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건 어떠세요? 교수님.”
“어떻긴 뭐가 어떻단 거냐, 포터.”
해리는 제 옷을 사야겠다며 들른 옷가게에서 스네이프의 몸에 연신 옷을 대고 있었다. 집는 옷마다 해리가 입기엔 점잖은 느낌이었다. 해리는 자신보다 스네이프의 옷을 고르는 데 더욱 열중하고 있었다. 스네이프는 귀찮단 얼굴로 손을 휘적거렸다. 네 옷을 골라라, 포터. 그렇게 말하는데도 해리는 듣질 않았다. 스네이프의 색다른 머글 차림이 신선한 충격이긴 했다. 하지만 그의 옷이 온통 까만색뿐이어서, 해리는 그에게 좀 다른 걸 입혀보고 싶었다. 분명 스네이프는 매부리코긴 해도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본인이 관리하려는 의지를 전혀 가지지 않았을 뿐이다. 해리는 오늘 그 신선한 충격을 깨달은 김에 좀 더 밀어붙여보고 싶었다. 스네이프를 꾸미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옷가게의 많고 깔끔한 옷들이 해리의 그 충동을 부추겼다. 스네이프는 짜증난 기색이었다.
“손님, 이 옷은 어떠세요?”
해리에게 뭐라고 짜증을 뱉으려던 스네이프는, 어느새 가게의 점원까지 다가와 옷을 보여주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해리는 와! 그거 아주 멋진데요! 라고 말하며 스네이프의 속을 긁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스네이프가 정중히 거절하려는 찰나, 해리보다 옷을 팔려는 염원이 강렬한 점원이 한 번 입어보기를 추천했다. 스네이프는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정말로 의아했다. 분명 포터의 옷을 사려고 들어왔는데, 왜 내가...... 이가 갈렸지만 낚아채듯 옷을 건네받았다. 탈의실로 들어가다 스네이프가 뒤돌아 해리를 노려보았다. 해리는 싱글싱글 웃으며 한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하하! 해리는 이렇게 즐거워도 되는 걸까 싶을 만큼, 즐거웠다.
해리가 옷들을 뒤적이며 제 옷을 골라보는 사이, 탈의실 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해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차림의 스네이프가 서있었다. 점원이 다가와서 핏을 확인하고 있었다. 해리가 보기엔 확인할 것도 없어보였다.
“너무 잘 어울리는데요, 교수님?”
“여기가 학교였다면...”
기숙사점수를 깎았을 테죠, 네. 해리는 싱긋 웃어보였다. 스네이프는 뚱한 얼굴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점원이 추천한 베이지색 얇은 니트는 스네이프의 까만 머리에 잘 어울렸다. 하얀 옷을 입은 스네이프는 처음 보았다. 이런 느낌이구나. 해리는 생각하면서 그의 옆에 다가가 섰다. 스네이프의 하얗고 마른 손가락이 어색한 듯 V자의 목 라인을 만지작거렸다. 스네이프 역시 성인이 된 후론 하얀 옷을 입은 적이 없어서 제 모습이 낯설었다. 이상한 느낌에 뒷목이 간질거렸다.
“그거, 사셨으면 좋겠어요.”
해리는 거울 속에 스네이프와 자신이 나란히 비치는 걸 보며 말했다. 거울 속의 스네이프가 해리의 옆모습을 돌아보았다. 해리는 그럼, 저도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하며 손에 든 옷을 들어보였다. 학생 같은 초록색 후드티셔츠였다. 초록색... 스네이프는 해리의 그것에 약했다. 그래서 해리가 한 말에 휘둘리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살 생각도 없었던 옷을 사게 될 리가 없었다.
해리는 초록색 후드티말고도 체크무늬셔츠와 청바지를 샀다. 스네이프의 니트까지 지출이 꽤 컸지만, 별로 후회는 되지 않았다. 먹을 걸 아껴서 좋은 모습 봤다 치지 뭐. 텍을 뗀 하얀 니트를 입은 채 스네이프가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론이나 헤르미온느가 지금 이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둘은 근처에 보이던 대형마트로 들어왔다. 카트를 끌고, 자동문을 들어서는데 스네이프는 몹시 놀란 눈치였다. 일단 마법 없이 문이 자동으로 열리기도 했고, 안에 머글들도 너무 많았다. 아니면 마트의 내부가 엄청나게 환해서, 호그와트의 어두운 지하 감옥이 익숙한 스네이프에겐 굉장한 부담이 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딱히 스네이프가 자신의 놀람을 티내고 싶지 않아보여서, 해리는 슬그머니 모른 척 해주었다.
“교수님, 요리는 하세요? 사실 전 별로 안 해봤거든요. 페투니아 이모가 시켜서, 아침에 먹을 간단한 것 정도는 하지만.”
양파를 담으면서 해리가 물었다. 스네이프는 혼자 살아서 몇 개 정돈 할 줄 안다고 대답했다. 스네이프는 근처에서 토마토와 호박, 계란 등도 찾아 카트에 담았다. 이제 머글식 쇼핑에 적응된 스네이프는 카트를 끌고 정육코너에서 소고기와 돼지고기도 샀다. 해리는 근처에서 베이컨을 집어서 카트에 담았다.
주류와 음료는 같은 코너에 몰려있었다. 해리는 그냥 지나치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스네이프의 팔목을 붙잡고 이끌었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해 뭐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해리는 개의치 않고 음료코너를 두리번거리다가 곧 콜라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스네이프도 익숙한 까만 물을 보더니 몸을 멈칫했다. 그리고 해리가 콜라 1.5L를 카트에 담는 걸 군소리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해리에게 너 마실 것은 안사냐며 스네이프치곤 매우 친절하게 물어주었다. 해리는 음료수는 생각이 없었지만, 가끔 스네이프와 술을 기울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리가 와인을 고르자 성인이라는 거냐, 포터? 하며 스네이프가 비웃었다. 비웃든 말든, 포터는 성인이 맞았기 때문에 발끈하지 않았다. 사실 해리로선 대단한 발전이었다. 다혈질인데다, 상대는 ‘그’ 스네이프이기까지 했는데. 해리는 정말로 자신이 어른스러웠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피곤하진 않으세요?”
새벽에 그 난리가 있었는데 둘 다 여태 잠도 자지 못했다. 마트 한편에 마련된 휴게실에 앉아 해리가 물었다. 피도 많이 흘린 사람을 데리고 조금 무리한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아, 약국에서 철분제 사올게요.”
“전직 마법 약 교수에게 머글 약이라니...”
스네이프가 재밌단 듯이 중얼거렸다. 해리는 생각도 못했던 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뭐, 머글 약도 효과 괜찮아요. 그리고 과목도 변경하셨잖아요.”
“그래, 변경한 사이 넌 내 교과서로 우등생이 되어있더군.”
“아...”
이거야말로 더더욱 생각도 못했던 말이었다. 해리는 혼혈왕자─스네이프─의 교과서를 신줏단지 모시듯 했던 제 과거가 생각났다. 덤블도어를 죽인 스네이프에 대한 분노로 이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굉장히 유용했어요. 글씨가 깨알 같아 해석하는 게 좀 힘들긴 했지만, 재밌어서, 열심히 코를 박고 해석했죠.”
“흥, 그렇게 내 실력을 훔쳐 그레인져까지 누르고 말이다.”
“안 그래도 그래서 헤르미온느가 교수님의 교과서를 상당히 안 좋아했어요. 제가 혼혈왕자 덕택에 그녀를 이겨서 말이죠. 완전히 리들의 일기장 같은 취급이었다니까요.”
“뭐, 알고 보니 별 다를 것 없는 인물 아니었나.”
“네에? 교수님, 지금 리들이랑 교수님을 비교하시는 거예요?”
해리는 진심으로 뜨악해서 물었다. 하지만 스네이프가 더 어이가 없는 눈치였다. 해리가 자신을 좋게 보는 것이 너무 어색했다. 물론 비교대상이 볼드모트라곤 해도, 지금까지 해리가 볼드모트와 스네이프를 등급을 매겨서 어느 쪽이 더 끔찍하다 여겼을 리가 없었다. 둘 다 똑같이 끔찍하고 싫었겠지. 그건 스네이프도 알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그랬다. 볼드모트도, 제임스 포터도 등급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싫었다. 그런 포터를 빼다 박은 아들 해리 역시, 싫었다.
싫었지만, 해리가 가진 초록색 눈은 바라보고 싶은 충동이 항상 있었다.
“철분제 사올게요. 여기 계세요.”
해리가 일어서서 약국 쪽으로 걸어갔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유리창 밖의 플라타너스 나무에 두었다. 창에 희미하게 하얀 니트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살아있다.’ 지금 이 순간, 왜 그렇게 그 사실이 와 닿았을까.
장을 본 게 가득 든 묵직한 상자를 들고 스피너즈 엔드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해리는 계속 끙끙거리다가, 인적이 드물어지자 마법을 써서 상자를 공중에 띄웠다. 스네이프는 쯧, 새파랗게 젊은 놈이, 라며 빈정거렸다. 해리는 왜 이럴 때는 마법사식 방법을 썼는데도 욕을 먹어야할까 진심으로 억울했다. 물론, 스네이프는 해리의 모든 걸 트집 잡고 싶을 뿐이겠지. 하지만 다시 끙끙대며 상자를 들고 갈 오기를 부리기엔 해리는 너무 졸리고 피곤했다. 반면에 철분제의 효과가 좋았던지, 스네이프의 허연 얼굴에는 약간의 혈색이 돌았다. 옷도 밝게 입고, 머리카락도 찰랑거리고. 새벽에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해리는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집에 도착하자 스네이프는 냉장마법이 걸린 일종의 냉장고에(머글들 것과 다른 점은, 문을 열기 전까진 이 안이 얼마나 넓은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란 것이었다.) 차곡차곡 장본 것을 넣었다. 해리는 제가 할 생각이었지만, 스네이프가 가볍게 지팡이를 휘두르자 식품들이 알아서 착착 들어가는 것을 보곤 딱히 도울 필요가 없음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욕실로 들어가 대충 씻고 나왔다. 자꾸 눈꺼풀이 감겼다. 스네이프는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건 요리책이었지만, 해리는 너무 졸려서 그에 맞는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교수님, 저는 어디서 자, 자-면 좋을까요? 하품이 나오는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해리가 물었다.
“예전에 웜테일이 쓰던 방이 있다. 거길 쓰면 될 거다.”
“웜테일? 그가 여기 있었다고요?”
해리는 순간 졸음이 달아난 눈으로 스네이프를 쳐다보았다.
“볼드모트가 날 도우라고 놔둔 거였다. 뭐, 집 청소 같은 걸 했지. 그러다 말포이 저택으로 불려갔고.”
“저도 그 때 봤어요... 음, 뭐, 죽는 모습도...”
“설마 동정하진 않겠지.”
“그럴 리가요! 그는 배신자예요... 그 자가 불지만 않았으면 절대로 저희 엄마와 아빠는......”
해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부모의 죽음에는 눈앞에 있는 남자도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리와 스네이프는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여서, 아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백 번 나을 것 같았다. 스네이프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지만, 해리는 그가 정말로 담담해하는 게 아닌 걸 알았다.
“교수님을 원망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음, 예언은 저 말고도 다른, 네빌도 가리키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볼드모트가 저를 선택한 거죠... 교수님이 볼드모트에게 예언을 가르쳐줬지만, 그건, 제가 아닐 수도 있었어요.”
“네가 날 변호할 필요는 없다. 난 릴리를 죽게 만들었어.”
스네이프는 견고한 성 같던 표정을 결국엔 무너뜨렸다. 성은 모래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버석하게 얼굴을 쓸어내리는 스네이프는 무척이나 괴로워보였다. 해리의 뒷목으로 모래의 까끌함이 느껴졌다.
“예언이잖아요. 어떻게든 이뤄질 일이었어요.”
해리는 스네이프를 두고 침실로 가는 게 맞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 끝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 스네이프는 소파에 몸을 누이는 해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날 동정하는 건가?”
“그냥 이러고 싶을 뿐이에요. 잠깐만 자고 일어날게요.”
해리는 더 이상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눈과 입을 닫아버렸다. 스네이프는 한동안 그런 해리의 동그란 뒤통수만 내려다봤다. 어느 샌가 작은 응접실에 색, 색 하는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스네이프는 어쩌다 이 덩치만 커다란 애송일 떠맡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조용한 공간, 타인의 숨소리. 스네이프는 다시 요리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해리가 눈을 뜬 건, 코로 음식의 냄새가 흘러들어 와서였다. 순간 버로우에 있는 것처럼 익숙하고 따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곧 몰리아줌마의 호박수프가 아닌 걸 깨달았다. 해리는 꿈결을 더듬다가, 서서히 잠에서 벗어났다. 깜박, 깜박 눈꺼풀을 움직이니 무수히 많은 책이 꽂힌 책장이 보였다. 그걸 보니 절대 여기가 버로우는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좀 더 무겁고, 답답하고, 차분한 곳이었다. 스네이프의 집. 해리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상체를 든 해리가 부엌 쪽을 보았다. 스네이프가 냄비를 국자로 젓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마법 약 시간에도 볼 수 있던 모습이었다. 해리는 어쩐지 그리웠다. 무섭고 싫었던 마법 약 교수가 그리운 건 아닐 것이다. 그냥, 해리는 이젠 아득한 과거 같은 그 모습이 그리웠다. 해리는 더 이상 호그와트의 학생이 아니었고, 스네이프도 호그와트의 교수가 아니었다. 그가 다시 복직한다고 해도 해리는 그의 수업을 들을 수 없었다. 해리는 눈물이 맺힌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미래에서 왔지만, 이렇게 과거를 선명하게 느끼는 일은 처음이었다.
해리가 스네이프의 곁으로 다가가자, 눈치 채고 있었던지 스네이프는 후추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해리는 얌전히 그의 손에 후추 통을 얹어주었다. 프라이팬엔 소고기 스테이크가 두 개 지글지글 굽혀지고, 옆의 냄비에 담긴 양파수프엔 소고기가 조각조각 들어있었다. 무심하게 툭툭 수프에 후추를 뿌린 스네이프는, 국자로 떠서 맛을 보았다. 부엌에 가득 찬 따듯한 냄새가 미칠 듯이 좋았다. 해리는 방금 자고 일어났으면서도 얼른 먹어보고 싶었다. 실력 좋은 마법 약 교수는 음식도 계량대로(혼혈왕자이니 더 좋은 방법도 개발했을 것이다.) 잘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그릇이랑 수저나 갖다 놓지, 포터. 물론, 머글식으로.”
“앗, 네, 넵.”
머글식이라고 해봐야 딱히 힘든 일도 아니었다. 조금 귀찮을 뿐. 해리는 수저통을 뒤져 숟가락과 칼, 포크를 두개씩 챙겼다. 낮에 끓여놨던 주전자의 물도 컵에 따라 식탁에 올렸다. 스네이프는 다 구워진 스테이크가 든 프라이팬을 들고 다가왔다. 스네이프가 집게로 그릇마다 고기를 올리는 사이, 해리는 양파수프를 떠서 가져왔다. 그렇게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해리는 마트에서 산 와인이 생각났다. 찬장에서 와인 잔을 꺼내고 와인 병을 들고 쪼르르 오는 해리를 보며 스네이프는 콧방귀를 끼긴 했지만, 말리진 않았다.
“교수님.”
마개를 딴 와인을 들고 해리가 웃었다. 스네이프는 잔의 가느다란 다리를 쥐고 들었다. 해리는 조심스럽게 그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른 뒤, 스네이프의 앞으로 잔을 들어올렸다. 무심하게 해리를 본 스네이프가 가볍게 잔을 맞부딪혔다.
“동거 첫 날을 기념하며. 이제 앞으로 364일 남았네요.”
“끔찍하니까 카운트는 그만 둬라.”
“네.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큭큭 웃으며 해리가 한 모금 들이켰다. 으와, 이거 쓰네요! 해리의 감상에 스네이프는 와인 처음 마셔보냐며 타박을 주었다. 해리는 거의 처음인 건 맞았지만, 그렇다고 솔직히 긍정하긴 싫었다. ‘와인도 처음 마셔보는 어린애’ 취급이 기분 나빠서였다. 물론 그런 태도가 더 어린애답다는 걸 해리는 어려서 몰랐다.
“와, 수프 진짜 맛있어요. 몰리아줌마 호박수프가 최곤 줄 알았는데...”
양파 수프를 맛보고 해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냄새만으로 합격점이긴 했지만 혀로 닿는 맛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
“마법 약이 아니라 마법의 요리 수업이었으면 전 교수님을 엄청나게 존경했을지도...”
“헛소리.”
“하하! 하지만 진짜 맛있는 걸요. 저 말고 교수님 음식을 다른 누가 먹어봤나요?”
“글쎄. 요리 자체를 잘 안 하고 혼자 있을 때만 하니까, 없을 거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데... 혼자 드시면 아깝지 않았어요? 칭찬도 못 듣잖아요.”
“칭찬을 바라며 요리를 하는 게 아니라 먹으려고 만든 거니까, 전혀 아깝지 않다, 포터.”
“앞으론 제가 매일매일 맛있다고 해드릴게요!”
“요리를 아주 다 나에게 떠넘기려는 발언 같군, 포터. 난 네 식모가 아니다.”
칭찬을 칭찬으로 듣지 못하시긴. 숟가락을 입에 물고 해리가 비죽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천진한 어린 아이 같던지. 스네이프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초록색 눈, 발그레한 볼, 동그란 안경을 낀 얼굴. 그걸 보고 하마터면 귀엽다고 생각할 뻔 했다. 큰일 날 생각이었다. 제임스 포터랑 거의 판박이라고, 저 놈은. 또 릴리의 초록색 눈에 홀리고 만 것이라고 스네이프는 생각했다. 해리는 스네이프가 시선을 마주치지 않자 신경이 쓰였다. 와인은 여전히 썼고, 혀에 떫은맛이 돌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교수님은 어디서 주무세요?”
“네가 지낼 방 옆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낸 방인가요?”
“...그런 게 왜 궁금하지?”
“그냥요. 대화잖아요. 수업도 아니고, 취조도 아닌데...”
나눌 수 있는 말이잖아요. 이제 우리 사이엔. 해리는 그렇게 말을 덧붙이려다 말았다. 이제 우리 사이가 어떻다는 건지 해리도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보다는 편한 사이? 그렇다고 해서 스네이프와 사적인 대화를 막 나눌 만큼 편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스네이프가 그런 게 왜 궁금하냐고 말했을 때, 그 벽 앞에서 그만뒀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해리는 그건 또 인정하기가 싫었다. 잘 지내고 싶은 마음에 오기가 섞였다. 해리는 어렸다.
“날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이 보이는군.”
“...그럼 안 되나요?”
“뭐?”
“친구... 할 수도 있지 않나요.”
해리는 자신이 말을 뱉으면서도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이건 정말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스네이프와? 친구라고? 정말로 내가 그와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나? 온갖 생각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이 어리고 당돌한 제자의 말에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 건 스네이프도 마찬가지였다. 스네이프는 평생에 친구라곤 릴리뿐이었다. 그는 그런 것까지 생각나서 미칠 것 같았다.
“건방지다 여겼더니 정말 끝을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포터.”
싸늘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해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해리의 심장으로 유달리 아프게 쑤셔 박혔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사과하는 목소리가 가라앉아있었다. 따듯한 저녁식사는 그걸로 끝이었다. 해리는 그 후 아무 말도 없이 저녁을 먹었다. 칼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숟가락이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 같은 잔 소음만 들렸다. 해리의 가슴 안에 울컥 울컥거리는 모종의 감정이 솟아올랐다. 해리는 스스로도 이 감정이 뭔지 잘 몰랐다. 그건 분노 같기도 했고, 창피함 같기도, 그리고 놀랍게도 슬픔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책장 뒤편에 숨어있었다. 웜테일이 지냈던 방 침대에 누워 해리는 계속해서 호흡을 골랐다. 자꾸 불규칙적인 숨을 쉬고, 심장박동이 커지고 있었다. 감정은 갈무리가 되지 못했다. 해리가 이 감정이 정확히 뭔지를 알았다면, 이렇게 오래 끌진 않았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기에 해리는 내버려두지 못했다.
해리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낮잠을 자서 더 잠에 들기 힘들었다. 방은 작았으며 천장이 낮았고, 틀이 찌그러진 옷장이 있었다. 벽에 양초 등잔이 걸려있었고 창은 하나 나있었다. 창 너머로는 답답한 벽돌집들이 보였다. 저 멀리, 아주 희미하게 강이 보였다. 해리는 어린 스네이프가 창문 앞에 쭈그려 앉아, 강 건너 마을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는 걸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지저분하고 우스꽝스럽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어린아이. 머리카락도 자르지 않아 여자아이처럼 길게 기른 까만 머리는 온통 뒤엉켜있었다.
그런 불우한 소년의 앞에 마법을 할 줄 아는 또래의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해리는 그것만으로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알 수 있었다. 두들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이모와 이모부에게 무시를 당하면서, 어린 해리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지곤 했다. 해리는 자신이 그럴 때, 어린 스네이프 같은 녀석이 나타나준다고 해도 너무나 감격했을 거라 생각했다. 해리를 처음 마법세계로 안내했던 해그리드보다도, 또래의 친구가 먼저 나타나 해리에게 그 세계를 가르쳐주었다면.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친구’란, 바로 그럴 때 생기는 것일까? ‘사랑’이란, 바로 그럴 때 느끼는 것일까?
지금, 스네이프는 삶의 목적을 다 이뤘다. 릴리가 죽은 후, 죽으려했던 그에게 덤블도어는 그녀의 아들을 살리라며 스네이프를 죽지 못하게 두었다. 이제 해리 포터는 볼드모트를 없앴고, 마법세계는 평화로워졌다. 스네이프에게 해리를 지키라는 명령은 이제 끝난 것이다. 해리는 자신도 덤블도어처럼 그를 죽지 못하게 또 한 번 방해한 걸까, 생각했다. 스네이프는 이제 살아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니, 해리는 가슴이 아팠다. 스네이프는 오직 그 자신을 위해서 살아본 적이 있을까? 그는 해리에 의해 두 번째 삶을 부여받았다. 이번에는 스네이프가 그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해리는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미래에서 여기로 돌아온 게 아닐까 생각했다. 스네이프에게 살고 싶어지는 이유를 주자. 그 이름이 ‘친구’일 수도 있겠지.
해리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덮었을 때에는, 수월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스네이프는 자신보다 해리가 먼저 일어난 게 뜻밖이라는 얼굴이었다. 해리는 부엌에서 계란프라이와 베이컨을 굽고 있었다. 스네이프에게 있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부엌에서 음식냄새가 나는 건 정말로 낯선 일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그의 엄마가 살아있을 때나 맡아보았다.
“앉아계세요.”
주전자에서 물을 따르며 해리가 말했다. 스네이프가 식탁 앞에 앉자, 해리는 물을 따른 컵을 건넸다. 그 일련의 행동이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스네이프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이건 마치...
“예언자일보를 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부엉이가 나타났더라고요. 그래서 정기구독을 하기로 했어요.”
그러고 보니 식탁에 오늘자 예언자일보가 놓여있었다. 1면에는 해리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해리 포터, 어둠의 마왕을 몰아내다!> 사진 속의 해리는 지쳐보였지만, 기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스네이프는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사진 속 해리의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시 눈앞의 해리로 시선을 돌렸다. 해리는 스네이프의 앞에 계란과 베이컨이 든 그릇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정말로 볼드모트가 죽었나보군.”
“그렇다니까요. 볼드모트는 교수님이 딱총나무 지팡이의 주인인 줄 알았지만, 사실 아니었거든요.”
“그래? ...드레이코였나?”
“어떻게 바로 아셨어요?”
해리가 베이컨을 우물거리며 놀란 눈을 했다. 스네이프는 계란프라이를 칼로 썰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드레이코의 손에 그게 들려있었으니까. 그 지팡이는 죽여서 뺏는 방식만 통하는 게 아니었던 거로군.”
“네. 하지만 볼드모트는 당연히 죽음으로만 그런 강력한 지팡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정확히 따지자면, 말포이도 이미 진짜 주인이 아니었어요.”
“......? 그럼 누가 그 지팡이의 주인이지?”
“저요, 저였어요. 제가 말포이 저택에 들어갔을 때, 말포이의 지팡이를 뺏었거든요. 그 때 딱총나무 지팡이에 대한 권한도 제게 넘어온 거죠.”
“기가 막히는군...”
스네이프가 계란을 입에 넣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모든 상황이 완전히 해리 포터가 이기기 위해 움직인 것 같았다. 그러다 스네이프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너는... 죽지 않았군. 덤블도어의 말을 들었을 때, 네가 죽어야만 하는 줄 알았는데.”
“아뇨... 전 한 번 죽었었어요.”
“...”
스네이프가 해리를 쳐다보았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 간절히 보고자 했던 그 초록색 눈이 꿰뚫을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수님의 기억을 모두 보고... 죽기 위해 길러진 돼지는 이제 그 자신의 참된 운명을 깨달은 거죠.”
해리는 웃고 있었지만 그 때의 기분을 떠올렸는지,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스네이프는 덤블도어에게 적절한 때에 그를 죽이기 위해 살려놓게 한 거냐며 화를 냈던 모습이 떠올랐다. 덤블도어는 남들이 아는 것만큼 선량하지 못했다. 너무도 똑똑해서, 정확한 계산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
“덤블도어 교수님이 제게 유품으로 남긴 게 있었어요. 제가 첫 시합 때 잡은 스니치와 그리핀도르의 칼이었죠. 저는 그 스니치를 입으로 잡았거든요. 그걸 이렇게, 입술에 대면... ‘나는 끝에서 열린다.’라는 문장이 떠올랐어요. 처음에 저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죠. 죽음의 성물에 대해 알게 되고 안에 부활의 돌이 들어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요. 그리고 교수님의 기억을 보고, 스니치에 떠오른 문장의 의미를 알게 되었죠. 저는 스니치에게 나는 이제 죽으려고 한다, 고 속삭였어요.”
그랬더니, 열린 거죠. 해리는 담백하게 미소 지었다. 스네이프는 눈앞의 어린 애송이가, 자신의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의 커다란 무게감을 느꼈다.
“...들어있었겠군, 부활의 돌.”
“네, 덤블도어 교수님의 손을 그렇게 새카맣게 태워버린 것 말이죠... 저는 돌에서 나온 아버지, 어머니, 시리우스, 루핀과 함께 볼드모트가 기다리고 있는 금지된 숲으로, 죽기 위해서, 들어갔어요. 그리고 살인주문에 맞았죠. 전 죽어서 제 몸에 기생해있던 볼드모트의 불구가 된 영혼도 보았어요. 다시 살아 돌아왔을 땐, 죽은 척을 하고 있다가 틈을 노려 볼드모트와 싸웠고... 어... 지금 생각해보니까, 전 부활의 돌에서 교수님이 나올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 돌은 죽은 사람만 부를 수 있으니까... 교수님은 살아계시니까 나타나지 않았던 걸지도요.”
해리의 마지막 말은 뜻밖이었다. 스네이프는 부활의 돌에서 자신이 나올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는 해리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싫어했는데도... 죽기 직전이라 할 수 있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시 만나게 되었네요.”
그렇게 말하는 해리는 진심을 다해 웃는 것 같았다. 스네이프는 해리가 구운 계란프라이와 베이컨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마치... 그랬다. 이 안온하고 익숙하면서 거부감이 드는 느낌을 스네이프는 알고 있었다. 해리와 자신이 마치 꼭, ‘가족’처럼 느껴졌다.
“살아서 다행이에요.”
스네이프는 조금, 목 안이 뜨거워졌고, 코끝이 시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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