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스네] 구원자 2
2.
주변이 어두컴컴해서 바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비가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그 사이 그친 것일까? 그렇게 믿어야겠지만 자꾸 의구심이 솟았다. 해리는 제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어두움은 대낮에 비구름이 몰려와 어둑해진 정도의 하늘이 아니었다. 분명히, 아직 한밤중이었다. 해리는 순간 손목에 차고 있던 자신의 시계가 생각났다. 막 0시가 된 듯, 시침과 분침이 모두 숫자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초침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해리는 심장박동이 점점 커져가는 걸 느꼈다. 침착하려했지만 주먹 쥔 손에 땀이 스몄다. 젖은 바지에 땀이 찬 손을 닦아 봐야 소용없었지만 여러 번 천에 손바닥을 비볐다. 비에 젖은 생쥐 꼴인 몸만 아니었다면 해리는 방금까지 빗속에 있었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이 정말로 1년 전의 오늘이라면. 아니, 이젠 가정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해리는 자신이 그 날 자정에 어디에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래번클로 기숙사의 유령이며 래번클로의 딸인 회색 숙녀에게서 보관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마지막 호크룩스의 정체는 알게 되었지만 어디에 있을지를 막막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해그리드와 마주쳤다. 자정, 전투의 시작. 맞아. 해그리드와 함께 론과 헤르미온느의 행방을 찾으며 보관이 있을 장소를 떠올려냈었다. 필요의 방. 그 방으로 가던 길에 겁에 질린 팽을 쫓아간 해그리드와 헤어지고, 여러 사람들과 마주쳤었다. 그 길에 마주쳤던 인물 중에는 애버포스도 있었다. 그와 나눴던 대화를 해리는 기억했다.
슬리데린의 학생 몇을 인질로 잡을 생각은 왜 아무도 안 했을까? 그런 걸론 볼드모트를 못 막아요. 그리고 덤블도어였다면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으셨을걸요.
그 말을 했을 때, 해리는 스네이프의 결백에 대해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덤블도어는 오랫동안 스네이프를 변호했다. 그런 악인마저 믿은 사람이 학생들을 인질로 붙잡아둘 리 없다고......
스네이프를 증오하고 격렬히 분노했을 때의 감정을 해리는 여전히 기억했다. 이어서 해리는 그럼, 지금 이 순간엔 스네이프가 살아있겠구나 생각했다. 아찔했다. 예리한 화살촉에 심장이 관통당하는 느낌이었다. 스네이프 뿐만이 아니었다. 프레드도, 루핀도, 통스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아직은 살아있을게 분명했다. 하지만 과거에 미래의 사람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 괴롭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아무도 살리지 못해.
어쨌든 해리는 여기에 줄곧 서있을 수만은 없었다. 저 먼 곳에서부터 함성과 비명이 웅성웅성 들려왔다. 가까운 호그스미드에서 들리는 소리들도 있었다. 해리는 젖은 몸 위로 투명망토를 다시 뒤집어썼다. 순간이동으로 호그와트 근처까지 가니 소리는 귀를 멎게 할 만큼 크게 들렸다. 사방에서 오색의 주문들이 춤을 췄다. 해리는 몸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았지만 완벽하게 투명해진 게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주문이 날아온다면 피할 순 없었다. 해리는 프로테고(방어마법)를 쓰면서 사람들에게서 제법 떨어진 장소로 이동했다.
데스이터들과 마법생물들이 호그와트 학생들을 겨냥할 때, 남모르게 도움을 주면서 해리는 그곳에 몸을 은닉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문을 튕겨낸 학생들은 어리둥절해하다가도 곧 새로운 적을 마주하거나 자리를 피했다. 해리는 한숨을 내쉬며 스네이프가 죽기까지는 아직 4시간 정도는 더 있어야함을 상기했다. 전투 중에 지루할 틈은 없겠지만,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중간 중간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회중시계는 해리의 목에 걸려 달랑거리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들, 쓰러지는 사람들, 안도하는 사람, 분노하는 얼굴, 눈물과 웃음. 해리는 당시에 성에서 호크룩스를 없애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 완전히 참여하진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전투의 모습은 처참했다. 볼드모트에 대한 분노가 절로 솟구쳤다. 해리는 다시 시간을 확인 했다. 이쯤이면 볼드모트가 루시우스를 통해 스네이프를 찾는다는 걸, 볼드모트의 머릿속으로 침투한 과거의 자신이 깨달았을 즘이지 않을까. 해리는 조심스럽게 주문을 피하며 사람들을 지나, 버드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아무도 없는걸.”
아직 자신과 론, 헤르미온느는 성 안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해리는 버드나무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의 풀숲에 몸을 기대앉았다. 비명을 지르는 오두막으로 가는 구멍이 보였다. 저 안에 지금 볼드모트와 내기니가 있다. 그 생각에 내장이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해리는 양쪽의 옆구리를 붙잡으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해리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번개에 뒤통수를 맞은 듯 전율을 느꼈다. 아니, 정말로 번개를 맞아서 돌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스네이프... 해리의 눈앞에 스네이프가 있었다.
스네이프는 곧장 버드나무를 향해 침착하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하얀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볼드모트에게 죽임을 당하러가는 길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미래를 예감했을까. 아니, 스네이프는 늘 죽음을 각오했다. 두려워하면서도 그 위치를 항상 지켰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마법사의 충실한 종을 연기하는 것. 볼드모트처럼 영혼을 갈래갈래 찢지 않는 이상, 사람의 목숨은 평등하게 하나였다. 그런 목숨을 내놓고, 자신이 사랑하는 릴리를 죽였던 자의 밑에서, 온 세상 사람들의 오해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 1년 만에 본 스네이프의 모습에 해리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스네이프를 보면서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다. 지난 1년간, 시신 한 부분이라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 지금 살아서 눈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해리는 가슴 위를 달랑이며 두드리는 회중시계를 손으로 꽉 쥐었다.
살릴 순 없을 거야. 하지만 그 후 시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해리의 가슴이 크게 쿵쾅쿵쾅 뛰었다. 계속 여기서 지켜볼 것인가? 아예 저 안으로 스네이프를 따라 들어가는 건 어떨까?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해리는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정신없이 쿵쿵거렸다. 해리는 발소리보다도 심장소리가 들킬까봐 머플리아토 주문을 썼다.
좁은 구멍을 기어가는 동안, 해리는 긴장으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곧 스네이프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해리는 힐끗 볼드모트와 은빛을 뿜는 마법구체 속의 내기니를 보곤 스네이프에게서 조금 떨어져 몸을 웅크렸다. 스네이프가 지팡이를 휘둘러 통로의 입구를 낡은 상자로 막았다. 방 안의 불빛은 기억 속 그대로 희미하고 어두침침했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저는 해리포터를 찾고 있었습니다.”
볼드모트는 대답이 없었다. 길고 가느다란 해골 같은 손가락으로 딱총나무지팡이를 유려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섬세한 손놀림이 계속 이어졌다. 스네이프에게서 아주 약간 초조한 기색이 내비쳤다. 까만 눈은 마법구체로 보호되고 있는 내기니를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는 채였다. 덤블도어에게서 들은 명령을 떠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기니가 보호받는 때가 오면, 해리에게 말을 전해도 된다는 명령. 그 말이란, ‘해리포터는 반드시 볼드모트의 손에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주인님, 저는 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해낼 것입니다. 해리포터를 찾아내어, 주인님께 그를 바칠 영광을 제가 기꺼이 누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해리로선 스네이프의 낮고 끝이 약간 갈라지는 목소리를 아주 오랜만에 듣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 그의 목소리. 해리는 이제 아무런 분노와 증오를 담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들을 접했다. 그런 마음으로 처음 접해본 것들은 해리의 기억과 닮은 듯, 달랐다. 해리에게 말할 때의 스네이프의 목소리는 항상 비아냥거림으로 일관되어있었다. 스네이프는 볼드모트에게 아첨하는 말조차 담백하고 차분했다. 그의 하얀 얼굴은 무감정해보였다. 까만 눈이 내기니를 줄곧 응시할 뿐이었다.
“.......주인님, 저들의 저항이 약해지고 있......”
“그래, 네 도움 없이도 그렇게 되고 있지.”
해리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제부터는 기억 속에 있는 대화였다. 그렇다는 건, 입구를 막은 저 낡은 상자 뒤에 과거의 자신이 숨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 기분은 상당히 묘했다. 낡은 상자 뒤에도 투명망토를 쓴 해리포터가 있었고, 이 방 안에도 투명망토를 쓴 해리포터가 있었다.
볼드모트와 스네이프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1년 전에 낡은 상자의 희미한 틈으로 봤을 때와 다르게, 지금 해리는 그 방 안에 함께 존재하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스네이프는 계속 해리를 찾아 나서게 해달라며 구걸했다. 해리는 이제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볼드모트에겐 상당히 귀찮게 들릴 만한 집요하고 끈덕진 요구였다.
“어쩌면 너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느냐? 어쨌든 너는 대단히 영리한 자니까, 세베루스. 그동안 너는 착하고 충실한 종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유감스럽구나.”
“주인님......”
“딱총나무 지팡이는 나를 제대로 섬길 수가 없었다, 세베루스. 왜냐하면 나는 이 지팡이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딱총나무 지팡이는 이전 주인을 죽인 마법사의 소유가 된다. 그런데 네가 알버스 덤블도어를 죽였다. 세베루스, 네가 살아 있는 한 딱총나무 지팡이는 진정한 나의 소유가 되지 못한단 말이다.”
“주인님!”
스네이프가 지팡이를 치켜들며 반발하는 게 보였다. 해리는 숨을 죽였다. 곧, 곧이었다... 주문을 써서 제 인기척이 들리지 않게 막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해리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들킬까 염려스러웠다. 그만큼 심장이 너무 빠르고 불길한 박자로 뛰고 있었다.
“달리 다른 방법이 없구나. 나는 반드시 이 지팡이의 주인이 되어야만 한다. 세베루스, 이 지팡이를 지배해야 결국에는 포터를 지배할 수 있다.”
그 뒤를 알고 있었지만 볼드모트가 지팡이를 휘두르는 순간, 해리 역시 스네이프처럼 지팡이 끝에서 살인주문이 날아올까 긴장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대로, 볼드모트는 내기니가 든 구체로 지팡이를 휘두른 것이었다. 한순간 안도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뱀의 우리를 바라보며 스네이프는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내기니가 스네이프의 머리와 어깨를 덮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해리는 쉭쉭거리는 볼드모트의 소름끼치는 말소리를 들었다. 이제 해리는 파셀통그를 할 수 없었으므로 그 소리는 그저 쉭쉭거림으로만 들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 뜻만은 확실히 기억했다. ‘죽여.’ 해리의 발끝에서부터 싸늘함이 올라왔다.
“유감스럽구나.”
전혀 유감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오두막은 오로지 스네이프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볼드모트는 차갑게 뱀 우리와 함께 돌아섰다. 홀로 버려진 스네이프는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목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미친 듯이 솟아나왔다. 피 웅덩이 속에 핏기가 사라져가는 하얀 고목이 누워있었다. 해리는 고통에 찬 스네이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해리 역시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지만 계속해서 그를 보았다.
문득 해리는 투명망토를 벗고 나타난 과거의 자신을 발견했다. 해리처럼 스네이프도 그를 발견하고서 눈을 크게 떴다. 미래의 해리가 본 과거의 자신의 얼굴은 온통 혼란으로 일그러져있었다.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행동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과거의 해리는 스네이프의 몸 위로 허리를 숙였다. 스네이프의 목구멍에서 꼴딱꼴딱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숨이 꺼져가는 소리는 듣는 사람의 심장을 쥐어짰다.
“이걸...받아... 이걸...받아......”
스네이프가 자신의 기억을 해리에게 주고 있었다. 피와 은빛의 기억들이 흘러나오는 스네이프의 몸은 기이해보였다. 과거의 해리는 멍청하게 있다가 헤르미온느가 불러낸 플라스크로 겨우 기억을 담아냈다. 스네이프는 힘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남은 기력을 모두 짜내 한 마디를 뱉었다.
“나를...보아라......”
과거의 해리가 스네이프의 까만 눈에 제 초록색 눈을 비췄다. 스네이프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과거의 해리는 멍하니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 때, 날카롭고 싸늘한 볼드모트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과거의 해리는 다시 볼드모트가 오두막으로 돌아온 줄 알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건 호그와트와 인근 지역을 향한 확대된 음성임을 곧 깨달았다.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는 입구를 통해 다시 통로로 돌아갔다.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과거의 해리가 한 번 뒤돌아 스네이프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미래에서 온 해리는 스네이프의 곁에 앉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해리는 스네이프가 내기니에 물려 피를 뿜는 순간부터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깨달았다. 해리는 거추장스러운 투명망토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입고 있는 망토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새벽, 스네이프의 추도식에서 만난 퍽스의, ‘불사조의 눈물’이었다. 해리는 아낌없이 스네이프의 구멍 난 목덜미에 그것을 부었다. 이 눈물은 바실리스크의 독조차 낫게 했다. 하지만 부활의 돌이 말해주듯, 이미 죽은 자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제발, 아직까지 스네이프가 꺼져가는 마지막 목숨 한 자락을 쥐고 있다면.
스네이프의 목덜미에 뚫렸던 구멍이 메워졌다. 상처 하나 없이 하얀 목덜미가 돌아왔다. 진저리치는 스네이프의 신음이 해리의 귀에 아주 반갑게 들렸다. 그는 정신을 바로 차리지 못했다. 흐릿하게 깜박이는 스네이프의 눈은 제일 먼저 자신이 쏟아낸 피 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스네이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자신의 출혈량에 넋을 놓았다. 그리고 그의 눈길은 옆에 앉아있는 해리의 운동화에 와 닿았다.
“너, 넌..”
“괜찮으세요, 교수님? 어디 아픈 곳은 없나요?”
스네이프는 눈을 찌푸렸다가, 감았다가, 다시 부릅떴다. 해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해리는 이보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리둥절해하는 스네이프를 보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평안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있지...? 하나도 아프지 않아... 분명 난 그것에 물렸는데...?”
스네이프의 손이 더듬더듬 제 목덜밀 짚었다. 그리고 놀란 듯 고개를 돌려 상처를 확인했다. 뚫린 구멍조차 없었다. 스네이프는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이게 죽은 후의 세계인가 싶었다. 그런데 왜 죽은 뒤에 해리포터를 만난거지?
“아하! 너도, 나도 죽은 거로군. 내 기억을 보고 포터, 넌 죽으러 간 것이구나.”
“하하하! 지금 우리가 죽은 거라고요? 여기가 사후세계 같으세요, 교수님?”
해리의 말투는 놀리는 것처럼 장난스러웠다. 스네이프는 기분이 상한 듯 한쪽눈썹을 쭉 일그러뜨렸다. 해리는 지금, 굉장히 신기한 기분이었다. 스네이프를 전혀 나쁜 감정 없이 바라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11살 때 스네이프를 처음 봤던 첫인상마저도 불쾌했었다. 왜 저 교수님은 나를 저런 표정으로 바라보실까. 낯선 이에게서 받는 무조건적인 경계는 이질적이고 불유쾌했다. 하지만 이제 해리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얼굴로, 어린 스네이프를 괴롭히던 소년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해리의 아버지, 제임스포터. 이렇듯 자신의 외형이 그를 빼다 박았기 때문에, 스네이프는 조금도 해리를 좋게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해리가 릴리의 어느 부분을 더 많이 닮았다면, 둘의 관계는 일찍이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볼수록 스네이프와 자신의 관계는 흥미로웠다. 해리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리를 싫어하면서도 스네이프는 릴리의 아들인 해리의 생명을 구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엔, 해리가 스네이프의 생명을 구했다.
“죽은 게 아니라면...대체 넌 뭐지? 왜 다시 돌아온 거야? 기억은 보았나? 볼드모트는...”
“와, 교수님이 이렇게 저에게 질문이 많은 날은 기념비라도 세워야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아, 기념비는 아니지만 비석 하나는 세웠군요.”
“대체 아까부터 무슨 태도냐, 포터! 대답을 해!”
해리는 이제 스네이프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스네이프까지 바뀌라는 법은 없었다. 해리는 사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너무 적응이 안 되었을 테니까.
“우선, 저는 교수님이 아시는 포터는 아니에요.”
“무슨 소리지? 포터가 아니면 넌 누구란 말이냐?”
스네이프는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해리의 안경 앞에 지팡이를 겨눴다. 아하, 이런. 해리는 스네이프를 구하자마자 자신이 죽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무장해제주문이 스네이프에게로 빠르게 날아갔다. 스네이프의 지팡이는 가볍게 허공에 떴다가, 해리의 손에 들렸다. 그 행동에 스네이프는 이제 완전히 자신을 적으로 간주한 것 같았다.
“아, 물론 전 해리포터입니다 교수님. 제 말은, 제가 교수님이 지금까지 알고 계시는 해리포터가 아니란 말입니다. 저는, 1년 후 미래에서 왔어요. 황당하시겠지만, 아, 저도 정말 믿기 힘들었다고요? 이게 타임터너였어요, 교수님.”
해리는 목에 걸린 회중시계를 꺼내 스네이프의 손 위에 올렸다. 스네이프는 의심 가득한 까만 눈으로 천천히 시계를 살폈다. 뚜껑을 열자 아무것도 없는 하얀 판만 보였다.
“...시계 같지 않은데.”
“그렇죠?”
“그럼 왜 1년 후에서 네가 여기로 온 거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묻는 스네이프의 눈에 깜박 빛이 들어왔다. 질문과 동시에 대답을 깨달은 것 같았다. 정말이지 세베루스 스네이프는 인정하기 싫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군.
“나는 원래 죽었었나 보군.”
“글쎄요, 그게 좀 애매해요. 스네이프 교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 살아계신 분 앞에서 시신이라고 말하니 좀 그렇지만. 어쨌든 1년 전 저는 전쟁이 끝나고 바빠서 사흘 동안 이 오두막엘 못 왔죠. 아, 맞아, 전쟁은 우리의 승리였어요. 볼드모트를 제가 죽였어요. 음, 설명할 것이 너무 많아서 복잡하네... 어쨌든! 제가 사흘 후 돌아왔을 때, 교수님의 시체는 사라졌었어요.”
“내 시체가 없어졌다고?”
“흔적조차 없었죠. 그래서 제가 그동안 얼마나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교수님은 모르실 거예요. 물론, 굳이 알아주실 필요는 없지만요.”
“그래서 포터 네가 그 타임터너로 날 살리러 온 거다?”
“아니, 그거랑은 달라요.”
스네이프는 의아한 얼굴로 해리를 바라보았다. 해리는 몇 번 입술을 달싹였다. 목이 칼칼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사실... 프레드랑 루핀교수님, 통스 등...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전 그 사람들을 살리려고 하지 않았어요.”
해리의 시선이 스네이프를 피해 바닥을 향했다. 스네이프는 루핀이 죽었다는 말에 깜짝 놀란 것 같았지만, 곧 덤덤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질문을 하지 않고 해리의 말을 기다렸다.
“미래의 사람이 바꿀 수 없는 과거에 개입해선 안 되니까요.”
“그럼 넌 왜 날 살린 거지?”
“그건, 제가 바꿀 수 없는 과거에 개입한 게 아니니까...일까요?”
“......? 무슨 아리송한 소리냐, 포터.”
“저는 이 타임터너를 우연히 얻었어요. 전 지금 오러로 활동하고 있는데, 오늘은 혼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죠. 이게 정체를 모를 사람들의 거래물품이었고, 전 이게 무엇인지 몰라서 무슨 목적의 물건인지 알아내야 했어요. 오늘은 1년 후엔 종전기념일이죠. 교수님의 비석 앞에서, 아, 그건 금지된 숲에 세웠어요. 하여튼 전 사람들과 교수님의 추도식도 가졌어요. 오늘 하루 종일 저는 교수님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거예요. 저는 교수님의 시신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해서, 일이 어떻게 된 걸까, 전 정말 그 전말을 알고 싶었어요. 그랬더니, 이 물건이 절 1년 전으로 돌려놨죠.”
“...여전히 도통 모르겠군. 왜 날 살린 건지에 대한 설명이 안 돼.”
“모르시겠어요? 교수님의 시신은 오늘, 사라진 거예요. 왜겠어요?”
해리는 조금 웃었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웃는 얼굴을 아주 낯설게 바라보았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건 어색한 일이었다.
“제가 미래에서 와서 교수님을 데리고 사라졌기 때문에, 1년 전 저는 교수님을 찾을 수 없었던 거죠.”
그동안의 고민이 이런 식으로 풀릴 줄 몰랐다. 해리는 시원하기도 했고, 이 해답이 놀랍기도 했다. 스네이프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가득 찼지만 이것이 정답인 것은 당연했다.
그보다 해리는 한 건을 해결했다 싶은 후로, 슬슬 배고픔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타임워프 이전에도 점심시간에 가까운 때였고, 과거로 넘어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4시간 넘게 정신과 체력을 소모했다. 임무를 끝내고 호그스 헤드에서 버터맥주를 마시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버터맥주는커녕, 학생들의 대피 때문에 미어터지는 호그스 헤드에 발조차 들일 수 없을 것이었다.
해리는 다시 스네이프에게서 회중시계를 돌려받았다. 그리고 함께 돌아가기 위해 스네이프의 손목을 잡았다. 스네이프는 기분 나쁜 듯 쳐내려고 하다가, 해리의 의도를 알고 못마땅하게 손목을 내주었다. 앙상하게 마른 손목은 여자만큼 가늘었다. (비교대상은 지니와 헤르미온느 뿐이었지만, 그녀들도 무척이나 가늘었으니까) 그건 그동안 그가 얼마나 못 먹고 지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우선 자신의 배고픔이 먼저였다.
“1년 후 오늘로 돌아가고 싶어.”
해리는 시계의 뚜껑을 열고, 하얀 판에 또박또박 말을 읊었다. 스네이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해리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해리는 빨리 판이 까맣게 변해서, 황금색 세 개의 침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시계는 묵묵부답이었다. 해리는 당황해서 다시 한 번 똑똑히, 흰 판에 입술이라도 부딪힐 듯 가까이에서 말했다. 그러나 결과는 아까와 같았다. 해리는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회중시계는 미래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선 어떠한 힘도 보여주지 않았다. 해리는 눈치를 살피며 스네이프를 바라보았다. 스네이프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제 손목을 잡고 있던 해리의 손을 뿌리쳤다.
“그래, 포터. 앞으로 1년간 잘 숨어 지내야겠군. 과거의 자신과 마주치지 않으려면 말이다.”
스네이프의 입술이 비뚜름히 위로 올라갔다. 아, 그 빈정거림은 정말이지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반갑지 않았다.
아아, 믿을 수가 없어... 해리는 양손으로 머리를 틀어잡았다. 사실 이게 현실인 것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 꿈을 꾼 거다. 스네이프의 사라진 시신의 행방이 너무 알고 싶었던 나머지, 심지어 이런 꿈을 꿔버린 거다. 해리는 제 팔을 세게 꼬집었다. 아야, 따끔함에 눈물이 찔끔 났다. 사실 이게 현실이라는 건 너무도 자명했다. 애써 회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1년을 스네이프와 함께 숨어 살아야한다고...? 설마! 그런 대가를 치러야 할 줄은 몰랐다고...!
나무판자로 막힌 오두막의 창의 틈에서 어스름한 푸른빛이 비췄다. 해리의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얼굴과 스네이프의 떨떠름한 얼굴이, 틈새로 들어온 빛으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어쨌든 1년이 지나기까지 쭉 스네이프의 행방조차 알 수 없었으니, 해리는 자신이 그를 데리고 잘 숨어있었겠거니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은 이제부터 자신이 해내야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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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우리 해리 고생길이 훤하다
아니다 이것은 사랑에의 길.....