 교수님.”

“살고 싶은 동네여야 말이지. 공장이 멈춘 후론 다 떠나갔다 보면 되겠지.”

“지금 우린 옆 동네로 가고 있나요?”

“그래. 그러니 마법을 쓸 생각은 하지마라.”

“어머니가 자란 집도 있겠네요, 그럼.”

“......”


스네이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에게 릴리의 아들과 릴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해리는 자신의 엄마를 알고 있는 사람과 같이 엄마에 대한 대화를 하고 싶었다. 자신은 릴리의 뱃속에서 나왔지만, 공유하는 추억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남자는 릴리의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다. 엄마의 ‘친구’였다. 릴리로선 의절했고, 스네이프로선 아직 짝사랑을 하고 있는 기묘한 관계였긴 하지만 말이었다.


해리는 사실 스네이프는 사랑이라곤 모르는 냉혈한으로만 알았다. 해리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시리우스조차도 몰랐을지도. 물론 자신의 아버지 제임스포터는 잘 알았을 것이다. 해리는 그가 자신의 아버지고, 제임스가 릴리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자신도 태어나지 않았을 테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여자의 오랜 친구를 그렇게 괴롭힌 아버지의 모습은 영 불편하게 느껴졌다. 괴롭힘의 이유가 스네이프가 어둠의 마법에 빠져서라고 다들 말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스네이프가 릴리를 좋아했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어리고 외롭고 못난 스네이프는, 괴롭히기엔 아주 좋은 사냥감의 모습이었다. 해리는 두들리 패거리의 사냥감이었기 때문에 그걸 너무 잘 알았다.


스네이프는 여전히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면서, 평생을 사랑으로 살고 있었다. 물론 그건 집착이나 탐욕으로도 보였다. 하지만 해리는 그럼에도 스네이프를 나쁘게 볼 수 없었다. 해리는 이제 스네이프를 나쁘게 보고 싶지도 않았고,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말 단순한 이유였다. 또 자신은 그렇게 오랫동안 한 사람만을 사랑해본 적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해리는 가끔씩 스네이프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둑으로 나오자 여기와는 색채부터 다른 마을이 보였다. 해리는 어머니가 자란 동네라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드릭 골짜기에 갔을 때와는 닮은 듯 다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스네이프와 함께 라는 사실이 달랐다.


“여기 들어갈까요?”


스네이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거리와는 다른 현대적인 머글 거리, 쇼윈도에 두 명의 키 큰 마법사가 비쳤다. 민트색 지붕의 식당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해리는 너무도 머글적인 거리에서 스네이프와 함께 걷는 것도, 식당을 들어가는 것도 낯설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그 기분은 상당히 좋았다.


밝은 우드테이블에 앉은 그들에게 종업원이 다가와 물과 컵을 내려놓았다. 스네이프는 메뉴판을 받았고, 해리가 컵에 물을 채워 스네이프의 앞에 놓았다. 이렇게 머글로 가득한 곳에 들어오니 스네이프의 차림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머글과 섞이는가싶어, 새삼 해리는 놀라웠다. 스네이프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삐뚜름히 메뉴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뿐이군. 스네이프는 짧게 감상을 던졌다. 이내 메뉴판은 해리의 손에 들렸다. 적당히 네가 골라라. 해리는 메뉴를 살펴보며 여기가 이탈리아식당인 걸 알았다. 해리가 종업원을 불러 점심세트를 부탁했다.


날씨가 아주 좋았다. 칙칙한 집 안에만 있다가 나와서인지 온 사방이 유달리 밝았다. 해리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미 자신이 볼드모트를 죽이고도 남을 시각이었다. 한창 마법세계는 축제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해리는 그런 순간에 자신이 적당히 번잡하고 한가로운 머글 거리에서, 스네이프와 파스타와 피자, 콜라를 기다리고 있는 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실감했다. 해리는 또 다시 즐거워졌다. 과거의 자신은 지금 한창 여기저기에 쓸려 다니고 있겠지만, 지금은 이런 여유를 느끼고 있었다.


“...믿기지 않군.”


스네이프가 말했다. 해리는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건채로 스네이프를 쳐다보았다.


“뭐가요?”

“지금 포터, 너 말이다.”

“제가 뭘요?”

“아까부터 실실 웃고 있잖나. 내 앞에 있으면서. 그런 건 처음 본다고.”

“아아.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걸요.”


해리는 가볍지만 진심으로 대답했다. 스네이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하지만 스네이프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콜라와 피자를 가져온 종업원에 말문이 막혔다. 이제 스네이프는 동그랗고 노란, 이 해괴한 음식은 대체 뭐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리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피자란 거예요. 자, 그릇에 한 조각 덜어드릴게요.”


갓 구운 피자에서 치즈가 쭉 늘어나 그릇에 지저분하게 담겼다. 스네이프는 입을 꾹 다물고, 절대로 저걸 입 안에 넣지 않을 것이란 기색을 완고히 풍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리는 오랜만에 먹어보는 피자를 얼른 입에 넣었다. 이렇게 갓 나온 따끈한 피자는 해리도 처음이었다. 해리는 보통 두들리가 몇 판을 먹어 배가 불러 도저히 건드리지 못할 즘, 식은 피자 한 조각 정도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배고팠던 해리에게 갓 나온 피자의 맛은 천국 같았다. 볼드모트를 죽인 보상을 이렇게 받는구나 싶을 정도로 감격스러운 맛이었다. 스네이프는 독약을 보듯이 탄산이 올라오는 검은 물(콜라)을 살피고 있었다.


“피자 안 드세요?”

“못 먹겠다. 그리고 이건 실패한 마법 약 색깔 같은데...”

“엄청 맛있는데. 그 콜라도 보지만 말고 드셔보세요.”

“코... 콜, 뭐?”

“‘콜라’요. 색은 저래도 먹고 안 죽어요. 머글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료인걸요.”

“머글들은 이래서 정말 이해할 수 없군...”


딱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해리는 마법 약 시간에 제가 만든 마법 약을 스네이프가 반드시 먹어야만 한다면 저런 표정을 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스네이프가 콜라를 들어 한 모금을 홀짝였다. 그리고 생각과는 너무도 다른 단맛이 혀에 닿자 어깨를 움찔 튀었다. 해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피자를 한 조각 또 집었다. 마침 토마토파스타가 와서 스네이프와 해리의 앞에 놓였다.


스네이프는 이제 콜라의 맛에 완전히 탄복한 것 같았다. 혀와 식도를 톡톡 쏘는 이건 마법없이 어떻게 한 거냐고 물으면서도, 스네이프의 컵에서 콜라가 반 이상 사라졌다. 그가 처음 콜라 맛을 본 4살짜리 꼬마 같아 해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건 탄산이 들어서 그래요. 맛있어요?”

“..음.”

“그쵸? 머글들이 일반적으로 잘 먹는 걸로 주문했으니까 교수님도 의심 풀고 이제 드세요.”


해리는 콜라를 마시면서, 피자를 베어 물려다 치즈가 늘어나는 걸 감당하지 못하는 스네이프를 바라보는 기분이 꽤 괜찮다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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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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