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선생님, 또~!”


이번으로 8번째였다. 해리의 이마가 농구골대가 돼버린 경우 말이었다. 해리는 낮은 높이의 골대 근처에서 멍청하게 앉아있었는데, 골대에서 튕겨나간 공이 안착하기 아주 좋은 위치에 그의 이마가 있었다. 하지만 해리는 딱히 아픈 줄도 몰랐다. 말랑한 아이들 용 농구공이라서 그런 것치곤 이마는 발갛게 작은 혹이 올라와있었다. 그래서인지 해리의 이마에 있는 번개모양 흉터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아이들은 멋지다며(Awesome!) 그 흉터를 상당히 좋아했다. 이제 아이들은 공 던지기보다는 멍하게 앉아있는 해리 선생님의 부은 이마에 난 흉터를 만지작대는 것에 더 신나했다.


“해리, 잠시 만요.”


여아들에게 발레를 가르치는 레이첼이었다. 언제나 활기차게 아이들을 가르치던 해리의 오늘 모습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레이첼이 부르는 소리도 세 번 만에야 알아들은 해리였다. 당황해서 벌떡 일어서는 해리 주변의 아이들이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해리는 머쓱히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레이첼이 걱정스럽게 어디가 아픈 거냐, 무슨 일이 있으시다면 조퇴를 하시는 게 어떤가하며 이것저것 질문을 해왔다. 대답을 하려하면 다음 말이 튀어나왔기 때문에 어느 타이밍에 대답을 해야 할지 해리는 망설였다. 결국 해리가 손을 들어 레이첼의 입을 막았다. 한숨을 한 번 쉰 해리는, 그래도 이 대답만은 해야지 하고 결심을 굳혔다.


“조퇴는 무슨요, 아픈 것 아니에요. 정신 차릴게요. 걱정 끼쳐 죄송해요, 레이첼.”


조퇴라니, 큰일 날 소리다. 해리는 지금 스네이프와 조금이라도 오래 떨어져있고 싶었다. 그런데 평소보다도 더 일찍 집으로 돌아가라니? 이미 해리는 어린애도 아닌데 그런 꿈(과 몽정)을 꾼 것만으로도 충분히 창피했다. 그런데다 낯부끄러워 스네이프 앞에서 전전긍긍 뭐 마려운 개처럼 굴기도 싫었다. 하지만 사실 출근해서도 자꾸 꿈을 떠올리며 헤벌쭉하느라 수업에 집중을 못하고 있는 것도 부끄럽긴 마찬가지였다. 직장동료가 아프냐고 걱정해주는데, 해리는 머릿속으로 스네이프가 절정을 느낄 때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기억은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치 해리가 실제로 했고, 직접 두 눈으로 본 것 같았다.


해리는 예전에 꿈으로 볼드모트가 실제로 한 일들을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행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낀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그것과는 다르다. 그냥 단순한 꿈이었다. 꿈인데, 왜 진짜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순간순간의 느낌이 자꾸 떠오르는지... 도저히 해리는 일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지금 스네이프를 본다면 진짜 섹스를 했던 사이마냥 자연스럽게 옷을 벗기고, 안으려 들까봐 겁도 났다. 그 맛을 알아버린 기분이라고나 할까... 문제는 해리와 스네이프는 실제로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에게 꿈에서처럼 진짜로 해버린다면...’


해리는 아까부터 몇 번씩 생각하던 것을 또 다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속의 스네이프는 해리의 강압에 너무 순순히 따랐고, 또 적극적이었다. 확실히 꿈에서 깨고 나니 스네이프의 그런 모습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되었다. 그걸 알면서도 해리는 자신이 현실과 꿈을 구별 못 하고 그에게 덤벼들까봐 겁을 내고 있었다. 해리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리고 또 생각하는 것이었다. 진짜로 그에게 키스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명백히 성추행이었다. 스네이프가 받아들여줄 리 없었다. 해리는 이제 그의 지팡이에서 아브라 카다브라가 날아올지 크루시오가 날아올지 궁금해졌다. 죽기 직전에 스네이프에게 키스한 거면 괜찮은 삶이었나?


해리는 오늘은 정말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같이 산다는 것은 확실히 축복이 아니라 고문이었다. 그가 잘 시간까지 기다렸다 늦게 집에 돌아가면, 스네이프는 늦도록 오지 않는 자신을 걱정할까? 별 생각들로 해리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레이첼, 이따 마치고 술 한 잔 안 할래요?”

“오, 해리, 웬일이에요? 매일 칼 같이 퇴근하더니. 그래서 우린 해리가 신혼인 줄 알았는데.”

“.......네?”


해리는 지금 입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이라도 머금었다면 레이첼의 얼굴에 모조리 뿜어버렸을 것이었다.


“같이 사는 사람 있는 건 다들 알고, 둘 뿐이라고 들어서 결혼한 줄 알았죠. 아,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거였나요?”

“아니... 전 부모님이 돌아가셨, 그... 다들 어떻게 알고 계신 거예요?!”

“어머! 역시 결혼했었구나. 일찍 했네요~”


해리가 알고 있냐 물은 건 결혼유무가 아니라 둘이서 산다는 부분이었지만, 레이첼은 이미 단단히 오해한 듯싶었다. 그리고 해리도 가만 생각해보니, 다들 자신을 결혼했다고, 젊은 부부 둘이서 살고 있어서 퇴근 후 바로 집으로 간다고 생각했던 게 기분이 은근 좋기도... 하고......? 어차피 스네이프는 해리의 직장 일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 이대로 부부라고 생각하게 둔다고 해도 뭐,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해리, 오늘은 웬 술? 부인이랑 싸우기라도 했어요? 아, 그래서 오늘 해리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거구나!”


박수를 짝 치며 알겠다는 듯 레이첼이 끄덕였다. 30대이며 아이를 둘 키우는 레이첼은 약간 몰리를 생각나게 하는 느낌이 있었다. 해리는 그녀에게 술을 마시자고 한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스네이프를 제 부인이라고 칭하는 걸 듣고 있자니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음, 뭐... 비슷한 거예요. 오늘은 마주치기가 좀 그렇거든요.”

“그런 날이 있죠. 그리고 나도 해리를 제대로 환영식도 못해준 것 같아서 아쉬웠거든요. 술 말고 우리 집에서 저녁이나 먹고 가요. 취해서 가면 아내가 슬퍼할 거야.”

“오...정말 그래도 될까요, 레이첼? 너무 감사해요!”


아아, 다행이다. 레이첼과 단둘이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저녁을 먹고 들어가니 그만큼의 시간동안 스네이프도 피할 수 있었다. 말하지 않고 저녁을 거르면 스네이프가 걱정은 몰라도 신경은 쓰일 텐데, 부엉이가 없다는 핑계로 해리는 얼버무렸다. 일하다가 늦을 수도 있지, 한 번은... 나쁜 짓도 아니고 직장동료 집에서 저녁 먹고 들어간 건데... 그렇게 해리는 스스로를 열심히 합리화 했다. 그러면서도 스네이프에게 계속 몹쓸 짓을(꿈에서부터) 하는 것 같아 영 찜찜했다.



스네이프는 식탁에 앉아 시계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이번으로 8번째였다. 그리고 다시 봐도 시계는 8시 반을 넘어갔다. 퇴근이 5시 반이고, 집까지 걸어오면 6시가 안 돼서 돌아오던 해리였다. 스네이프는 시간이 6시 반쯤 됐을 때까지는 해리의 일이 늦게 끝났다거나, 뭘 사고 오나 싶었다. 그리고 시계가 7시를 넘어가자 혹시 해리를 알아본 마법사가 나타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고, 저녁으로 만든 로스트 비프는 식고 굳어버렸다. 그리고 8시 반이 넘은 지금에선,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저녁은 때를 놓쳐 굶어버렸다. 빈속과 예민해진 정신이 합쳐져 스네이프는 한껏 날카로워졌다. 호그와트 시절만큼이나 싸늘했다. 스네이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식은 로스트 비프를 다시 불 위에 놓고 스네이프는 찬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물에 조금 열이 식는 것 같았다. 자신을 걱정시키는 해리에게도 ‘빌어먹을 놈’이란 욕이 나왔고, 해리를 걱정하는 자신의 모습에도 ‘빌어먹을’이란 욕이 나왔다. 속이 쓰렸다. 뭘 안 먹어서 더 그런 거지. 스네이프는 미련하게 굶고 있는 것도 짜증이 났고, 그래서 늦었지만 식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집 안에 음식냄새가 풍기자 조금 기분이 누그러지는 것도 같았다. 점심은 혼자 먹더라도 항상 아침과 저녁은 해리와 함께인 게 익숙해서, 몇 달 만에 혼자 가지는 저녁은 낯설고 쓸쓸했다.


이미 인정한 사실이었지만 역시 자신의 삶에서 해리 포터가 너무 익숙해졌다. 그게 지금은 좀 화가 났다. 겨우 하루였다. 이런 일이 전에 자주 있던 것도 아니었고, 해리가 밖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오든, 누구와 밤새 놀든 성인이니 나쁜 일도 아니었다. 부엉이가 없었으니 연락방법도 마땅찮았을 거다. 하지만 이런 일이 오늘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해리가 ‘자신에게 말도 없이 늦을 수도 있다’란 사실을 마침내 스네이프가 알게 된 것이기도 했다. 아침에는 자신과 운동을 함께 하고 싶다는 소리를 하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또 저녁엔 말없이 늦어지는 게 잘 매치도 되지 않았다. 스네이프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서운함’이라는 걸 인정했다.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건 해리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실망했고, 속상했다. 씹고 있는 고기의 질감이 고무처럼 질겨서 스네이프는 뱉어버렸다.


그리고 이건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오늘 꾼 꿈에 스네이프는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 꿈에서 해리는 스네이프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굴면서 다정하고 난폭하게 자신을 원했다. 그게 현실이 아닌 건 알았다. 그러나 감각이 너무 생생한 게 문제였다. 스네이프는 자신이 꿈을 현실처럼 착각해버리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그리고 지금도 그 꿈속의 해리의 모습 때문에 더 크게 실망하고 있으니, 우습고 미칠 노릇이었다.


그건 그저 꿈의 일일 뿐인데, 너 날 그렇게 좋아해놓고, 원해놓고서 왜 지금 나를 걱정하게 하고 화가 나게 만들고 실망하게 만들어. 딱 이런 생각이 들어버렸다.


“환장하겠군...”


배는 덜 찼는데 입맛이 딱 떨어졌다. 억지로 먹어봐야 탈이 난다. 스네이프는 해리 몫으로 만들어뒀던 것까지 몽땅 쓰레기통에 버렸다.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피곤해서 안 되겠군. 더는 못 기다리겠다, 포터. 스네이프는 2층의 제 방으로 올라갔다. 씻을 힘도 없어 대충 마법으로 입만 헹구고 침대에 누웠다. 이 와중에도 아래층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릴까 신경을 곤두세운 자신이 한심했다. 스네이프는 신경질적으로 귀마개를 찾아 귀에 꽂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래서, 돌아가서 부인이랑은 화해할거죠? 해리.”

“싸운 건 아니라니까요, 레이첼. 음, 그래도 제대로 다시 대화하고 전처럼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불쑥불쑥 들고 마는 성충동에서 자유롭게 해주세요, 멀린... 왜 자신은 이렇게 혈기왕성한 나이인 것일까. 해리는 젊음마저 후회됐다.


“해리 형, 다음에도 또 올 거지?”

“응. 찰스, 물론이야. 체육교실에도 엄마 따라 놀러오렴. 그럼 폐 많이 끼쳤습니다, 레이첼. 그리고 아담 씨.”

“만나서 반가웠어요, 포터 군. 애들이 너무 좋아해서, 우리야 고마웠지. 다음에도 꼭 와요.”


아직 4살인 찰스와 2살인 웨이드에게 손으로 인사해주며 해리는 레이첼과 그의 남편 아담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떠들썩하고 따듯한 가정에 섞여 함께 밥을 먹은 건 버로우 이후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해리의 기분도 많이 안정되었다. 그녀의 가족과 저녁을 함께 먹은 일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직 저녁 9시가 안 됐지만 평소보다 3시간을 말없이 기다리게 했으니 스네이프도 꽤 화가 났겠지? 문 밖을 나서자 슬그머니 걱정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잘 대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했으니, 해리는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날이 어둡고 인적이 드물어지자 해리는 순간이동으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동안 날이 밝을 때 퇴근해서 그냥 걸었었는데, 이런 차이를 느끼자 또 살짝 마음이 무거워졌다. 많이 화 안 나셨을 거야. 스네이프가 나를 그렇게 크게 걱정할 리가 없잖아. (이 생각을 할 때 해리는 조금 서글펐다.) 그리고 걱정을 길게 하기도 전에, 순간이동으로 순식간에 해리는 집 안으로 돌아왔다. 조용한 집에 탕! 하는 소리만 멀거니 메아리쳤다. 해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불 꺼진 집에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실망감이 몰려왔다. 그럼 그렇지, 하는 마음에 속이 상했다.


지팡이를 휘둘러 벽에 걸린 양초에 불을 켜자 조용한 집 안이 더 잘 보였다. 사람이 없으니 적막하고 우중충한 집이었다. 아니, 스네이프가 안 보여서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다. 사실 해리도 알았다.


해리는 욕실에서 씻은 뒤, 책장 뒤의 계단으로 올라갔다. 스네이프가 자고 있는지만 확인하고 자신도 자러갈 생각이었다. 똑똑, 스네이프의 방 문을 두드렸다. 아무 반응도 들리지 않았다. 해리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쥐고 돌려보았다. 잠겨있지 않은 문은 끼이익 낡은 소릴 내며 열렸다. 어두운 방 안에 창문에서 들어온 달빛만 희미하게 어려 있었다. 그 달빛이 닿는 곳에 스네이프의 얼굴이 있었다. 자고 계셨네. 해리는 그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애초 생각과 달리 해리는 문을 닫고 나가지는 않았다.


해리는 스네이프가 잠든 침대 아래에 털썩 앉았다. 스네이프의 하얀 얼굴에 어리는 희미한 달빛의 고요함이 너무 어울렸다. 해리는 그것 때문에 홀린 거라고 핑계를 주워섬겼다. 달빛에는 마력이 깃들어있다고 하니까, 아주 말도 안 되는 변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응? 귀마개도 끼셨네. 잘 때 끼고 주무시는구나. 몰랐는데...”


해리는 손가락을 뻗어 귓불과 그 위로 살짝 돋은 작은 귀마개를 쓸어내렸다. 스네이프가 잠에 옅게 들었다면 깰 것을 각오한 행동이었는데, 그는 반응 없이 잠들어있었다. 의외로 깊게 잠에 드는 타입인가? 해리는 예민한 스네이프는 잠도 얕게 들 거라고 생각했다. 한 지붕 아래서 동거한 지 몇 달이지만, 각자 따로 방을 쓰니 알 수 없는 것은 많았다. 일어나서 행동 패턴도 둘은 달랐다. 해리는 밖으로 나가고, 스네이프는 줄곧 집 안에만 있었다. 해리는 시트 위로 팔짱을 놓고는, 고개를 얹고 잠든 스네이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말도 없이 늦어서 죄송해요... 그냥, 오늘은 교수님을 보기 좀 부끄러워서... 밖으로 겉돌았네요... 직장에 레이첼이라고, 여자애들한테 발레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는데, 그녀의 가족들이랑 저녁 같이 먹었어요... 감자 요리랑, 디저트로 애플파이도 먹고, 교수님이 좋아하는 콜라도 마셨어요. 교수님은 오늘 뭐 드셨을까... 아, 그러고 보니 저녁 혼자 드시게 해버렸네요... 이것도 너무 죄송하다...”


해리는 그 후 한참 말이 없었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가 깨어있다면 좀처럼 불가능한, 그를 맘 놓고 볼 수 있는 기회를 훅 털고 일어나는 게 아쉬워서 발목이 잡혔다.


“...왜 안 돌아가고 아직 있는 거지? 포터.”

“으왁...?!! 교, 교수님...?!”


해리는 기관차의 경적소리 같은 소리를 발작적으로 지르며 기겁해 뒷걸음질 쳤다. 너무 놀라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져서 3초 후에 다시 올라와 쿵쿵대는 느낌이었다. 스네이프는 시끄러운 듯 못마땅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켜, 벽에 붙은 해리를 보았다.


“늦게 온 것도 모자라... 이젠 내 잠까지 방해하다니, 벌을 달라고 제 발로 찾아오고 또 죄를 늘리는군, 포터.”

“어, 언제부터...”

“깨어있었나 묻는 건가?”


해리가 침을 꿀떡 삼키며 힘겹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아래층에서 순간이동 소리가 요란하게 날 때부터다.”

“그럼 처음부터잖아요...!”


해리는 절망적으로 대답했다. 스네이프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했다.


“이 낡은 귀마개에 마법효력이 떨어졌단 건 확실히 알았지. 원래라면 전혀 안 들려야 정상이다.”


스네이프는 귀마개를 귀에서 빼서 지팡이로 톡톡 두드리고 주문을 중얼거렸다. 스네이프는 아주 여유로워보였다. 그에 반해 해리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숨이 턱턱 막혔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은 건 좋아한다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해리는 뭔가 쓸데없는 말을 내뱉지 않았는지 되짚느라 머릿속의 모터가 팽팽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이제 그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모터에선 타는 냄새까지 나는 것 같았다.


해리의 당황에 찬 얼굴을 내려다보며 스네이프는 입 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사실 해리에 대한 화는 진작 풀렸다. 변명은 딱히 화낼만한 내용도 아니었고, 바로 자러가지 않고 자신을 보러온 행동도 마음에 들었다. 처음엔 무례하게 집 안으로 순간이동한 자는 또 누군가 싶어 짜증이 치받히고 화가 났다. 마법세계에서 아주 무례하게 여기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타인이 자택으로 곧장 순간이동 하는 경우였다. 그러나 스네이프는 곧 알아차렸다. 이런 방식으로 이 집 안을 들어올 만한 사람도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스네이프는 맥이 탁 풀렸다. ‘타인’이 아니라 ‘해리’여서 안심되는 마음에 어이없이 웃으며 누워있었다.


이 집은 방음이 잘 되지 않았다. 해리가 아래층에서 씻는 소리가 들려왔다. 빗소리처럼 듣다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엔 자러가는군, 싶었다. 하지만 망설이는 노크 소리는 생각지도 못했다. 스네이프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냥 모른 척 했다. 그런데 굳이 들어와 옆에 앉는 것도 예상 밖이었다. 귓가에 해리의 손가락이 닿았을 땐 절로 몸이 흠칫 굳었다. 왜? 라는 생각과 동시에 꿈속의 해리가 생각나서 잠자코 있어보기로 했다. 뜻밖의 손길이었다. 스네이프는 정말 해리의 본심이 무언지 궁금했다. 혹시 좋아한단 소리라도 해버리는 게 아닐까 내심 생각했다. 그리고 해리의 말을 듣고 나선, 잘못한 일도 없는데 절 보기 부끄러웠단 소리가 뭔지 궁금해졌다. 설마 아침에 입에 있던 음식을 뿜은 게 부끄러워 밖을 나돌았던 거라면, 스네이프는 약간 실망스러울 것 같았다.


“내게 부끄러웠단 건 뭐지, 포터?”


그래서 스네이프는 단도직입적으로 해리에게 물었다. 해리는 그 질문을 예상치 못했는지, 아니면 그 말만은 제발, 이라는 심정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스네이프는 침대헤드에 등을 기대며 흥미롭게 해리를 지켜보았다. 일단 스네이프는 오늘 하루 너무 긴 시간동안 혼자 있었다. 그래서 단순히 눈앞에 해리가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즐거움을 느꼈다.


“아, 그... 저... 그건... 으, 그게... 교, 교수님...”

“몰랐는걸, 자네가 내게 말도 못하고 감출 큰 잘못을 저질렀을 줄은. 용의주도하군, 포터. 난 그게 뭔지 감이 안 잡히는데 말이야.”


말투는 빈정거렸지만 스네이프는 지금 꽤 유쾌했다. 해리가 이렇게 더듬대면서 감추려하는 잘못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스네이프는 더욱 흥미로워졌다. 대답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포터에게 꼭 진실도 듣고 싶었다.


“...베리타세룸을 만들어둔 게 있지.”

“앗...! 안, 안돼요! 저, 절대 안 마실 겁니다!”

“하지만 지금 더 빠른 방법이 떠올랐다, 포터.”


스네이프는 오늘 그 꿈을 꾼 건 어느 정도 예지몽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덕분에 레질리먼시를 써보고 싶어졌다. 스네이프는 슬그머니 웃으며 지팡이를 들었다.


“여전히 오클러먼시는 할 줄 모르겠지, 포터?”

“......!!”


스네이프는 해리가 당황하는 틈을 타 바로 포터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황급히 주문을 풀었다. 스네이프는 당혹스러움에 하얗던 얼굴이 벌겋게 변해있었다.


“이건...”


스네이프는 기억을 읽자마자, 해리가 방어마법을 써서 자신의 머릿속으로 역으로 들어온 줄 알았다. 해리에게서 읽어낸 기억이 자신의 기억과 완벽히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해리는 스네이프의 붉어진 얼굴을 보았다. 꿈속의 모습을 보여서 화가 났거나 기막혀하는 것이라고 해리는 생각했다. 너무 무안하고 부끄러웠다. 해리는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바닥의 무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반응으로, 해리가 역으로 자신의 기억을 읽은 게 아닌 걸 알았다. 해리는 그저 자신의 기억을 들켰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는 건, 해리와 스네이프는 오늘 똑같은 꿈을 꾸었다는 말이었다. 뭐, 아주 없는 일은 아닌데─ (종종 마법의 힘이 없는 머글들 사이에서도 가능하다고 하고─) 왜 하필 그런 꿈을 똑같이 꿔버린 건가?


스네이프는 이제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침에 쭈뼛거린 해리의 반응이라든지, 부끄러워서 자신을 피하고 싶었던 것 등을 말이었다. 하지만... 알고 나니 이걸 또 어떻게 대해야하나 싶어서 자신도 당혹스러웠다. 같은 꿈을 꿨다고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무슨 이런 꿈을 꿨냐고 빈정거려야 맞을까? 아예 아무 말 하지 않는 게 나을까?


한참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침묵을 못 이긴 쪽은 해리였다.


“그, 그저 꿈인데... 교, 교수님. 용서해주실...거죠?”

“...현실의 내게 저지른 잘못도 아니잖나, 용서를 빌 거면 꿈속의 교수에게 해야겠지. 포터.”

“아......”


해리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그 반응을 들으니 스네이프는 웃음이 피식 나왔다.


“그, 근데 또 그런 꿈을 꿀 리도 없으니까...! 그냥 현실의 교수님께 사과드릴게요...!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해리의 그 대답에는 진짜로 크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다. 언젠 다 큰 성인 같더니, 여전히 해리 포터는 호그와트의 애송이 그대로였다. 스네이프는 큰 웃음 대신 비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현실의 내겐 잘못하지 않았다고 했잖나. 그 용서는 쓸데없다, 포터.”

“그, 그럼...”


해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스네이프는 자신도 모르게 목 뒤가 긴장했다. 둘을 둘러싼 기류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스네이프는 이 상황을 자신이 의도한 걸까,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따지자면 그런 것도 같았다. 애송이를 다루는 게 어른의 일이었으니 말이었다. 그래도 직접적으로 유혹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스네이프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었다. 해리가 어떻게 반응할지가 가장 중요했다. 스네이프는 가만히 해리를 바라보았다. 목덜미의 긴장으로 스네이프의 얼굴이 약간 딱딱해졌다.


“용서를 구했으니까... 잘못이 있어야... 하겠네요, 교수님.”


마른 침이 섞인 해리의 목소리는 평소답지 않게 거칠했다. 스네이프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지켜볼 뿐이었다.


해리가 다시 아까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해리가 스네이프와 시선을 마주쳤다. 꿈에서 본 욕망이 섞인 초록색 눈동자와 닮아있는 눈빛이었다. 스네이프는 점술 수업은 열심히 듣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동의하는 말은 있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꿈은 없었다. 그럼 해리가 정말로 자신을 좋아해서 지금 이러는 걸까? 누구나 그런 꿈에는 충분히 휘둘릴 수 있었다. 훨씬 어른인 자신도 영향을 받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 꿈이라면, 저 애송이는 충분히 휘둘릴만했다. 스네이프는 그것에 약간 자극을 줘봤을 뿐이었다. 진짜로는 서로가 어떻게 행동할지, 해리만큼 스네이프 역시 궁금했다.


입술이 서로 가까워졌다. 스네이프는 가만히 해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리는 양 손으로 스네이프를 가두듯이 시트를 짚었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상체가 꼿꼿이 서는 걸 지켜보았다. 여전히 스네이프는 목덜미가 긴장한 채라서 몸 곳곳이 딱딱해져 불편했다. 둘의 혀가 마주쳤다. 입술이 닿기까지 찰나의 시간은 억겁처럼 굉장히 길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혀가 닿으면 시간은 순식간이었다. 잡아둬 느려졌던 시간을 탁 풀어놓은 것처럼 모든 게 급했다. 해리는 더 몸을 일으켰고, 스네이프의 양 어깨를 붙잡아 침대로 눕히며 그의 위에 올라탔다. 스네이프는 급하게 키스를 받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스네이프는 키스가 처음이었다. 이렇게 거칠고 빠른 속도는 더 감당이 되지 않았다.


해리는 스네이프가 눈을 감았을 때, 반대로 눈을 떴다. 아래에서 이 성급한 키스를 받아내는 얼굴은 평소와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보였다. 찡그린 얼굴이 금붕어처럼 입을 벌리고 뻐끔거렸다. 전혀 에로틱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진짜 현실의 스네이프란 게 느껴져서 오히려 좋았다. 해리는 그가 숨을 못 쉴까봐 입술을 떼 주었다. 스네이프는 콜록거리면서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눈가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해리는 엄지로 쓱 닦아주었다.


“...하...하아...”


스네이프는 숨을 헐떡이는 중에 가끔씩 기침을 했다. 해리는 미안했지만 그게 사랑스럽다고도 생각했다.


저질러버렸다. 현실의 스네이프에게 키스했다. 해리는 잠잠해져 가는 스네이프의 입술을 다시 부드럽게 빨았다. 흠칫했던 스네이프가 그대로 눈만 굴려 해리의 얼굴을 보았다. 돌진하는 야생마 같더니, 이번 키스는 꿈에서처럼 다정하고 사근사근했다. 마치 제 연인인 양 구는군. 스네이프는 해리의 혀를 마주 빨아주었다. 이제 소스라치는 쪽은 해리였다. 입 꼬리를 끌어올려 비웃은 스네이프가 해리의 몸을 밀어냈다.


“이건 꿈이 아니다, 포터.”

“......”

“용서를 구했기 때문에 저지른 잘못이고. 그러니 이제 끝이다.”

“...교수님!”

“...왜 소리를 지르지?”

“조...좋아합니다! 그런 꿈, 을 꿔서 키스한 게 아니고... 교수님을 좋아해서 한 겁니다...!”

“......”


물론 스네이프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정도의 키스를 받아놓고 모를 사람은 없었다. 그 꿈은 해리 포터의 염원 같은 거였나, 그 바람이 굉장히 컸나 보군, 그게 자신에게 영향을 미쳐 함께 꿈을 꿨을 정도면. 스네이프는 전부터 종종, 자신을 대놓고 보지 못하고 힐끗힐끗 보다가 정작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해리를 눈치 채고 있었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네... 네?”

“좋아해서, 키스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뭐지? 또 꿈에서처럼 덮칠 셈인가?”

“......”


해리의 얼굴이 새빨간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어이없을 정도로 솔직하고 유치한 반응이었다. 스네이프는 해리가 고작 이런 몸 따위에 흥분할 리 없다 생각했는데, 앞으로는 오히려 그의 흥분을 자제시키기 위해 고생을 하겠단 생각이 들어 기분이 딱히 좋진 않았다.


“교...교수님이랑...”


해리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스네이프가 그런 해리를 한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금방 뭔가 결심이라도 섰는지 해리의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저는 앞으로도 교수님과 계속 같이 살고 싶어요.”


그 말을 하고서, 해리의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 스네이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스네이프는 어깨에 닿는 해리의 조금 불규칙적인 숨을 느꼈다. 스네이프도 언제까지 이 어린아이를 받아줄 순 없다고 생각했다. 해리는 몰랐지만, 그가 어릴 때부터 스네이프는 아주 많은 순간을 해리를 돌봐주고 있었다. 해리가 말하는 ‘계속’이 언제까지일지도 매우 불투명했다. 모든 게 불확실하고, 이것이 완벽히 좋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스네이프는 지금 이 순간 해리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스네이프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해리의 입술이 먼저 스네이프의 입술로 찾아왔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혀가 들어올 수 있게 입술을 벌려 열어주었다. 그러나 의외로 잘 맞을지도 모르지, 스네이프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혼자 읽는 글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까 부끄러움에 글 내용까지 부끄러워지네요..

전 편 전개하다가 빼먹은 내용 있어서, 나 되게 얘네 야한 거부터 얼른 보고 싶었구나 하는 생각도 해봤답니다.

그리고 개정판 1권,2권(반양장) 받았는데, 글마다 있던 제목 위의 삽화가 사라져서 아쉽더라고요.

책 사이즈가 작아진 건 맘에 듭니다. 8권도 얼른 읽고 싶어요... 8권의 어른 해리가 궁금궁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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